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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부르심은 사건이 아니라, 관계다 (삼상 3:1–10 / 요 1:35–39)

2026년 1월 18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ZmpNbf8AG-s?si=LHSQpTrABGHEoX1e

▣ 들어가는 말

- 처음, 그 이후…

“다빈이는 어떤 사람이 될까? 겸손하고 정직하며, 남을 사랑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故 안성기 배우가 아들(다빈)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바꿀 수 없이, 필요한 것은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아들을 향한 그의 메시지는 그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았는지, 어떤 품격을 지녔는지 가늠해 볼 수 있게 합니다. 한살이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성취했는지나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 보다 좋은 사람이었는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는지, 착한 사람이었는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한 아이의 아비 마음이 이러할 터인데, 모든 존재의 근원, 모든 존재의 아비가 되는 신께서 우리를 향해 무엇을 바라실까요. 그분은 우리를 존재하게 한 대신, 우리에게 무거운 책임, 짐을 맡기고 그것을 완수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걸까요. 그저 착하고 사랑하며 예쁘게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한 것 아닐까요.

우리는 신앙을 종종 한순간의 결단으로 기억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졌던 때, 분명한 음성을 들은 것 같았던 시간,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느꼈던 장면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순간’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을 그 이후의 시간에 할애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결심보다 지속에 의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삶은 한 번의 이벤트가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지는 흐름이기 때문이지요. 20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로 1953년 퓰리처상을,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합니다. 그 소설에서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84일 동안이나 물고기를 전혀 잡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루도 쉬지 않고 다시 바다로 향하지요. 어떻게 보면 참 미련합니다. “나는 미끼를 정확하게 놓는다.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죄악이기도 하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 아닌가.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만, 나로서는 그보다 오히려 빈틈없이 해내고 싶다. 그래야 운이 찾아올 때, 그걸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게 되거든….” 헤밍웨이는 늙은 어부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어쩌면 삶은 어떤 성과나 성취가 아니라 과정 그 자체라는 말을 하려는 것 아닐까요.

우리의 신앙은 무엇보다 삶 그 자체임이 틀림없는데, 우리는 자꾸만 신앙을 특별한 이벤트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만남은 분명 가슴 떨리고 너무 멋진 순간이지만, 사랑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함께 살아가는 일상의 과정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말이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무엘과 예수의 제자들도 그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줍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르심은 사건이 아니라 관계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응답이란, 그 관계 안에 머무는 삶의 방식입니다.

 

▣ 내가 여기 있나이다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사무엘상 3장은 매우 중요한 시대적 배경을 제시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여기서 ‘말씀’은 히브리어 ‘다바르’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정보나 문장이 아니라, 사건을 일으키는 말, 현실을 형성하는 말입니다. 말씀이 희귀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보가 부족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가 끊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왜 오늘날 하나님의 계시는 일어나지 않는가?’ ‘성경 속에 보이는 수많은 이적과 기적은 왜 일어나지 않는가?’ 질문하곤 하지요. 그러나 불행히도, 그 질문은 ‘침묵하고 있는 신’의 모습이 아니라, 신, 신성과는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하고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영혼, 우리의 빈곤한 삶의 모습을 드러내 주는 것 같습니다.

당시 엘리는 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즉각 알아듣지 못합니다. “눈이 점점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자기 처소에 누웠고” 이 모든 표현이 암시하는 바는 신을 섬기고 모시는 종교 형식과 제도는 유지되고 있으나, 경청의 감각, 신의 소리를 듣는 삶은 무뎌진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지요. 이와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표현은 신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엘리의 ‘자기 처소에 누웠다’와 사무엘의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다’를 대비함으로써 신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원인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이상 들을 줄 모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세련되고 질서정연한 종교 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전 안에 누운 한 아이의 이름을 부릅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3:10) 히브리 성경에서 이름을 두 번 부르는 방식은 매우 친밀한 부르심입니다. 아브라함, 모세에게도 똑같이 나타나지요. 이는 사명을 부여하는 명령과 같은 부름이 아니라, 관계를 다시 여는 부름입니다. 이는 신의 부름이 무엇보다 관계성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신은 우리에게 임무를 하달하는 군주가 아니라, 무엇보다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원하는 연인이나 부모와 같은 존재입니다.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는 바다를 “엘 마르”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라 마르” 엄마와 같은 존재, 관계적 존재로 부릅니다. 그는 바다를 이겨야 하고, 극복해야 하고, 바다를 통해 자신의 목표를 이루어야 하는 도구로 보지 않습니다. 그에게 바다가 ‘엘 마르’였다면, 아무것도 잡지 못한 84일은 쓸모없는 시간, 헛되이 낭비한 시간, 패배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다를 ‘라 마르’로 보았기에, 물고기를 잡고 못 잡고는 상관없이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며, ‘빈틈없이 해내야 하는 날’ 성실하게 살아내야 하는 소중한 시간인 거지요. “내일은 멋진 날이 되겠구나” 매일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밍웨이는 그 책의 제목을 “노인과 고기”가 아니라 “노인과 바다”라고 지은 것이 아닐까요. 노인이 얼마나 큰 고기를 잡았나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다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니 말이지요.

 

- 말씀하소서, 듣겠습니다.

사무엘의 응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여기서 ‘듣다’라는 히브리어는 “샤마”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청각 행위가 아니라, 듣고 삶으로 받아들이는 전인적 태도를 의미합니다. 아직 무슨 말씀이 들릴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무엘은 자신을 열어 둡니다. 응답은 이해가 아니라 열려 있음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사무엘은 이미 성소에 있었고, 이미 제사장의 곁에서 봉사하고 있었으며, 이미 종교적 환경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3장은 그가 이전과 동일한 존재로 종교적 역할을 계속 수행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장면에서 일어나는 것은, 직무의 위임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인식 구조의 해체이며, 세계를 해석하던 기준이 ‘나에게서 타자’로 이동하는 전환입니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응답은 새로운 정보를 얻겠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도권을 내려놓겠다는 존재론적 선언입니다. 이때 사무엘은 더 이상 ‘성소에 있는 소년’이 아니라, 절대적 타자 앞에 완전히 열려 있는 존재가 됩니다. 이 열림이 바로 예언자의 탄생 조건입니다. 성서에서 예언자는 특별한 정보를 독점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신의 뜻을 소유하는 자가 아니라 신의 말씀으로 자신이 계속 수정되는 존재이지요.

결국 인간의 진정한 성숙, 변화는 자기 이해의 완성에서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근본적 개방성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세계를 자기 이해의 틀로 해석합니다. 경험, 신념, 상처, 욕망은 타자를 이해하는 렌즈가 되지만, 동시에 타자를 자기 방식으로 환원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이 상태에서의 성장은 사실상 자기 강화에 가깝습니다. 더 정교해진 자아, 더 설득력 있는 자기 서사일 뿐, 근본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숙은 이 흐름이 멈출 때, 즉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에게 도달하는 순간”에 시작됩니다. 절대적 타자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이지요.

 

▣ 어디에 계십니까?

-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복음 1장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기다림, 회개, 심판, 준비의 언어 속에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곧, 더 가지면 충족될 것이라는 기대, 무엇을 얻으면 완성될 것이라는 환상이 이미 무너진 상태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욕망은 언제나 환상이 작동할 때 물질과 성취를 향합니다. 그러나 이미 환상이 깨진 사람은 더 이상 “무엇을 가지면 나아질까?”를 묻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묻기 시작합니다. “누구와 함께 이 시간을 통과할 수 있을까?” 이런 제자들의 통찰은 갑작스럽게 깨닫게 된 영적 통찰이 아니라, 이미 충분히 실패해 본 인간, 욕망이 사그라든 인간이 도달하는 지점입니다. 탕자의 걸음이 아버지의 품 앞에서 멈춰 선 것처럼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한마디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는 선언은 설명이 아니라 방향 제시입니다. “보라”는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갇혀있는 인식을 해방해 줍니다. 세례 요한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보라”라고만 합니다. 이 말은 정보를 추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자들 안에 이미 축적되어 있던 기다림의 시간, 의미가 채워지지 않던 종교적 삶, 말로 표현되지 않던 공허, 이 모든 것을 하나의 방향으로 풀어 놓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생각하고 고심해서’ 깨닫지 않고, 자기 안에 오래 쌓여 있던 갈망이 무엇을 향해 있는지 알아차립니다.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머뭇거릴 이유가 없지요.

 

- 무엇을 구하느냐?

예수의 첫 말은 뜻밖에도 질문입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구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제테이테’인데, ‘찾다, 탐색하다, 추구하다, 갈망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원어의 의미를 살려서 해석해 보면, “지금 너의 삶을 움직이고 있는 추구는 무엇이냐?” 다시 말해서, 이 질문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중심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신앙 고백보다 먼저, 그들의 욕망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묻습니다. 제자들의 목마름, 결핍을 즉시 채워 주기보다, 먼저 그 결핍, 목마름의 정체를 스스로 직면하게 만듭니다. 성숙은 욕망이 제거될 때가 아니라, 욕망이 질문 앞에 서게 될 때 시작되지요.

제자들의 대답은 더 인상적입니다. “랍비여, 어디에 머무십니까?” 그들은 무엇을 가르치느냐고 묻지 않고, 무엇을 주느냐고도 묻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디에 사느냐, 어디에 머무느냐를 묻습니다. 이는 정보를 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삶의 자리로 들어가고 싶다는 요청입니다. 이해보다 관계를, 소유보다 동행을 선택하는 질문입니다. 당신은 어떤 삶의 방식 안에 거하고 있습니까?

마치 선문답하듯 합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답합니다. “와서 보라” 만약 제자들의 질문이 잘못된 회피였다면, 예수는 다시 욕망을 묻거나 교정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삶의 자리를 열어 보이는 초대로 응답합니다. 이는 제자들의 질문이 예수의 정체를 가장 정확하게 짚은 질문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무엇을 원한다고 말할 수 없었기에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물은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 아니라 ‘함께 있음’임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물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그날 함께 거하니”… 예수와 동행하게 되지요.

 

▣ 나가는 말

- 타자의 이야기

사무엘이 “말씀하옵소서, 듣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새로운 정보를 얻은 것이 아니라 절대적 타자 앞에 자신을 열었습니다. 타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진정한 타자의 이야기는 나를 확인시켜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의 확신을 흔들고, 도덕적 안락함을 방해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래서 성숙은 언제나 불편을 통과한 이후의 상태입니다. 타자의 이야기에 귀를 연다는 것은 그 이야기가 나의 세계를 재배치할 권리를 갖도록 허용하는 일입니다. 그 목소리에 기꺼이 몸과 마음을 열 때, 그 말이 나를 뒤집어엎을 수 있도록 허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신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 절대적 타자

인간과는 완벽히 질적으로 다른 이, 신이 절대적 타자라면 그에게는 나의 욕망, 이상, 결핍이 투영될 수 없습니다. 절대적 타자는 닮음의 가능성 자체를 거부합니다. 따라서 신은 나를 연장하지 않고, 나의 결핍을 보상하지 않으며, 나의 세계관을 장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은 나로 하여 나 자신을 더 이상 중심에 둘 수 없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의 말씀은 언제나 낯섭니다. 신의 말씀이 진정으로 신의 것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나에게 불편해야 합니다. 이미 동의하는 것, 이미 이해한 것, 이미 옳다고 생각한 것만을 말하는 음성은 신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확신의 메아리일 가능성이 큽니다. 절대적 타자의 음성은 나를 위로하기 전에 나를 노출시키고, 나를 확증하기 전에 나를 질문하며, 나를 보호하기 전에 나를 책임의 자리로 이동시킵니다.

 

- 성숙한 인간

성숙한 인간이란, 응답 가능한 인간입니다. 이 관점에서 성숙이란 완결이나 안정이 아닙니다. 성숙한 인간은 자기 서사를 완성한 사람이 아니라, 타자의 이야기에 계속 수정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특히 절대적 타자 앞에서의 성숙은 이렇게 정의될 수 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최종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나는 불러질 수 있고, 질문받을 수 있으며, 수정될 수 있는 존재로 산다. 신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인간이 성숙해지는 가장 탁월하고 급진적인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사건이 아니라 관계로 부르시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게 하소서.

무엇을 더 얻으려 애쓰기보다, 당신 곁에 머무는 삶을 선택하게 하소서.

익숙한 확신보다 낯선 질문 앞에 겸손히 서게 하시고,

절대적 타자이신 주님 앞에, 열린 존재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내가 진 것은 고기가 아니라, 고기를 잃은 이후였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다. 파괴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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