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er::bec483ba-d204-47d4-afbd-8005746530c3

기타

부자 이야기




부자 이야기

눅 16:19-31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누가복음 이외의 다른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미 초
기 기독교 안에 일반적으로 전승되어오던 이야기이지만 누가복음 기자
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또는 잘 알려지지 않던 이 전승이 특별한 과
정을 통해서 누가에게만 알려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이 이야기가
상당히 신화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서 배
제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비록 다른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지만 누가의 특별한 신학적 해석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우리
에게 소중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서의 다른 부분에 예수님이 부
자들을 향한 경고가 간혹 있기는 합니다만 오늘 본문처럼 아주 직접적으
로 부자와 거지를 비교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게 어렵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큰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최
고급 옷을 입고 늘 무도회와 연회를 여는 것을 인생의 모든 것으로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그 집 대문간에는 '나사로'라고 하는 거지가 종기투성
이의 몸으로 앉아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
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두 사람 모두 죽었는데, 거지 나사
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고통스러운 땅에 묻히게 되
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가 있어서 물 한모금
도 얻어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 식구들에게 가서 이런 사실
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리 죽은 사람이 다시 살
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어떤 사실이 아니라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예
수님이 지으신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내려오던 이야기 중의
하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내용은 약간 희극적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은 하나님이어야 하는데 아브라함이 등장하고 있으며, 양쪽에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는데도 서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 자
체가 사실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무언가 명백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대립적인 두 상황
오늘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극단적인 두 인생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한쪽은 부자이며, 다른 한쪽은 거지입니다. 부자의 삶은 이렇게 서술되
어 있습니다.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
활을 하였다."(19절). 옛날부터 사람들은 옷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기울
였습니다. 옷이 사람의 지위를 드러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부자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최고급 패션쇼에 출
품된 작품만 골라서 입지 않았을까요? 이 사람은 그런 의상을 걸치고 거
의 날마다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나
사로라는 거지는 이 부자와 전혀 다르게 살았습니다. 온 몸에는 악성 피
부병으로 성한 구석이 없었고, 호구지책도 딱히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매일 그 사람을 이 부자의 대문간에 들어다 놓았다는 것을 보면 혼자 움
직이지도 못하는 장애인이었던 같습니다. 이 나사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면서 겨우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습
니다. 그의 상황은 개들이 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는 설명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오늘 본문의 전반적인 줄거리는 예수님이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서
만든 것이긴 하지만, 나사로와 부자의 삶에 대한 묘사는 그 당시에 있을
법한 일입니다. 더구나 그런 대립적인 두 상황은 고대만이 아니라 지금
의 시대에도 역시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한쪽은 소유가 넘쳐나
기 때문에 소비에 치중한다면, 다른 한쪽은 생존의 위협 때문에 최소한
의 인간다움마저 훼손 당합니다. 강남의 최고급 아파트나 정원이 넓은
개인 주택에 사는 사람들과 영등포 역 부근의 쪽방에 사는 사람들은 비
교해보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의 부자와 나사로 같은 상황은
오늘의 시대에도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대구에도 일어납니다. 우리
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모를 뿐입니다.
이 문제를 조금 확대해서 보면, 국제간에도 부자로 사는 나라가 있고
나사로로 사는 나라가 있습니다. 미국은 분명히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
로 부자입니다. 이라크나 파키스탄은 나사로입니다. 물론 미국은 그들이
그렇게 노력했기 때문에 그런 삶의 여유를 누릴만하고, 이라크나 파키스
탄은 무책임했기 때문에 가난하게 살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로 미국에 우호적인 정치가나 목사들이 그렇게 말하곤
합니다.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게 사는 것을 우리가 합리화할 수는 없
으며, 마찬가지로 성실한 사람이 여유를 갖고 사는 것을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런 사회학적 접근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처한 그 상황 자체에 관심을 가질 뿐입니다. 한쪽은 넘치는 풍
요로움이며, 다른 한쪽은 극한의 궁핍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이런 구조가 진행되고 있다는 게 참으로 기이합니다.  

뒤바뀐 운명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두 사람이 죽은 다음에 형편이 완전히
정반대로 바뀌었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
는 죽음의 세계인 땅에 묻혀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부자가 스올이
라고 일컬어지는 음부에 떨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오늘 이야기에서 명시
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가 극한 목마름의 고통 속에서 물
한 모금이라도 허락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 때 나
온 아브라함의 대답 중에서 이 부자의 문제가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설명
되어 있습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나
사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25절).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면 이승에서 불행하게 산 사람이었던 나사로는 저승에
가서 행복하게 살게 되었고 이승에서 행복하게 살았던 부자는 저승에 가
서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이 세상에서 불행했던 사람이 구원받고 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은 어
떤 면에서 성서의 기본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도
'팔복' 말씀 가운데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
기서 말하는 복은 당연히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은 가난 자체가 선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가난이라는 상
황이 그로 하여금 초월적인 세계를 기다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런 상황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가난이
매우 심각한 구조적인 문제였습니다. 노예의 자녀들은 노예가 되고 가난
한 사람의 자녀들은 여전히 가난하게 살아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다른 세계, 초월적 세계를 강렬하게 요구하게 됩
니다. 바로 이 사실로 인해서 이런 사람에게는 절대적인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반면에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틀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 세상이 참으로 만족스럽습니다. 부자들은 대대로 부자로 살
수 있고, 자유롭게 살 수 있고, 높은 신분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귀족은
여전히 귀족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들은 현실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
는 것을 바랍니다. 이 세상이 바뀌는 것은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
다. 그래서 이들은 이 세상의 모든 틀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절대적인 세
상, 저 세상이 오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
님의 화가 미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
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
이다."(눅 6:24,25).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분명히 혁명적인 요소가 담겨 있
습니다. 유대 지역을 다스리던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형
에 선고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이런 혁명적인 기운을 확신했기 때
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혁명이라고 해서 늘 정치 사회적 계급투쟁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의 운명이 정반대로 뒤바뀌는 세상을 선포
한다는 사실 자체가 혁명적인 것입니다. 사실 모든 건강한 종교는 혁명
의 씨앗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근본이 바뀐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기
독교에서 강조하는 '회개'(메타노이아)가 바로 이런 뒤바뀜의 삶을 의미
합니다.  

부자의 근본 문제는 무엇?
오늘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런 것만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팔복'의 가르침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을 풀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본문을 세심하게 분석해야만 합니다. 오
늘 이야기의 전체 구성을 보면 그 핵심이 나사로 거지가 아니라 부자라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승에서는 가장 화려하게 살다가 저승에 가서
는 가장 처참하게 살게된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가 전체 이야기를 끌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
이라면 위에서 설명한 것으로 끝나도 되지만 부자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다른 그 무엇을 찾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으
로 이 세상의 풍요로움에만 마음을 쏟지 않는 부자들이 존재한다 점에서
이 문제의 새로운 지평을 우리는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이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요청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
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
이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24
절). 그러나 아브라함은 위에서 인용한대로 살아있을 동안에 누린 복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에 이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또한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 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26절). 문학비
평적인 관점에서 볼 때 '큰 구렁텅이'라는 표현이 어떤 사실을 상징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렇듯 저승에서 벌어진 서로 왕래가 불가
능한 상황은 이미 이승에서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 놓여있는 상황을 가리
키는 게 아닐까요? 결국 이 부자의 문제는 단지 부자라는 사실 때문이라
기보다는 자기의 삶과 나사로의 삶을 완전히 단절시켜놓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본문에 등장한 이 부자가 크게 잘못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아
브라함의 입에서도 그런 책망이 없습니다. 부도덕한 방식으로 돈을 벌었
다는 지적도 없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순전히 자기의 노력으로 정직
하게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집 대문간에서 죽치고 앉아있는
나사로를 내쫓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정도라면 상당히 인격적인 사람임
에 틀림없습니다. 이 부자는 크게 잘못한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
게 잘한 일도 없습니다. 그의 삶에는 자기 집 대문간에 앉아서 구걸하며
삶의 버텨내던 나사로가 들어올 공간이 없었습니다. 일종의 무관심입니
다. 부자와 나사로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각자가 살아갈 뿐이었습니다.
부자는 그렇게 자기의 삶의 단절시켰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수준이 맞는
사람들과 매일 축제를 나누며 살았습니다.
이게 바로 부자의 한계였으며 현대인들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사람
과 사람 사이에, 집단과 집단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더 깊어집니다. 가능한 대로 다른 사람이나 집단과 상관
없이 살아갔으면 합니다. 동정심이나 교양이 부족해서 무관심한 게 아니
라 기본적으로 자신들은 그들과 '다르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부자가 매
일 대문을 드나들면서도 나사로에게 무관심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주
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간혹 북한 문제에 대해서
대화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어떤 사람들은 북한을 '소 닭
보듯이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무언가 귀찮은 사람들처럼 생
각합니다. 이런 대상은 여럿입니다. 돈 벌러온 조선족이나 동남아 노동
자들에 대해서도 그런 마음을 갖습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전라도 사람들
에게, 거꾸로 전라도 사람들은 경상도 사람들에게는 이런 무관심을 보입
니다. 소통이 없는 사태가 바로 지역감정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다 해도
오늘 이야기의 후반부는 훨씬 비관적인 사태로 흘러갑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애원했습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소원입니
다. 나사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
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27,28절).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네 형
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
다."(29절). 이 부자는 형제애가 깊었는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아
브라함 할아버지,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난 사람이 찾아가야만 회개를 할 것입니다."(30절). 이에 대한 아브라함
의 대답은 싸늘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31절).
이 부자가 자기 아버지 집에 형제가 다섯이나 살고 있다는 것을 보면
이 부자는 비교적 젊어서 죽은 것 같습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
였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부자로 살면서 형제애가 깊었던지 이 사람은
살아있는 자기 형제들이 더 이상 자기처럼 살다가 이런 험한 꼴을 당하
지 않도록 실상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서 그것은
불가능한 사건으로 규정됩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
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과연 이 말은 맞습니까?
우선 구약의 역사를 보면 아브라함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있습
니다. 구약에 진술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
을 때가 많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
셨는데도 얼마 가지 않아서 그들은 가나안의 이방신을 섬기곤 했습니다.
홍해, 만나와 메추라기, 여리고성 함락, 등등 수많은 기적적인 사건들을
일으키셨습니다. 심지어는 해와 달을 잠시 멈추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운 일이 벌어지거나 아니면 너무 편안
하게 되면 다른 길을 갔습니다. 이런 일은 한 두 번이 아니라 거의 모든
구약의 역사가 이런 악순환으로 가득합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까요? 이스라엘 민족이 원래 변덕이 심하거나 믿음이 부족해서 그럴까
요?
중요한 건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일들이 일어나는가 아닌가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어놓는가 아닌가에 있습니다. 만약
자기의 인생살이를 성취하고 그것을 만족시켜나가는 것에만 마음을 두
고 있는 사람이라면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 잠시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 즉시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을 돌립니다.
다른 그 무엇이 그 사람의 마음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어
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그 부자의 형제들이 하나님에
게 마음을 열지 않을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진단은 옳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부도 맞을 상황에 처한 사업을 지켜
달라거나 불치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런 기
도를 드리고 사업이 복구되거나 병이 치료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들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 사건을 경험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신앙이 건강하게 유지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신자들은 그런 일들에만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죽었다가 다
시 살아나는 것'같은 일들에 대한 호기심입니다. 잠시는 떠들썩하겠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또 다시 마음이 공허해집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듯
'믿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것보다 일상에서 하나님에게 마음
을 열어두는 자세가 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부자와 거지 사
이에도 참된 연대성이, 또는 최소한의 관심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2003.10.12>


누가복음 16:19-31

설교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