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증인 공동체
사도행전 2:22-32, 부활절 둘째 주일, 2011년 5월1일
오늘은 부활절 둘째 주일입니다. 부활절 절기는 지난 주일부터 시작해서 일곱 주간동안 계속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과 한 묶음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수레를 끌어가는 두 바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겠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별로 그렇지 못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인들도 겉으로만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지 실제로는 관심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십자가에 달렸을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삶은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과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부활도 역시 비슷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방식으로는 증명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별로 없을 겁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왜 이렇게 사람들의 일반적인 종교심과는 거리가 먼 사건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았을까요? 우리는 그런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 있을까요? 아니면 점점 멀리 떨어져 나오는 중일까요.
오늘 설교의 본문인 사도행전 2:22-32절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공식적인 첫 설교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베드로가 행한 첫 설교입니다. 베드로는 잘 먹고 잘 사는 것, 요령껏 출세하는 것을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합니다. 이것 이외의 것들은 다 부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십자가와 부활을 신학적으로 규정합니다. 그게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아주 중요합니다. 먼저 십자가에 대한 규정입니다. 23절에서 베드로는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사두개파, 서기관 등, 당시 오피니언 리더들이 중심으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근거해서 기존의 유대 종교를 강하게 비판한 나사렛 예수를 신성모독과 사회소요 죄로 로마 정권에 고발했습니다. 결국 유대 종교와 로마 정치의 야합으로 예수님은 당시 가장 저주스러운 형벌인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은 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갔을까요? 그들이 파렴치하거나 비인격적이거나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못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절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단 결정적인 이유는 메시아가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메시아를, 즉 메시아의 일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늘도 이런 일은 반복됩니다. 지금 당장 메시아가 나타난다고 해도 우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달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는 메시아 살해가 반복됩니다. 무죄한 이의 고난이 계속된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십자가에 대한 신학적 규정에 이어서 부활에 대한 신학적 규정을 이렇게 내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24절) 부활은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시편 16:8절 이하를 인용해서 다윗이 이미 주님의 부활을 내다보았다고 설명합니다. 이 사실을 32절에서 다시 한 번 더 확인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다는 말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다시 살지 못합니다. 무작정 오래 살지도 못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지금까지 다시 산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 살았다는 소문은 많습니다. 죽어서 천당을 보고 돌아왔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가사체험이지 실제로 죽은 게 아닙니다. 그런 주장은 마치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 물을 다시 거꾸로 돌려서 강과 골짜기로 보냈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복음서에도 다시 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긴 합니다. 나인이라는 마을에 살고 있던 과부의 외아들이 죽어서 상여에 실려 가다가 예수님의 의해서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인 나사로도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합니다. 복음서의 이런 기록들은 실제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그런 방식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에 나온 이들이 다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데서도 이 이야기가 부활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가사체험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다시 살아났다가 또 다시 죽는, 그리고 다시 또 살아나는 윤회도 아니고, 환생도 아니고, 영원한 회귀도 아닙니다. 아담 이후로 죄와 죽음에 묶인 인류의 운명을 끝장내고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 사건입니다. 종말론적인 구원 사건이라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부활은 지금 여기서의 이런 생명 형식이 영원하게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 무궁히 잘 살고 잘 먹는 세상살이의 반복이 아닙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늘 그런 삶을 꿈꿉니다. 그런 꿈이 이집트 파라오들에게는 피라미드의 지하세계 건설로 나타났습니다. 중국의 황제들 중에서도 그런 지하세계를 건설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꿈은 아무리 야무지게 보여도 허황된 것입니다. 지금은 모두 관광지가 되었을 뿐입니다. 파라오의 미라나 간혹 매스컴에 보도되는 평범한 이들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미라나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꿈이 현대인들에게는 국가, 재산, 후손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삶은 아무리 야심차게 계획해도 결국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결국 죽음과 허무로 끝나는 삶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하나님이 종말에 새롭게 시작할 생명으로의 질적인 변화입니다.
이런 설명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도대체 새로운 생명이 뭐냐 하는 겁니다. 그런 것보다는 지금 당장 여기서 최소한 행복하게 사는 게 소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가족들 건강하고, 자식들 부끄럽지 않게 성장하는 행복을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여러분이 원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들은 굳이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들입니다. 원만한 인격과 적당한 경력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 것만을 생각한다면 굳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둘째, 우리가 원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들은 우리를 실제로 행복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이미 경험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저는 테니스 운동을 할 때 즐겁습니다. 그게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제외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테니스가 아무리 즐거워도 그 운동을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만으로 행복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그만 두어야 하고, 그런 순간이 오기 전에도 그것 자체의 재미가 계속되지 못합니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말하는 새로운 생명은 창조 생명과 같습니다. 창조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창조는 개량이 아닙니다. 모양이나 기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없던 것을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고 합니다. 무와 유가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하면 아득합니다. 장자 유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루살이와 코끼리는 무게가 똑같다고 합니다. 둘 다 존재한다는 차원에서는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세계로부터 무언가가 나왔다는 것은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이제 이 세상은 또 다시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것이 종말입니다. 창조의 완성입니다. 그런 창조의 종말론적 완성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베드로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무엇에 근거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할 수 있었을까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영적인 통찰력입니다. 세계를 고정된 시각이 아니라 영적으로 열린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베드로의 설교는 시편 16편을 인용했습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그 말씀을 해석한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던 시편이지만 그게 모두 눈에 들오지는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 현현에 대한 고유한 경험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에 함께 살았던 예수님을 부활체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선택된 이들입니다. 그들만 선택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불평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선택받을 만 했습니다. 제자들은 제자로 불림을 받을 만했습니다. 다른 분야도 그렇지 않습니까. 뉴턴은 만유인력을 발견할 만한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그의 과학적 통찰력을 통해서 숨어 있던 만유인력이라는 물리현상이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통찰력과 예수 부활 현현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고, 그것을 용감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나 안티 그리스도인, 또는 교회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도마처럼 꼼꼼히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다음과 같은 궁금증이 생길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무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나 그런 경험을 아무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증명하려면 반복이 가능해야만 하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반복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주 전체의 역사를 통해서만 증명이 가능한 어떤 궁극적이고 유일회적인 사건을 역사 내에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4차원을 3차원에서 증명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그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도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궁극적인 것을 경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이 아니라 증언하려고만 했습니다. 베드로는 32b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이들의 영적인 부담감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상상이 갑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도 않고, 동의하지도 않는 종말론적 생명 사건을 증언한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부활 경험에 대한 증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경험이 너무 확실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증인이라는 헬라어 ‘마르튀스’는 순교자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리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자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부활에 완전히 걸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부활의 증인 공동체로 자리 매김을 한 것입니다. 거기에 교회의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전통에 서 있습니다. 부활의 증인 공동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나요? 그 대답은 제가 일일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삶의 모양이 다 다르듯이 여러분 각자가 다 다른 대답을 찾아야 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하나의 방향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인 부활을 우리 삶의 현실(reality)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억압구조에서도 자유와 해방을 맛볼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속성들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바울은 이 부활 신앙에 기대서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 바울의 이 고백은 자신을 부활의 증인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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