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순종의 역설
롬 11:1-2a, 29-32, 성령강림후 제11주, 2014년 8월17일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손에 꼽으라고 한다면 바울이라고 대답할 분들이 많을 겁니다. 옳습니다. 복음의 신학적인 토대를 놓은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은 몸으로 뛰면서 복음을 유럽 곳곳에 전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글도 남겼습니다. 그의 글들이 나중에 신약성경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중의 대표적인 게 로마서입니다. 그가 고린도에 머물고 있던 기원후 55-56년 어간에 로마서를 집필했습니다. 그때는 그리스 지역 교회에서 모금한 돈을 들고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방문한 뒤에는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할 계획을 짰고, 가는 길에 로마교회를 방문하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이런 생각을 로마서에 다 담았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익명의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설립된 교회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다른 이들이 교회를 설립한 지역에 가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습니다만, 로마만은 예외였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선교 전략적으로 로마에 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로마교회가 기독교의 미래를 위해서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에 로마 교회에 로마정권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행 18장에는 바울의 고린도 선교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서 그는 유대인 부부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납니다. 그들은 로마에 살다가 기원후 49년에 있었던 클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에 따라서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정착한 사람들입니다. 당시 로마는 회당과 교회를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도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로마교회에는 신학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교회 구성원들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는데, 초창기에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많다가 클라우디오 추방령 이후로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전혀 다른 배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같은 로마교회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점에서 입장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같은 교회에 나오지만 진보적인 성향의 신자들과 보수적인 성향의 신자들 사이에 입장 차이가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배경을 놓고 로마서를 읽어야 합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를 얻고 구원에 이른다는 점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로마서에서 강조했습니다. 유대인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죄를 짓고, 이방인들은 율법 없이 죄를 짓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이방인들이야 원래 율법이 없었으니 바울의 말을 받아들이는데 큰 저항이 없었지만 율법을 절대화하던 유대인들은 바울의 주장을 불편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반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도 바울의 주장을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과 바울의 갈등이 갈라디아서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당시 유대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토라를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유대 기독교인들의 가르침을 가리켜 ‘다른 복음’이라고,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이단이라고 규정하면서 그걸 전하는 사람들에게 저주가 임하기를 바란다는 극단적인 발언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율법주의를 가리켜 롬 10:21절에서 사 65:2절을 인용하면서 불순종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율법은 원래 선한 것입니다. 그걸 따르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태도를 불순종이라고 말하는 건 언어도단처럼 들립니다. 예컨대 여기 법관이나 의사가 있다고 합시다. 이들은 사회에서 존경받습니다. 다른 한쪽에 조폭들이 있다고 합시다. 이들은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법과 의료를 통해서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들을 나쁘다고 할 수 없고, 불법과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선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으로 본다면 선과 악의 경계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를 보면 대답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성실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오히려 불순종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볼 때 율법에 충실했던 이스라엘이 바로 이런 경우였습니다.
바울의 고민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불순종에 떨어졌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일까요? 초기 기독교 당시에 유대교 전통을 완전히 배척하려는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유대인들의 경전인 구약성경을 빼고 신약성경만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자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나름 일리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할 빌미를 주었고, 또 어딜 가나 실제로 말썽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고 있던 시대의 로마에서도 황제들이 골치 아파 할 정도로 문제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요즘도 팔레스타인 원주민들과 계속 싸우고 있는 데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롬 11:1, 2에서 명시적으로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나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즉 자비를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거부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거부로 인해서 복음은 이제 이방인을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나가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얻음으로써 이제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런 불순종을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셔서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셨다는 게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바울의 해석입니다. 상당히 까다로운 논리니까 좀더 자세하게 봐야겠습니다. 우선 32절 말씀을 보십시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사로잡힌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사로잡히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불순종의 책임이 사람에게 없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출애굽 과정에서도 성서기자는 하나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은 책임이 파라오에게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고 한다면 아담과 이브를 뱀이 유혹하지 못하게 하셨어야만 했고, 아담과 이브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셨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면 뱀의 유혹도 역시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냐 하는 반론이 성립됩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을 이미 알고 계셨다면 그걸 막았어야 했는데, 그냥 허락하셨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예수님이 체포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결국 유다의 배신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위니까 유다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 생각은 성서를 오해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불순종에 사로잡히게 했다는 말은 그 불순종이 훈계나 계몽이나 지적 훈련을 통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이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2천 년이나 5백 년 전에 비해서 지금 모든 면에서 여유가 있고 공부도 많이 했지만 현대인들이 당시보다 더 순종적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인류라는 거창한 차원까지 갈 필요 없이 개인에게서도 이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제 수준이 높아지고 학력이 올라가고 교양이 많아진다고 해서 사람이 순종적이던가요? 정의롭던가요? 평화롭던가요?
성서가 말하는 불순종은 단순히 겉으로 교회와 사회질서를 잘 지켰느냐 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속합니다. 마틴 루터는 본문의 불순종을 불신앙(Unglaube)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불순종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겁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자기를 성취하려면 욕망이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이게 이상하게 들리시지요? 오늘의 시대는 늘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를 완성하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불순종과 불신앙은 이런 자기 집중에서, 자기를 높이는 교만에서 옵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무리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는 세력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사로잡히게 했다는 말은 이런 인간의 실존적 깊이를 정확하게 뚫어본 이야기입니다. 저는 바울의 이런 통찰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진술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이걸 경험해보셨는지요?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구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비인 이유는 칭의와 구원이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만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구원사건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전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사람과 재산과 물건과 이념과 종교적 업적이 몽땅 사라져도, 아니 그럴 때만 경험할 수 있는 평화와 안식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은 그것을 죽어야만 얻겠지만 영적인 사람은 살아있을 때 당겨서 경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우리는 이미 죽었고, 그와 더불어 부활했다는 사실이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의 이런 신학적인 설명은 철저히 세속적이고 욕망 중심으로 작동되는 이 세상에서는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가장 근원적인 세계를 말하기 때문에 2천 년 전에 기록된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영혼을 건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큰 능력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능력으로 찾아올까요?
오늘의 불신앙과 불순종 앞에서 절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돌아가는 꼴을 보고 종종 절망합니다. 짜증나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세상이 정의롭지 못합니다. 부익부빈익빈 현상도 좋아지지 않습니다. 요즘 로마가톨릭 교종(교황)이 한국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는 짧은 체류 기간에도 사회 문제에 대한 언급을 많이 했습니다. 평화는 단순히 싸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는 말을 했습니다. 청와대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들을까요? 우리 국민들도 저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을까요? 8월15일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강론에서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정신적 쇄신을 가져오는 풍성한 힘이 되기를 빕니다. 그들이 올바른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짓누르는 물질주의의 유혹에 맞서, 그리고 이기주의와 분열을 일으키는 무한 경쟁의 사조에 맞서 싸우기를 빕니다.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빕니다.” 우리나라가 로마가톨릭 국가가 아닌데 특이하게도 이번 교황 방문이 전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스컴이 대서특필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지 그의 방문으로 인해서 우리 사회가 크게 달라졌으면 좋겠지만, 한 번의 신선한 이벤트로 끝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가 오늘 자본숭배와 무한 경쟁이라는 메커니즘에 완전히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교육, 군대, 법조계, 종교계가 다 그런 상황입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경제를 살리자.’고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성장, 성장’만 외칩니다. 이게 지긋지긋하지 않습니까? 제 설교를 들으면서 당신은 지금 세상살이가 얼마나 살벌한지 몰라서 하는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세상을 너무 나이브하게 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할 분들도 계시겠지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 살아야 되지 가난하면 모든 게 끝장이라고 말입니다. 가난으로 인한 고통이야 누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생존이 위협당하는 상황만은 서로 힘을 합해서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먹어도 허기에 시달리는 난치병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런 현실만 보면 될 대로 되라, 나는 모르겠다, 어쨌든지 나와 우리 식구만이라도 잘 견디면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과 냉소가 우리의 영혼을 채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불순종과 불신앙에 대한 바울의 진단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인간의 불순종을 오히려 자비의 기회로 만드십니다.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고,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시고(creatio ex nihilo), 예수님을 죽은 자로부터 살리신(resurrectio mortuorum)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고 인정하심으로써(justificatio impiorum) 자비를 베푸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일은 늘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그걸 우리는 신비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오늘 설교 본문 바로 다음 구절인 롬 11:3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읽고 하나님이 모든 걸 다 알아서 해결하실 테니, 더 나가서 나의 불순종과 불신앙까지 자비의 기회로 삼으실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살면 되겠군, 하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이런 생각은 신앙적인 게 아니라 무책임한 겁니다. 신학적으로는 그걸 값싼 은혜주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깊다는 사실을 실제로 아는 사람은 자신의 불순종과 불신앙을 꾸준히, 그리고 치열하게 교정해나갑니다. 순종과 신앙의 차원으로 달음질합니다. 개인과 사회가 정의로워지도록 최선을 다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비에 온전히 의존하는 사람들의 당연한 태도입니다. 바울이 고전 9:24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이라고 고백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이 아무리 불순종과 불신앙에 찌든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인은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풍성하고 심오하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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