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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마 20:1-16

나라 안과 밖이 연일 시끄럽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인
데 시끄럽지 않을 수 없긴 하지만 그런 소요가 사람과 세상의 생명을 살
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갈등이라면 당연히 견뎌내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현실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불편합니다. 국제 정치 문
제로부터 국내의 노동현장이나 부동산, 또는 교육과 경제 문제에 이르기
까지 이러 저리 꼬여있는 이 많은 문제의 핵심에는 사람의 마음이 놓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약간 엄격한 교육관을 갖고 있
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있습니다. 공부 시간에 떠드는 학생들에게 일정한
체벌을 가하곤 했습니다. 40 명에 이르는 그 반 아이들은 이 선생님에
대한 평가가 가지각색입니다. 너무 심해서 학교에 다니기 싫다. 그렇게
해야 수업이 진행되니까 괜찮다.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기준들이 각양각
색이기 때문에 같은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는 데도 불구하고 매우 다르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야겠습니다. 인도나 파키스
탄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말할 수 없이 열악하면서도 그들의 행복지수는
소위 선진국 국민들보다 높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서 저는 비참
한 생활 속에 빠져있으면서도 그것을 헤쳐나갈 용기도 없고 그런 시도도
없이 사는 숙명주의를 예찬하는 게 아닙니다. 또는 정신병자들처럼 파괴
된 자기의 삶에서 만족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도 아닙니다. 선진국
이나 우리처럼 상대적으로 넉넉하게 살면서도 행복지수가 낮게 나타나
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행복의 기준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서 다르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
뿐입니다. 불교의 가르침도 인간의 마음을 매우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겠지만 사실 성서의 가르침도 삶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고 있습니다. 즉 삶의 능력과 행복은 어떤 객관적인 수준을 성
취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대하는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선택한 본문에서 이런 가르침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부당한 대우에 대한 불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늘 우리의 고정관념을 근본적
으로 깨드리고 있습니다만 오늘 본문은 훨씬 예리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수확기를 맞아 아침 일찍 노동시장에 나가서 노동자들을 데리고 왔습니
다. 그 당시의 일당인 한 데나리온에 계약을 맺었습니다. 아침 아홉 시에
다시 노동시장에 나가보니까 일거리를 찾지 못해서 빈둥거리는 사람들
이 있어서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다"는 말과 함께 그들도 포도원으로 데
리고 왔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열 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노동자
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 주인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오
후 다섯 시에 다시 노동시장에 나갔습니다.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
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이 말을 들은 실직자들이 이렇게 대답
했습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7
절). 포도원 주인은 이 사람들도 포도원으로 데리고 가서 일을 시켰습니
다. 여섯 시에 하루 일을 끝내고 일당을 지불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늦
게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습니
다.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하루치의 일당을 준다는 것은 자선사업
이 아니라면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정말 횡재를 만
난 셈입니다. 아침 일곱 시부터 일한 사람은 속으로 최소한 두 데나리온
은 받겠거니 하고 기대했겠지요. 그런데 이 사람도 한 데나리온밖에 받
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투덜거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
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12절).
우리는 주인 앞에서 투덜거리면서 따지고 든 이 사람들의 마음을 이
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불평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아홉 시간 일
한 사람과 한 시간 일한 사람을 똑같이 대우한다면 당연히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억울한 마음이 들것입니다. 자기들에게 많은 보상을 해주든지 아
니면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적게 주든지 해야하는데, 이것도 아니고 저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이 주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홉 시간이나 뙤약
볕에서 포도를 따느라고 고생한 이 사람들의 불평은 일리가 있습니다.
이들의 논리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이런 식으로는 결코 삶
의 능력을 가질 수도 없고, 따라서 행복한 길을 갈 수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이런 논리에는 우리의 삶을 훼손시키는 결정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자기의 능력과 그 보상을 다른 사람과의 비
교에서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살아가는 한 불평
은 끊이지 않게 되고, 따라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남보다 좀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서야만 행복할 것처럼 착
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조건을 성취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
지 자기를 능력을 내보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노력에 상당한 대우를
받으면 흡족해 하지만, 받지 못하면 세상을 원망하게 됩니다. 이런 방식
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결국 자기성취와 불평 사이의 악순환에서 벗어
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이렇듯 비교 우위론에 토대를 둔 삶이
오늘 현대인들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이 사회를 끌어가는 추동력
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는 절대적인 삶이 훼손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취약합니다. 예컨대 대학교 선생님들의 연구와 봉사업적을
연봉에 연동시키는 이런 발상은 그것이 아무리 자본주의적 현실에 입각
한 합리적 논리라고 하더라도 너무나 유치한 일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대학사회에서 자신들의 행위를 상대적인 평가에 의존시키고 있다는 말
이 됩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늘 한쪽에서 불평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
다. 서로 자기에게 유리한 점수제도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필요 없는 논
쟁에 휩쓸리게 됩니다. 결국 인간적인 연대감은 실종되고 단지 상대적인
우월감만 지배하는 공동체로 남게 되겠지요.

정의가 무엇인가?
투덜거리는 사람들은 아마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
게 경제원리의 체계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경제정의를 파손하는 행위이
다, 땀 흘린 만큼의 보상을 받는 것만이 이 사회의 정의를 일구어내는 지
름길이다, 하고 말입니다. 저는 경제와 노동의 문제에 대해서 아는 게 많
지 않기 때문에 이런 논리가 무조건 맞는지 틀리는지 판단할 수는 없습
니다만 이런 원리가 그렇게 정의롭지 않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능력만큼의 월급, 또는 일한 만큼의 연봉이라는 원칙은 철저
하게 자본주의적입니다. 무엇이 과연 능력인가에 대해서도 따져보아야
할 요소가 많긴 하지만 어쨌든지 실제로 육체적으로 노동하는 시간이 많
거나 아니면 회사 관리에 뛰어나거나 상술이 뛰어나다거나, 이런저런 방
식으로 회사에 이익을 많이 남기게 해주는 것을 우리는 능력이라고 말합
니다. 그래서 요즘 모든 회사들이 실적과 능력 위주의 임금체계를 선택
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그것이 곧 정의라고 생각하겠지요. 이런 주장
에 일리가 있습니다. 또한 이런 식으로 굴러가야 생산성과 경쟁력이 제
고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예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설명되어 있듯이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일할 거리가 없어서
하루 종일 빈둥거려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나
요? 이런 능력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실제로
학력이 부족하거나 장애를 가졌거나 외국인 노동자인 사람들이 많습니
다. 겨우 한 시간 일할 수 있는 능력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생산성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그들이 십분의 일 데나리온을 받아야만 정의로운 세
상일까요? 아니면 이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고, 열 시간의 능력
이 있는 사람들에게 열 데나리온을 각각 주어야 정의로운 사회가 될까
요?
포도원 주인은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게 바
로 자기의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무슨 잘못이냐, 라고 묻습니다.
"내 후한 처사가 거슬린단 말이오?" 이 주인에게는 능력과 상관없이 모
두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게 바로 정의였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
런 방식으로 회사를 경영하다가는 오래 가지 않아 부도가 나겠지요. 그
러나 원칙은 이런 방식으로 나가야 합니다. 비록 생산성은 떨어질지 모
르지만 능력의 차이에 상관없이 생존에 필요한 대우를 받아야 사람 사이
의 연대성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상대적 박탈감이나 그런 만족감에 사
로잡혀 있는 것보다는 인간적인 연대감 안에 있을 때 인간은 훨씬 행복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도 차별이 있을까?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는 본문의 마지막 구
절을 감안해서 본다면 예수님의 이 비유는 종교적 업적에 만족하고 이방
인들과 죄인들을 업신여기는 바리새인을 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무언가 자기들에게 특별한 대가가 주어지
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기대감을 갖고 열과 성을 다해서 율법
을 지키고 모범을 보이려고 절치부심 했습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그
들은 그 사회에서 지도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 나오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마 모든 종교
의 밑바탕에는 이런 생각이 깔려있을지 모릅니다.  
요즘도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천국에 가서 자기들에게 특별
한 상이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착한 일
을 많이 하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했으니까 하나님 나라에서는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이런 주장이 근본적으로 틀
렸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상당히 위험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우선 하나
님 나라를 이 땅의 질서가 연장되는 것으로 생각할 위험이 있습니다. 만
약 등수에 따라서 차등 지급되는 이 땅의 질서가 그대로 유지되는 나라
라고 한다면 그 나라는 결코 절대적인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유형
의 사고방식은 프로이트가 분석하듯이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것에 불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늘 그런 식으로 운영되니까 하나님 나
라에서도 그렇게 꾸려지려니 하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서는 일등도 없고 꼴찌도 없습니다. 굳이 이런 형식으로 말한다면 모두
가 일등입니다. 모두가 왕처럼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
격을 일컫는 '영광'이라는 단어의 개념이 곧 모든 이들이 왕처럼 살아간
다는 뜻이라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
라에 가서 무슨 보상을 바라면서 하나님의 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래봐야 헛수고입니다. 많은 일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상급이 적거나 죽
을둥살둥 발버둥 쳤다고 해서 큰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포도원 주인처럼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시
는 분이십니다.
이런 복음의 가르침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킨다면 어쩌면 칼 마르크
스의 생각이 이와 비슷합니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것만큼 받는다는
그 원리 말입니다. 원래 공산주의의 모태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에 묘사되어 있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자기의 사유재산을 모
두 처분해서 교회에 가져오면 그것으로 모두가 함께 생활했습니다. 물론
그런 기간이 얼마나 지속되었는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전
통에 따라서 기독교 신앙 밑에서 공동체 운동을 하는 이들이 여럿 있습
니다. 퀘이커 교도들도 그렇고, 많은 수도회가 그렇습니다. 그 이외에도
제가 알지 못하는 크고 작은 이런 공동체가 많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능
력대로 일하고 필요한 것만큼 가져간다는 원칙 아래서 공동으로 살아갑
니다.
이런 방식의 시스템이 현실 사회에서 가능할까요? 작은 공동체 안에
서는 그런 대로 이런 식으로 꾸려갈 수 있겠지만 이질적인 개인과 집단
이 뒤섞여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불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또는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런 식의 삶이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현실 자체는 아니지
만 현실을 변혁해나가는 단초라는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이
참된 의미에서 연대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비록 한 시간밖에 노동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똑같이 한 데나리
온을 받은 것처럼 모두가 더불어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질서를 확
보해나가야만 합니다. 이런 사회를 향한 믿음과 기다림이 없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투덜거리고 불평하면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시각의 차이
이런 사회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제가 할 말이 별로 없습니
다. 다만 오늘 말씀에 근거해서 그런 바람직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
인들이 어떻게 불평 없는 삶에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사회가 구조적으로 개체 인간을 비인간화시키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인의 의식이 명확하다면 그런 구조 문제
를 꿰뚫고 어떤 세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식, 깨달음, 이런 믿
음이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주 단순한 사실에 있습니다.
앞서 읽은 대로 투덜거리던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 시간
만 일하고도 한 데나리온 받은 사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시
선은 다른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사람이 자기에게 시선을
돌린다면 불평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주인과 계약
한 대로 받을 것을 받았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가 받아야 할 하루
품삯으로 충분합니다. 그것만 있으면 그 집 식구들이 하루나 이틀을 편
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일용할 양식이 제공되었다는 사실에
마음의 눈을 놓게 되면 불평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존재한
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연봉을 받
는가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자기의 삶이 존재론적인 차
원에서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훨씬 많은 행복의 조건을 가졌다고
해도 별로 부럽지 않습니다.
어떤 점에서 이 현실에서도 우리는 모두 공평하게 받을 것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은 착한 사람에게나 못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십니다.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생각
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하루의 시간은 24시간으로 똑같이 주어졌습
니다. 똑똑한 사람이나 미련한 사람이나 모두에게 똑같은 시간밖에 없습
니다. 하루에 우리는 모두 세끼만 먹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네, 다섯 번
을 먹거나 또는 두 번으로 끝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개인들의 취
향 문제이고, 돈이 많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섯 끼니를 먹는다거나 돈이
없다고 해서 두 끼니만 먹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사실이 무
엇인지 아세요? 모든 사람은 한 가지 일밖에 할 수 없습니다. 수영을 하
면서 테니스를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 동시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볼 수 없습니다. 시공간 안에서 사람은 오직 한 가지
만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똑
같습니다. 다만 성격적인 차이, 좋은 가문에 태어나거나 가난한 집에 태
어나는 차이, 등등의 사소한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하
나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십니다. 만약 우리에게 베풀어주
신 그 은총을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불평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허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똑같은 것을 주셨다
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한다면, 그리고 나에게도 그런 은총이 있다는 사
실을 깨닫는다면 공연히 투덜거리지 않습니다.
며칠 전 문득 우리의 삶이 사과를 먹는 것과 비교된다는 사실을 생
각하게 되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사과를 깨물어 먹지 않고 껍질을
혀로 핥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왜 내 사과가 다른 사람의 사과보다 작은
가에 대해서만 신경을 씁니다. 이런 사람은 큰 사과를 얻기 위해서 또 열
심히 노력합니다만 큰 사과를 소유하게 되어도 결국 껍질 속으로 들어가
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과를 씹어먹기는 하지만 맛을 모릅니다.
다른 사람보다 많이 먹고 배부르겠다는 생각이 앞서서 맛을 음미하지 않
고 쑤셔 넣기에 바쁩니다. 다른 사람의 사과까지 빼앗아 배부르게 먹지
만 사과 맛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과를 맛있게 먹으려면 그 맛을 음미
해야 합니다. 한 입을 깨물더라도 온 입안에 퍼지는 맛을, 그래서 온몸의
감각이 살아나는 경험이 있어야 사과를 먹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설령 다른 사람이 큰 사과를 움켜쥐고 있다고 하더라도 별 상관
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남과 비교하면서 불평을 하면서 살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기쁘게 살아가기에 충분한 한 데
나리온을, 즉 삶의 조건을 하나님이 이미 주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나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나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모두
똑같이 주셨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눈만 있으면 우리는 구원의 세계
에 들어갈 것입니다. 2003.11.30      
마태복음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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