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해방된 지 79년을 기리는 8.15해방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말씀에 들어가지 전,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재일동포 여자 유도선수로 57kg급에서는 은메달을 단체전에서는 동메달을 딴 허미미란 경북체육회 소속의 선수가 있습니다. 일본국적 한국국적 두 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3년전 올림픽을을 위해 일본 국적을 포기한 선수인데 그의 고조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제가 올 3월달 군위지역 3.1운동기념예배에 강사로 초청받아 군위지역 3.1운동 기념예배의 설교를 통해 군위지역 3.1운동을 소개하면서 독립운동가 4명을 소개한 바 있었습니다. 그 네명 중에 한 사람이 허미미 선수의 고조 할아버지인 허석이라는 분이었으니 허미미선수는 허석선생의 5대손이 되는 셈입니다.
허석 선생은 1857년 4월 2일 경상도 의흥현 소수면 가곡(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삼국유사면 화수리 집실마을) 128번지의 빈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화수동에 거주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7개월 전인 1918년 8월경 61세의 나이로 1910년 한일합병으로 인해 나라 잃은 설움과 한을 품고 있던 중, 일본인 거주자들이 급격하게 증가하는데 대한 분노로 항일전단을 만들어 고로면에서 의흥면으로 통하는 도로의 암석에 항일독립운동의 격문을 붙여 지역민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격문의 내용은 “하늘에는 두 태양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 충성이란 곧 목숨을 다하고, 마땅히 힘을 다하는 것이다. 어버이를 섬기는 도(道)와 임금을 섬기는 마음이 우리에게 다르지 않는데, 어찌 다른 임금을 섬기겠는가. 너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나랏일의 주인이 되었으니, 나라 잃은 백성이 어찌 아프지 않으며, 너희들이 어찌 원수가 아니겠는가. 너희들을 멸망시키고자 하지만 우리에게 역량이 없어 어찌해볼 수 없구나.”
허석 선생은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인 5월 3일, 62세의 나이로 체포되어 보안법위반으로 1년의 징역형을 받았고 1년 후 출소한 지 이틀만에 63세 나이로운명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진 고문의 후유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광복절이 있는 8월에 독립운동가 5대손녀가 파리올림픽 유도에서 은메달과 동메달을 땄다고 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I
오늘 본문으로 택한 다니엘서와 출애굽기 그리고 요한계시록 또한 일제에 의해 읽지 못하도록 먹물을 칠하게 하였으며 수시로 일경은 확인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출애굽기는 주전 13세기 이집트의 노예생활 속에서 해방을, 주전 6세기 바벨론 포로기의 모진 억압과 폭력에도 견디어 내면서 민족의 해방을 꿈꾸었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포함한 유대 사람들이 해방의 간절한 꿈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주전 3-2세기 시리아제국의 왕위에 즉위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시리아 왕국은 물론 유다 지역까지도 장악하여 강력한 헬라화 정책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헬라화 정책의 가장 중요한 첫째 목표는 유대교를 말살하고 헬라 종교를 그 지역에 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이 안식일에는 싸우지 않을 것을 이용해 안식일에 2만 2천의 시리아 군인들이 안식일날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예루살렘을 마음껏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많은 여성과 아이들은 노예로 잡아가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전통을 독단적으로 폐지하고 유대인들의 종교와 모든 문화를 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다니엘서는 주전 6세기에 살았던 자신들의 신앙의 조상,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에게 연관된 역사적 사실들을 300여년 후인 주전 3세기-2세기 당시의 유대 사람들에게 시리아제국의 폭압적인 현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 다니엘서입니다. 마치 한국기독교가 일제 강점기 시기 2200여년전의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을 한 출에굽기를 읽으며 해방을 꿈꾼 것과 비숫합니다.
폭압적인 시리아제국의 식민통치기간에 다니엘서의 저자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의 신앙의 젊은 청년들인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하나냐(사드락)와 미사엘(메삭)과 아사랴(아벳느고)가 불의한 왕의 음식, 유대의 율법에서 금한 고기나 이방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고기와 같은 산해진미의 음식들을 먹게 하였지만 그러한 밥상을 거절한 역사적 사건을 1장에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1장 15절 말씀을 보면, 산래진미의 음식을 먹지 않았지만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은 율법에 금한 돼지고기를 비롯한 화려한 왕궁의 음식을 먹었던 소년들보다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더 건강하게 보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시리아제국 당시 율법을 지켜나가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왕명에 의해서 사형을 당하였고 자기 아이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어머니들은 법령에 따라서 사형에 처해졌으며 그 젖먹이들도 목을 매달아 죽여버렸던 상황 속에서 부정한 것을 먹어 몸을 더럽히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달게 받기로 결심하였고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유대 사람들은 시리아에 순응하는 것이 성공의 길이요 편안히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쉽게 동화해버린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전 6세기의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들이 왕궁의 음식을 거부한 이야기는 300여년 후 시리아제국의 폭압정치 속에서 신음하며 고민하는 사람들에는 하나의 희망의 복음이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왕궁의 음식을 거부한 것은 적어도 세가지의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바벨론 포로기시대에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왕궁음식에 대한 거절은 적어도 시리아의 속국 시대의 유대인들에게도 큰 교훈이 되었고 엄청난 도전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밸론 포로시기 다니엘과 세친구들의 왕궁의 음식을 거부하고 채식으로 맞섰던 역사적 사건을 보면서 시리아 제국의 압제 하에서 율법에 금한 고기와 음식을 먹도록 권장하는 시리아의 정책은 하나님을 반하는 것이기에 거절해야 함을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교훈이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둘째로 왕의 진미와 포도주가 차려진 식탁에 참여하는 것 다시 말해서 바벨론 왕의 이름으로 차려진 진미 곧 진수성찬의 밥상에 참여하여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바벨론 정책에 동조하여 그들의 신하가 되는 것을 뜻하였습니다. 따라서 시리아제국이 율법에 금한 돼지고기와 음식들을 먹도록 강요하여 결국 먹어버리면 하나님이 아니라 시리아제국의 왕에 대한 충성을 암암리에 서약하는 것이기에 유대인들은 시리아제국이 강요하는 음식을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을 선택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셋째, 고기와 포도주는 제국의 왕과 귀족에 적합한 음식이라면 채식으로 이루어진 음식은 가난한 식민지 백성들의 음식을 상징합니다. 주전 586년 바벨론 포로기 시기처럼 그리고 주전 200-160년경의 시리아의 폭압적인 식민통치시기에도 고기와 포도주로 쌓아놓은 산해진미의 음식은 식민지에서 신음하며 절규하고 있는 자신의 동족들의 눈물과 고통과 신음을 외면하는 것이었기에 제국의 음식을 단호하게 거부한 것이며 가난하여 먹을 것이 제대로 없는 동족들과 함께 연대한다는 뜻도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 민족의 정신을 말살하고 야훼 신앙을 말살하려고 획책하였던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그들과 맞서서 국채보상운동, 금주-금연운동, 외국산을 거부하고 우리물건 사용하자고 한 물산장려운동, 아편금지운동 그리고 각종 홍등가 반대운동을 통하여 정결하고도 거룩한 신앙을 지켜나가고자 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모습을 통해서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들의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먹을 것 다 빼앗겨 비록 채소보다 못한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으며 겨우 삶을 연명하면서도 있는 힘 다하여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란 찬송을 불렀습니다. 일제의 혹독한 억압 속에서도 해방을 바라본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야말로 다니엘과 그의 세명의 친구들의“하나님 의지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II
이제 다니엘서 3장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 하나냐(사드락),미사엘(메삭), 아사랴(아벳느고)란 친구들이 주역으로 나타납니다. 당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청년들에게 바벨론 종교와 바벨론 정신과 바벨론 문화를 심어주어 율법으로 무장된 유대청년들의 의식구조와 정체성을 완전하게 바꾸어놓기 위해 교육을 셀 수 없이 많이 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동족들끼리 모여 고국을 향해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하는 신앙인들이 여기저기 있었습니다.
이를 본 바벨론 지도자들은 왕에게 찾아가 한가지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유대 사람들이 하나님 신앙으로 뭉쳐져 있으니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을 만들어 놓은 후 나팔과 피리와 다양한 악기를 불 때, 그 신상에 절하지 않는 사람은 펄펄 끓는 풀무에 집어넣어 죽여버리자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하여 공표하였던 것입니다.
어느날 나팔소리 피리 소리가 울려퍼졌고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 앞에 나아와 절을 올렸으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라고 하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절을 올리지 않았기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다니엘은 어디에 있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다니엘서의 저자가 6장에 사자굴 속에 던짐을 당하는 다니엘을 강조하기 위해서 여기선 생략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바벨론 왕은 그 똑똑하고 명철하며 반듯한 청년들의 목숨이 아까와 한번 더 기회를 주어 이제라도 자신의 신상을 향해 절을 하면 살려주겠다고 합니다. 이때 그들은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명렬히 불타는 풀부불, 생사의 갈림길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낼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의 새번역 성경에는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들을 건져내어 주지 않아 죽음에 이르더라도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겠고 왕의 모습을 한 신상 앞에서도 결코 절하지 않겠다고 자신들의 신앙을 당당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주전 165년경, 시리아에 멸망하여 노예처럼 반인간적이며 반신앙적인 모욕과 학대와 차별을 받아오면서 자신의 삶의 근거인 율법을 폐기하고 신전에 절을 해야 겨우 살아갈 수 있는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고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는다고 자신의 신앙을 폐기해버린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조상 가운데 유다가 망하며 바벨론제국에 포로로 붙잡혀 가서 모진 고난과 역경을 맞이한 그들에게 다니엘의 친구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의 고백“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왕의 신들이나 왕의 모습을 한 신상 앞에서도 결코 절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신앙고백은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도 그들의 이러한 신앙의 고백이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간 청년들이 그들이 당면한 최대의 위기 속에서 아차하면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삶과 죽음의 경계선 앞에서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니 하실지라도”,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비록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이만한 신앙-이만한 하나님 의지신앙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사람의 청년들의 모습이 마치 큰 바위의 얼굴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III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니 하실지라도”, 비록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하는 단호한 신앙의 전통이 다니엘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다니엘서 6장은 다니엘서 3장보다는 연대가 10-20여년 혹은 더 이상 지난 듯 합니다. 왜냐하면 바벨론나라는 다리오란 사람이 새로운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리오 왕은 전쟁포로로 끌려온 유대청년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더 총명하고 더 지혜롭고 더 뛰어난 사람이었던 다니엘을 주의 깊게 본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다리오 왕은 당시 총리 3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다니엘을 발탁하여 총리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바벨론 총리와 정치인들과 연합하여 어떻게 하든 다니엘의 문제점이나 약점을 찾아내어 그를 축출하고자 하였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그것은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기도하거나 구하면 사자굴 속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었고 다리오 왕은 영문도 모른 채 도장을 찍고 말았습니다.
다니엘은 그것이 다리오 왕의 명령임을 알고서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늘 하던 대로 고국 예루살렘의 방향의 창문을 열고서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사자의 밥”이 되게 하는 사형에 처해진다는 것을 훤히 알면서도 말입니다.
왜 다니엘이 창문을 왜 열었다고 생각합니까? 아마 그것은 하나님 신앙을 감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6장 13절 말씀 마지막 부분을 보면 다니엘이 왕의 어인이 찍힌 금령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창문을 열어 하나님께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왕 이외의 다른 신에게 기도하거나 예배하지 말라”는 왕의 엄한 명령을 무시한 채, 집에 돌아와 자신의 고국 예루살렘 방향의 창문을 열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자신에게 시시각각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면서도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굶주린 사자굴 속으로 던짐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단호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바와 정 반대로 사자굴 속으로 던짐을 당하더라도 “죽이면 죽으리라”란 마음이었습니다. 결국 다니엘이 체포되어 굶주린 사자들이 우글거리는 사자굴 속에 던져졌을 때, “죽이면 죽으리라”그 신앙이 사자굴 속에서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을 때, 쥐를 본 고양이가 야용이라고 소리를 지르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에 쌓인 쥐들의 신경조직이 마비된다고 합니다. 사자들 또한 잡아먹을 대상들이 자신의 위엄에 눌려 겁에 질리고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침샘에서 침이 생기며 잡아먹어야 하겠다는 동물의 본능이 최고치까지 오른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사자굴 속에 던져졌던 다니엘은 “죽이면 죽으리라”고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평온해졌을 것입니다. 아무튼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마치 동물들이 조련사의 말을 잘 듣는 것처럼 사자굴 속의 사자들은 하나같이 다니엘의 친구처럼 서로 기대며 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 날 아침 다리오 왕은 자신이 아끼던 총리 다니엘이 사자밥이 되어 죽고 말았는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큰 소리로 다니엘을 불렀습니다. 이때 다니엘은 “나의 하나님이 미리 천사를 보내어 사자의 입을 봉하였으므로 나를 헤치지 못하였기에 나는 살았습니다”란 말을 듣고 다니엘을 사자굴 속에서 건져냄은 물론 총리가 되게 하였고 다니엘을 죽이고자 했던 사람들을 모두 사자의 밥이 되게 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자이면서 특히 목회개혁을 외쳤던 칼빈은“코람 데오”란 말을 즐겨 사용했는데 이는 라틴말로써“하나님 면전에서”,“하나님 앞에서”란 말이며, 또한“내가 하나님 앞에 서있다”란 말입니다. 앞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나 다니엘의 신앙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내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하나님 의지신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 없이 자기 멋대로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무사명, 무가치, 무의미 그리고 무책임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코람 데오”, “내가 하나님 앞에 서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반듯이 갈릴리지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나눔으로 하나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몸으로 살아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알고 바르게 뒤따르면 우리의 발걸음이 달라질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 잘 감당해나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나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우리 샘터교회에 공동으로 주어진 사명, 그리고 가난과 기근과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와 전쟁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평화롭지 못한 반 하나님적인 세상을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사명을 재점검하여야 할 것입니다. 대구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분단국에 살아가는 한국사람으로서 아시아 시민으로서 그리고 지구촌 시민으로서, 그리고 다른 모든 생명공동체와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로서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리 걸음의 신앙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의 사명을 재확인해 본 후 그 사명을 향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해방기념주일을 맞이한 우리들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 신앙의 과제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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