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들에서
눅 3:1~6, 대림절 둘째 주일, 2021년 12월5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초반부에 예수님을 세례 요한과 아주 밀접하게 연계했습니다. 장면은 두 군데입니다. 하나는 출생 이야기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출생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요한의 출생에 관해서 상세하게 전합니다. 이어서 아주 비슷한 구조로 예수 출생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과 요한은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출생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요한의 모친 엘리사벳은 가임 기간이 지난 여성인데도 임신했고,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남자와 동침하지 않았는데도 임신했습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모두 일반적인 임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임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누가는 엘리사벳과 마리아 두 사람이 친척이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예수와 요한의 관계를 더 긴밀한 것으로 전합니다.
다른 하나는 요한의 공적 활동과 예수의 공적 활동 이야기입니다. 요한이 먼저 출가하여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고, 예수님이 뒤를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건 분명해 보입니다. 예수님과 요한이 공적 활동에서 전한 핵심 메시지는 똑같이 하나님 나라와 회개입니다. 눅 3:3절에 따르면 요한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그 회개의 세례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3:2절 참조)라는 메시지와 맞물려 있습니다. 요한이 선포한 ‘천국’은 예수님의 핵심 선포 내용인 ‘하나님 나라’와 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등장과 활동은 예수 등장과 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는 게 모든 복음서의 일관된 관점입니다.
로마 제국 시대
오늘 설교 본문은 예수님에 앞서 공적 활동을 시작한 요한에 관한 보도입니다. 누가는 그 이야기의 서두를 독특한 문장으로 기록했습니다. 여러 사람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그 사람들은 요한과 예수님이 공적 활동을 시작한 그 시대에 최고 권력을 누린 인물들입니다. 눅 3:1, 2(a)절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볼 테니까 들어보십시오.
로마 황제 티베리오가 다스린 지 십오 년째 되던 해에 본티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있었다. 그리고 갈릴래아 지방의 영주는 헤로데였고 이두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는 헤로데의 동생 필립보였으며 아빌레네 지방의 영주는 리사니아였다. 그리고 당시의 대사제는 안나스와 가야파였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활동하던 때는 로마 제국 시대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서양 역사에서 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 의학, 예술, 건축, 정치 분야에서 위대한 성과를 보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습니다. “팍스 로마나”라는 제국 이데올로기는 무너지지 않을 듯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문명의 빛으로 가득한 로마 제국이었으나 실제로는 어둠이 지배하는 제국이었습니다. 로마의 흥망성쇠에 관한 역사책이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권력 암투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평화는 칼을 통한 것이었습니다. 피의 역사였습니다. 넓은 식민지를 지배하려면 전쟁을 밥 먹듯이 벌여야 했습니다. 식민 지역에 파송된 로마 총독들은 제국의 위험 요소를 철저하게 응징했습니다. 한 예가 바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입니다. 헤롯 대왕의 아들들이 권력을 이어받아 통치하던 지역 영주들도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매달렸습니다. 예루살렘 대제사장들은 로마 권력에 빌붙어서 자신들의 종교 권력을 수호하는 데만 정신이 팔렸었습니다. 누가가 나열한 이름들은 바로 그런 어둠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인간의 본질 자체가 원래 그래서 역사가 아무리 진보해도 어둠의 역사는 피할 수 없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21세기 초반을 삽니다. 아무개가 미국 대통령으로, 아무개가 중국 주석으로, 아무개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아무개가 내년 대통령 선거 후보로, 아무개가 북한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후대 역사가는 이 시대를 어떻게 기록할까요? 빛일까요, 어둠일까요? 보는 관점에 따라서 서로 다를 겁니다. 본질에서 보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로마 제국 시대와 오늘이 다를 게 없습니다. 남북 분단 체제가 70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습니다. 종전선언 하나 어렵습니다.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성과를 이뤘고, 한국 노래와 영화가 세계에서 주목을 받아 거의 선진국이 된 듯한 느낌이지만, 이런 시절이 한반도 역사에서는 처음인데, 우리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세대 간에 불신의 골이 깊습니다. 존경받는 정치인이 별로 없다는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치가 그 사회를 통합하고 상생의 길로 끌어가야 하는데,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물론 겉으로는 국민을 위한다고 하나, 오히려 반대의 길을 갑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열거한 황제와 총독과 영주와 대제사장들의 이름에서 어둠의 역사를 느낄 수 있듯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빈 들의 요한
로마 황제와 총독 등등의 이름과 대비하는 새로운 이름이 2b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했다고 합니다. 요한은 정치 지도자가 아니기에 정치 권력도 없습니다.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이니 뒤를 이어 제사장이 될 수도 있었으나 지금은 종교 권력이 없는 선지자입니다. 그가 지내는 빈 들에는 궁궐도 없고 총독 관저도 없고 성전도 없습니다. 대형 마트나 백화점도 없습니다. 프로야구장도 없고, BTS가 춤추고 노래하는 공연장도 없습니다. 술집도 없고 카페도 없습니다. 그런 빈 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했다고 누가는 증언합니다.
빈 들은 인간이 만든 모든 작위적 형식이 배제된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로마 황제라는 직이, 총독이라는 직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자연 안에 들어간 한 인간만 있을 뿐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 말씀이 임합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생생하게 접하지 못하는 이유를 보면 대답이 나옵니다. 사람이 만든 명분과 직분과 체면과 업적에 둘러싸여 있을 때 하나님 말씀은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하나님 말씀을 듣기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신분을 고수하고 그걸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데에 익숙해지다 보니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직면하기 어렵습니다. 피조물이라는 말은 자기 안에 생명의 근원이 없기에 밖에서 공급받아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10분만 산소를 공급받지 못해도 죽을 수밖에 없기에 자기를 절대화하지 못합니다. 죽은 생명체를 먹어 치우는 박테리아 없이, 꽃을 찾아다니며 수정시키는 벌 없이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지구에서 생존할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의존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돈을 많이 벌고 당당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입니다. 황제와 총독은 그런 착각에 떨어지게 하는 직책입니다.
빈 들에서 요한은 민중 선동이나 무력 혁명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반로마 무력 혁명을 시도한 인물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요한이 마음만 먹으면 대중들을 그런 무력 투쟁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을 겁니다. 많은 사람이 빈 들의 요한에게서 세례받으려고 몰려왔으니까요. 요즘 식으로 바꿔서, 요한은 빈 들에서 마술쇼를 펼치거나 유튜브로 익스트림 공연을 방송하지 않았습니다. 주식 투자자들이나 수험생들을 위한 컨설턴트로 활동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죄 사함과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한 마디로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설교한 것입니다.
요한의 설교 내용은 눅 3:7절 이하에 나옵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먹을 게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했습니다. 공무원인 세리들은 법이 정한 대로 세금을 거둬야 합니다. 착복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군인들 역시 일반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지 않아야 합니다. 재산과 권력을 폭력적으로, 남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여러 가지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려고 합니다. 그게 인간 속성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집단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조금 거치냐, 세련되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자기의 능력을 통해서 남을 지배하고, 그 능력을 더 키우려고 합니다. 그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요한은 거기서 돌아서라고 빈 들에서 외쳤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
누가복음 기자는 이 요한의 역할을 구약에 나오는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한 어떤 사람의 역할이라고 보았습니다. 누가는 구약성서학자인 셈입니다. 그는 4절 이하에서 사 40:3절 이하를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누가는 요한이 바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광야는 빈 들과 똑같은 헬라어 ‘에레모스’의 번역입니다. 우리말 번역자가 한번은 순수 우리말인 빈 들로, 다른 한 번은 한자인 광야로 번역했군요. 광야에서 외치는 자는, 오늘날의 설교자도 마찬가지인데,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서 선포해야 합니다.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고 외쳐야 합니다. 이사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해방하실 터이니, 그 준비가 필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이제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이 낮아집니다. 그리고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볼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 신세로 예루살렘에서 광야를 거쳐 북쪽으로 끌려갔듯이 이제 돌아올 때 다시 광야를 거쳐서 남쪽 예루살렘으로 내려올 것입니다.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광야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할 때 그들은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으로 들어왔습니다. 40년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 광야 40년 세월 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별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모세오경 중에서 창세기를 제외한 나머지 네 권이 모두 광야에서 벌어진 이야기입니다. 유대교의 모든 체계가 거기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생생하게 경험한 곳이 바로 광야였다는 뜻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유목민으로 살았습니다. 유목 생활은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이동하는 겁니다. 안정감은 없습니다. 불편한 일도 많습니다. 요즘 우리의 사는 방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유목 시기에 하나님을 가장 생생하게 경험했다는 말은 유목 생활이 인간의 본질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유목 생활을 충실하게 하려면 가능한 한 간소한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물건이 많을수록 유목 생활이 힘들어집니다. 이런 삶을 낭만적인 차원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실질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생존에 필요한 물품만 간추린다면 현재 우리 소유의 대부분은 처분해야 할 것들입니다. 화장품도 필요 없고, 책도 필요 없습니다. 죽음에 가까이 가면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기껏해야 수의 한 벌만 필요하겠지요. 생명의 원천에 집중하려면 죽기 전에 자기 물건은 다 정리하는 게 좋습니다. 자식들이 유품 정리하지 않아도 되게 말입니다. 더 많은 걸 준비하고 소유하고 소비하라고 부추기는 오늘날의 자본숭배 이념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경고한 바알입니다. 이런 데에 마음이 쏠리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러 오실 수가 없습니다.
광야의 예수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도 광야에서 공생애를 시작했습니다. 그 장면을 공관복음이 다 보도합니다. 예수님 이야기에 나오는 광야라는 단어도 요한의 ‘빈 들과’ 똑같은 헬라어 에레모스입니다. 예수님은 광야 40일 동안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자신이 앞으로 나아갈 인생의 방향을 정확하게 잡을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사탄에게 받은 세 가지 시험은 제가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이 얻은 답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다. 2)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만을 섬겨야 한다. 3) “주의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예수님의 삶 자체가 빈 들, 즉 광야였습니다. 눅 9:57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토로를 들어보십시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실제로 누울 잠자리가 없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의 생각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뜻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생각에서 얼마나 멀었는지는 예수님이 체포당하는 순간에 수제자로 일컬어지는 베드로의 언행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세 번에 걸쳐서 부정했습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빈 들과는 관계없이 삽니다. 빈 들과 대척점에 놓인 황제와 총독과 영주와 대제사장처럼 살고 싶습니다. 그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빈 들의 영성으로 살고 싶다 해서 지금 당장 노숙자로 나설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수준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거 아닙니까? 모두가 자발적 가난을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황제나 영주처럼 살면서 마음만은 빈 들로 살아가는 게 현실적인 대안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구체적인 삶의 대안을 말씀드릴 수 없고, 이렇게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황제와 총독과 영주의 자리는 하나님 말씀이 임하기 어려우니,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망하여 돌아섰다는 어떤 부자 청년처럼, 그런 자리를 너무 붙들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어떻게 보면 오늘 우리는 모두 이미 황제와 총독과 영주처럼 삽니다. 2천 년 전 황제와 총독과 영주들도 지금 우리처럼 호화롭게 살지 못했습니다. 에어컨도 없었고, 냉장고도 없었고, 자동차도 없었고, 스마트폰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손쉽게 사고팔면서 사이비 영생을, 사이비 천국을 경험하는 21세기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실질적으로 경험하기가 훨씬 어려운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닌가요?
지금까지의 설교는 여러분이 다 잊어도 좋습니다. 다음의 한 가지 말씀만 기억해도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저도 모르고 여러분 자신도 모릅니다. 혹시라도 광야(에레모스) 같은 운명에 떨어진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언젠가 모두가 그런 운명에 떨어질 텐데, 절망하지 말고 걱정하지도 마십시오. 여러분이 준비만 한다면 요한에게 임했던 하나님 말씀이 여러분에게도 임할 것이며, 광야보다 더 처절했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여러분과 함께하실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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