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변화되리라!”
눅 9:28-36, 예수 변모 주일, 2019년 3월3일
28.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본문설명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일상적으로 기도를 드리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산에 올라가는 것과 같은 특별한 방식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바로 앞 구절에서 그 특별한 경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구절도 예수님이 기도와 연관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중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여긴다는 소문을 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각을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언을 이 순간에 발설합니다. ‘주님의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공관복음마다 조금씩 표현이 다르게 나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표현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며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과 고난 받고 죽는다는 말은 상충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승리자이고 심판자이어야 합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당하고 죽어야 한다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당하던 날 저녁의 기도에서 하나님께 ‘가능하면 이런 죽음의 운명을 피할 수 있게 해 달라.’(눅 22:42)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비장한 심정으로 오늘 설교 본문에서 예수님은 기도하려고 함께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 순간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29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얼굴이 변화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갑자기 두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한 사람은 모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당시 최고 제국이었던 이집트로부터 해방시킨 영웅이고, 엘리야는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적과 표적을 많이 행한 선지자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비몽사몽간에 잠이 깬 제자들이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꿈인가, 생시인가 어리둥절했겠지요. 모세는 1천5백 년 전 사람이고, 엘리야는 8백 년 전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상한 제안을 합니다. 여기에 세 채의 초막을 세우자는 겁니다. 한 채는 예수님의 것이고, 또 한 채는 모세의 것이고, 나머지 한 채는 엘리야의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제안을 왜 했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본문에 따르면 베드로 자신도 자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제안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장면에서만이 아니라 이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구름이 몰려와서 그들을 뒤덮었습니다. 제자들은 무서워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몰려드는 구름 앞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 순간에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눅 9:35). 하늘로부터의 소리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도 나타났던 현상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2)는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이 소리가 끝나자 모든 현상이 사라지고 오직 기도하는 예수만 보였습니다. 할 말을 잃은 제자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었습니다. 천기누설은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용모의 변화
산위에서 예수님에게 나타난 특이한 현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의 얼굴 모습이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얼굴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이 사건은 예수 부활에 대한 전조이기에 구체적으로 묘사될 수 없습니다. 훗날 일어난 예수 부활에 대한 복음서 기자들의 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어서 무덤에 묻힌 예수님을 제자들이 ‘살아있는 자’로 경험했다는 사실만 언급될 뿐이지 부활한 그분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말이 없습니다. 간접적으로 무덤이 비었다거나 문이 닫힌 방에 예수가 출현했다거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동행인으로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묘사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얼굴 모습이 변화되었다는 것은 바로 부활의 본질을 가리킵니다. 부활은 새로운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더 크고 절대적인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변모 사건은 우리도 역시 그렇게 변모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암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인간의 언어로 묘사될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저는 그 사실을 믿고 희망하고,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변화된다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변하고 싶지 않다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일지 모릅니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에만 마음이 완전히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동네에 모여 놀이에 취해있는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합니다. 술에 취하거나 마약에 취하면, 그리고 돈벌이에 취하면 변화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특히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사람들일수록 변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존재 변화는 깊은 신앙에서만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찰하기만 하면 눈에 들어옵니다. 현재 우리 자신은 얼마 전만 하더라도 씨앗처럼 존재했었습니다. 난자와 정자는 모두 씨앗입니다. 그 씨앗이 일정한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우리로 변화되었습니다. 엄청난 비약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지는 비밀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겉으로 아무리 멋지게 보여도 또 하나의 씨앗과 같습니다. 이 씨앗은 어머니 자궁에서 난자와 정자의 결합으로 시작된 태아의 생명이 밖으로 나와서 전혀 다른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것의 절정이 바로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몸에는 여러 지체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눈, 귀, 코, 입, 팔과 다리, 심장, 허파 등등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더 작은 요소는 세포입니다. 세포의 차원으로 보면 눈과 귀의 차이가 없습니다. 평생에 걸쳐서 제 역할을 하는 코와 눈의 세포는 계속 바뀝니다. 우리 몸의 세포는 매일 죽고 새로운 세포가 만들어집니다. 개별 세포는 죽지만 몸 전체는 살아있습니다. 세포는 이런 방식으로 몸과 연결됩니다. 우리 각자를 세포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몸입니다. 각자는 죽지만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겁니다. 각각의 세포가 죽지 않겠다고 버틴다면 몸은 유지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현재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버틴다면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설명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세포가 죽듯이 우리가 죽는다면 모든 게 끝장나는 것이니 그게 어떻게 부활 생명이냐고 말입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생명에 대한 고착된 시각입니다. 그런 고착된 시각으로는 예수의 부활 생명을 이해할 수 없고, 더 나아가서 부활의 능력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광채
예수님에게 나타난 또 하나의 다른 특이한 현상은 예수님의 옷에서 광채가 났다는 사실입니다. 절정의 생명을 빛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한 것입니다. 모세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출 34:29절 이하에 따르면 모세가 우여곡절 끝에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 판을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광채로 인해서 모세 가까이 가지 못하고 두려워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가까이 올 수 있도록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화가들이 특별한 인물을 그릴 때 후광(Aura)을 배경으로 넣는 이유도 이런 데에 있습니다. 종교적인 경험은 대개 빛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경험할 때 빛으로 인해서 눈이 멀 정도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빛이 특별한 사람에게 경험되는 겁니다. 이런 일들은 수많은 종교 경험에 자주 나타납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었을 겁니다. 일상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은 일어납니다. 어머니와 자식 사이에서 이게 가능합니다. 어머니는 여러 명의 아이들이 모여 있을 때 자기 아이가 가장 강렬한 모습으로 경험합니다. 그게 광채입니다. 연인들도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걸음걸이와 말하는 모습이 다 빛으로 경험됩니다. 그런 경험의 극치가 바로 하나님 경험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빛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실제의 물리 현상으로서의 빛인가요, 아니면 다른 뜻인가요? 성경 전통에 따르면 물리 현상으로서의 빛은 창조의 시원입니다. 창 1:3절은 하나님의 창조가 빛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이 없으면 지구 생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빛이 있어야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식별된다는 사실입니다. 전자는 존재론이고 후자는 인식론입니다. 이런 물리적인 빛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도 불구하고 신약성경 기자들이 예수님을 빛이라고 말한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서 경험한 생명이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빛으로 인한 생명처럼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진술했습니다. 요 1:4,5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어서 9절과 10절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옵니다. 일부 사람들만 예수를 생명의 빛으로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이 바로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경험한 생명을 빛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예수님의 옷에서 광채가 났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변화되고 그의 옷에서 광채가 났다는 진술에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들어있습니다. 세상을 생명의 빛으로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비유로 설명한 세포와 몸 이야기로 본다면 세포 자체에 머물지 말고 몸을 보는 것입니다. 몸 전체가 바로 빛입니다. 볼 눈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빛으로 경험할 것입니다. 즉 존재의 능력인 생명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실질적으로 경험합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이런 빛과 생명 경험이 가능할까요, 다른 종교에서도 이런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종교나 예술가가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통에서 그것을 경험했으니 우리 전통만 말하면 됩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현존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를 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존에 대한 염려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생존에 대한 염려는 욕심이기도 고, 교만이기도 하며 자기연민이기도 합니다. 온갖 것으로 포장된 21세기의 문명과 질서는 하나님의 현존을 볼 수 없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을 하나님의 현존으로, 즉 빛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극치가 바로 예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기에(고전 15:20)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도 부활에 이른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 부활이 오늘 본문에는 광채로 표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한다는 말은 우리도 역시 빛으로 변화된다는 의미입니다. 그 순간을 초기 기독교인들은 기다렸습니다. 우리도 그걸 기다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믿음이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서 능력으로 자리를 잡으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빛으로 뚫어볼 줄 아는 게 필요합니다. 그런 경험이 깊어지면 우리 스스로 빛이라는 사실도 느낄 것입니다. 그런 느낌과 경험이 깊어질 때 우리의 부활 신앙이 실질적인 능력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런 능력으로 한편으로는 허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광적인 세상을 버텨내고 통과했습니다.
세상을 빛으로 경험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세상을 생명의 비밀과 신비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서 용어로 말하면 이것은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태초에 창조하셨고, 지금도 그 창조를 보존하시고, 종말에 완성하실 겁니다. 그 긴 역사의 과정에서 세상을 본다면 그 어느 것 하나 무의미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대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존재의 빛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최소한의 먹을거리인 빵과 포도주가 성찬식의 소품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의 몸과 피로 받아들입니다. 빵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조금만 생각하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볼 눈만 있으면 에베레스트에 가지 않아도, 유럽과 북미와 뉴질랜드 등에 가지 않아도 어디서나 하나님 창조 능력에서 오는 광휘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물이 빛으로 경험됩니다. 온 세상이 빛으로 가득합니다. 그 안에 우리가 들어 있습니다. 나아가서 자신이 빛처럼 인식되고 경험될 겁니다. 이런 인식과 통찰과 경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이런 경험보다 더 행복한 일이 있을까요? 우리는 이런 경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빛으로 변화될 것으로 믿습니다. 미래만이 아니라 이미 지금 생명의 시원적이고 은폐된 깊이를 가리키는 빛으로 살고 싶습니다. 일종의 거룩한 환상을 꿈꾸고 사는 겁니다.
세상 현실에서...
우리가 두 발로 땅을 딛고 살아가는 한 이런 거룩한 환상만으로 세상을 사는 건 아닙니다. 그게 계속될 수도 없습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변모 이전의 예수만 보이는 세상의 현실로 졸지에 돌아왔습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 현실입니다. 이 세상은 이전투구와 같이 돌아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온몸으로 치열하게 투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 현실은 여러분이 제 각각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우리교회 교우들은 역사의식을 갖고, 아니면 최소한 책임감을 갖고 성실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겁니다. 전업 목사로 사는 저보다도 여러분들이 이 세상 현실은 더 정확하게 알고 대처하면서 살아갈 겁니다. 다만 저는 여러분에게 세상 현실을 잘 살아내기 위해서라도 다음의 사실을 잊지 말라고 간곡하게 설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과 저는 언젠가 부활의 몸인 빛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지금 우리는 그 빛 안에 들어가 있고 시나브로 빛으로 변화되는 중입니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