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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빛의 자녀, 빛의 열매

빛의 자녀, 빛의 열매

에베소서 5:8-14, 사순절 넷째 주일, 2011년 4월3일

 

     빛의 자녀

     초기 그리스도교가 시작할 때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감안해야만 신약성서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그들은 종교적으로나 정치 사회적으로 소수파였습니다. 주변 세계로부터 무시당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볼 때 한편으로는 무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식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한 유대인 남자를 메시아로 믿었다는 뜻입니다. 당시 십자가 처형은 가장 부끄럽고 저주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위험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예수를 퀴리오스(주)로 믿었다는 뜻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바로 그 예수가 심판주로 재림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신앙은 유대교에도 위험하고, 로마정치에서도 위험했습니다. 무식하면서도 위험한 주장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당시에 왕따를 당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다르지만 세계 모든 나라로부터 무시당하는 북한 집단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에베소서에 따르면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빛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당시 교회 밖의 사람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지 모릅니다. 빛은 자신들의 세계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둠에 속한 이들이었습니다. 제 삼자가 볼 때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헬라 로마 문명을 보십시오. 정치, 예술, 철학, 건축에서 대단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지금의 서양철학은 그 근원이 모두 헬라 철학에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모르고는 서양철학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로마의 학문은 지금도 서양 학문의 기초입니다. 로마법과 수학, 의학, 역사학을 모르고는 현대 서양의 그 어떤 학문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빛의 자녀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영원한 진리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모든 제도는 빛을 상징합니다. 이들에 비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내세울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빛의 자녀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어불성설로 들릴 수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근거로 자신들이 감히 빛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근거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빛으로 인식하고 경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로마의 법과 헬라의 철학, 유대의 종교는 빛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빛이었습니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지금 우리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기초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요? 예수가 어떻게 참 빛인가요? 여러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좀더 직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구절도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치유, 축귀 등은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에 대한 해명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이기 때문에 따라가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생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오히려 세속의 주장들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아프지도 않고 어려운 일도 없이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일련종정, 속칭 남묘호랑개교 같은 유사종교들이 약속하는 것들입니다. 또는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제시하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반대의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고난과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실하게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십자가의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바울도 그렇습니다. 그가 어디서 최후를 마쳤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삶을 생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만족이 불가능하고, 결국 죽어야 할 운명을 참된 생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인가요? 천당을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라고 말한다면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천당을 저 우주 어느 곳에 자리한 별천지로 생각한다면 틀린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생명의 리얼리티는 어떤 구체적인 삶의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가 아니라 예수님의 운명에 나타난, 그러나 아직은 여전히 은폐되어 있는 하나님의 구원행위, 즉 생명사건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한 가지 사실에 매달렸습니다. 거기에 자신들의 미래와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일치되는 것이었으며, 생명과 일치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에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은 생명이 죄로 인해서 처해진 죽음이라는 운명을 벗어나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빛이라고 선포할 수 있었으며, 자신들도 예수 안에서 빛의 자녀라는 사실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신앙인식과 경험을 오늘 우리는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놓치면 근본을 놓치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빛은 더 이상 헬라 철학자들의 지혜로부터 오는 게 아니며, 또한 로마 황제들의 권위로부터 오는 게 아니었습니다. 빛은, 진리는, 생명은, 구원은 죄와 죽음을 극복하신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시대정신과 대결했습니다. 당시 시대정신은 오늘의 시대정신과도 똑같이 매우 합리적이고 대중적이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사람을 잘 살게 할 만하고, 지적이게 보이게 하고, 행복하게 할 만합니다. 사람들이 빛이라고 믿고 따를 만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지 않았지만 그 시대정신에 주눅이 들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예수 경험이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는 주변 상황이 아무리 열악해도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그들은 담대하게 예수가 참된 빛이며, 그 예수 안에서 자신들이 빛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진술은 낭만적인 차원도 아니고 심리적인 차원도 아니고 인격적인 차원도 아닙니다. 삶, 죽음, 생명, 세계, 우주에 대한 전인적인 새로운 인식입니다. 혁명적인 인식전환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를 그렇게 경험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삶의 치장물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까요? 좀더 노골적으로 질문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와의 관계가 끊어지면 어둠으로 떨어진다는 두려움을 실제로 느끼고 있나요? 대답하기 곤란할 겁니다. 형식적으로는 예수와의 관계가 생명의 빛으로 들어가는데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는 에베소서 기자의 고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빛의 열매

     자신들의 정체성을 빛의 자녀라고 본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가지 곤란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 안에서 부도덕한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참으로 곤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빛의 자녀라고 한다면 세상의 자녀와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하는데,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상황이 매우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11절 이하에서 그 사실을 지적합니다.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둠의 일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고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부도덕한 행위는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서도 심각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육체의 일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 이렇게 15개 항목입니다.(갈 5:19-21) 이런 부도덕성들은 복음의 위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음의 본질을 외면하고 이런 추문에만 관심을 보입니다. 본질은 숨겨지고 형태만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빛의 자녀들이 모인 교회에 이런 부도덕한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두 가지 이유가 아닙니다. 우선 교회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모두 빛의 자녀는 아닙니다. 모두 복음의 세계로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또 다른 이유는 인간의 실존적인 한계입니다. 사람은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미 바울도 스스로 인정한 바입니다. 교회론적인 차원에서 보면 지금 현실의 교회는 아직 승리한 교회가 아니라 싸움 중의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에는 비본질적인 요소가 없을 수 없습니다. 상처가 없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처들로 인해서 결국 빛의 자녀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기자는 빛의 자녀가 된 것으로 끝나지 말고 빛의 열매를 맺으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바울은 그것을 사랑, 희락, 화평 등, 9가지 성령의 열매를 언급합니다.(갈 5:22, 23)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가르침을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말입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가르침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기자가 말하는 빛의 열매에서 방점은 ‘빛’에 있습니다. 열매는 빛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앞에서 빛은 생명에 대한 메타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하나의 다른 메타포가 있습니다. 보는 것입니다. 빛은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가 빛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우리 인식의 근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무엇이 빛의 열매인지를 보게 되었다는, 즉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어둠의 일들은 어둠 속에 있는 한 드러나지 않습니다. 알지 못하면 악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어둠에 빛이 비춰야만 어둠의 일들이 드러나듯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열매와 열매 아닌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걸 인식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아직 빛이 비춰지지 않은 이들을 가리켜 잠자는 자, 죽은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설명이 옳기는 하지만 관념적으로 들린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춰진다는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다가오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모든 걸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모든 것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주는 게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의 인식은 빛을 받아도 여전히 제한적이긴 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무엇이 빛의 열매인지 아닌지는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인 현실을 여러분에게 억지로 납득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경험해보지 않고 말만으로는 따라가기 힘들 겁니다. 빛은 마치 도(道)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실증적으로 보여줄 수는 없으나 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명백한 삶의 길인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쳐졌습니까? 그를 통해서 생명의 세계가 더 밝아졌습니까? 빛의 열매와 어둠의 일이 분간이 가나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빛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은 이들입니다. 생명의 빛으로 더 깊이 들어가십시오. 빛의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 5: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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