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계명과 기쁨
계명과 사랑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요지는 아주 명확합니다. 마지막 17절에 진술된 그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사실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막 12:28-31, 마 22:34-40, 눅 10:25-28) 이 사실이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신 6:4,5절의 ‘쉐마’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온 영혼을 기울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막 12:31b)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이 똑같이 사랑을 하나님의 계명, 또는 예수님의 계명으로 진술하고 있지만, 사실 사랑을 계명이라고 규정한다는 것은 그렇게 정확하다고 볼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누구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처럼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형식적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는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식간에 위선에 빠지기 때문에 그것이 곧 사랑 자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왜 사랑이 곧 예수님의 계명이라고 설명하는 걸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의 맥락을 통한 설명입니다. 이 말씀은 15장1절 이하의 ‘포도나무’에 대한 설명을 배경으로 두고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만약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5b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런 말씀에서 우리는 요한복음 공동체가 처한 상황이 상당히 위태롭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유대교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내적 단결이 그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서로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계명이라고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유대교의 율법과의 관계를 통한 설명입니다. 유대교의 율법은 하나님의 계명(誡命), 즉 훈계와 명령입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는 율법을 극복하고 있지만 이런 유대교에 익숙한 사람들의 방식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이 곧 하나님의 계명이며, 예수님의 계명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을 계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게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율법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주도권
사랑의 계명이 율법이 아니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율법은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할 어떤 절대적인 규범을 가리킵니다. 가장 대표적인 율법인 십계명을 보십시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자기 기분에 따라서 선택될 수 있는 게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할 규범입니다.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헌법을 무조건 지켜야 합니다. 세금을 내는 건 선택사양이 아니라 의무조항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을 그런 율법의 차원과는 다르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9절 말씀을 유심히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렇습니다. 사랑은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거나 아니면 사랑하고 싶다는 의욕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에 속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하셨다는 말은 사랑의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배타적인 능력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나오지만, 그것이 곧 사랑의 능력이 사람에게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사랑이 핵심적이라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사랑의 계명을 언급했을 뿐이지 사랑이 흡사 수학 실력이나 피아노 연주능력, 또는 요즘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지도력 같이 우리의 노력으로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이나 도구는 아닙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결식노인들과 거리의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식사도 많이 벌이고 있습니다. 남한의 교회는 북한 식량원조에서 상당히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 사회에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이런 부분에서 개신교회는 다른 종파에 비해서 월등하게 뛰어난 업적을 쌓았습니다. 저는 이런 구제나 복지사업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실천하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부연설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이러한 노력들을 곧 사랑과 일치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은 “그리스도인이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고 주장하면서 사랑을 실천하자고 역설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 곧 율법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모범적으로 살면서도 역시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는 자만심에 사로잡혀 있듯이, 또한 한국교회가 북한 식량을 도와주면서도 가난한 북한 앞에서 자만심을 보이고 있듯이 근본적인 사랑의 능력을 보일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우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일체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곧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깨닫고 그 안에서 살았던 예수님은 하나님과 똑같은 사랑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즉 성육신의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게 나타나신 분이 곧 예수님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론적 능력이 예수님과 일치되었으며, 예수님은 바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전체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9b)는 말씀은 예수님과 일체가 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 스스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사랑하는 척 시늉만 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론 진실하게 사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완전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좀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예를 하나 들어야겠습니다. 마더 테레사처럼 사랑을 실천한 분을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 실천이 완벽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의 일방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의 사랑에만 치중했기 때문에 사회구조의 정의로운 변혁에는 역설적으로 그녀의 행위가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분의 숭고한 사랑의 실천을 폄훼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사랑실천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결국 사랑의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그를 온전하게 믿는 것이 곧 우리가 사랑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랑의 삶을 원하는 사람은 사랑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야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의 실천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일에만 마음을 두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걸까요? 믿음만 있으면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할 사랑의 실천은 저절로 해결된다는 걸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랑의 근원적인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속했지만 그것의 실천은 바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비롯한 복음서는 사랑을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 계명 중의 하나가 바로 유대교로부터의 따돌림이라는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인들 끼리 일단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론적 능력인 사랑이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랑의 계명이 강조되었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교회 공동체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단지 마음으로만 머물지 않고 실제적인 삶의 실천으로 당연히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이 곧 계명이고, 16b절에 의하면 삶의 ‘열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랑의 주도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를 인식하고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과 일체가 되신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사랑의 실천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야고보 선생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 2:14-17)
그러나 구체적인 실천이 무엇인지, 그 방법론이 무엇인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을 제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위에서 야고보 선생이 굶주리는 사람에게 먹을거리를 주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우리의 사랑이 실천되어야 내용들이 그렇게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서는 모든 문제를 시시콜콜하게 가르치고 있지도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런 구체적인 사안은 우리 스스로가 결정해야 합니다. 예컨대 동성애자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어떠해야 할까요? 더 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부부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무조건 참고 살아야 한다고 설득하는 게 사랑인지, 아니면 훌훌 털어버리고 새출발하라고 말하는 게 사랑인가요? 파괴되는 생태계 앞에서 어떤 태도가 사랑의 마음인가요?
이런 점에서 사랑은 치열한 세계인식과 연관됩니다. 단순히 착하게 살겠다거나 남을 위한다는 마음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결국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사랑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론적 능력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비록 완벽한 사랑을 실천할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랑의 능력이 우리에게 엄습하면 우리는 그것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위한 우리의 인식과 판단과 결단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해달라는 기도를 간단없이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과 기쁨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핵심 주제는 거의 언급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훨씬 본질적인 사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대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존재론적 능력인 사랑을 경험하고 그것을 실제 삶에서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기쁨의 토대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이 곧 기쁨의 근원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을 발견한 사람만이 기쁨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말씀이겠지요.
저는 앞에서 사랑의 주도권을 말씀드리면서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사람만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그 사실에서 우리가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이 기쁨을 발견한 사람만이 자연스럽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이런 점에서 사랑과 기쁨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에 기쁨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에게 죽음 너머의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이 우리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쁨으로 이끕니다. 복권 당첨은 잠시 우리를 흥분시킬 뿐이지 기쁨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일단 사랑실천의 의무감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삶의 기쁨을 발견하는 게 우선적입니다. “프로이데!”를 반복해서 외치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주제처럼 그런 기쁨이 여러분을 사랑의 힘으로 끌어들일 것입니다. 그게 곧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활동하시는 고유한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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