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말
- 불굴의 아모스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아모스는 기원전 8세기에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정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5:24) 너무나 가슴 벅차고 멋있는 구절입니다. 한때 가장 좋아했던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그를 생각하면, 불굴의 의지와 신념,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던지는 용사, 전사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마치 신약시대의 세례 요한과 같습니다. 불의한 세상을 향해 사자후를 던지는 그의 모습이 너무 멋지게 생각되었습니다.
불의로 가득한 세계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이보다 더 강력하고 확실한 선포가 또 있을까요. 이것이 아모스를 대표하는 메시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메시지의 중심은 “정의”입니다. 환상 속에서 두렵고도 소름 끼치는 이스라엘의 파멸과 불행을 봅니다.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망과 탐욕으로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세계를 향해 분연히 일어섭니다. 세상을 향해 정의로우라 의로우라 외칩니다. 혼자만의 안락함을 넘어 더불어 함께 사는 세계를 꿈꾸라고, 그렇게 살라고, 그것이 세상의 파멸을 막는 길이라고 파멸의 길을 가는 세계 앞에 홀로 맞섭니다. 세계의 문제를 한 개인이 막고 선 것이지요. 마치 시시포스처럼 불가능한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짊어진 진정한 용사, 진정한 예언자이지요.
- 호세아
오늘은 그에 이어 기원전 8세기에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활동했던 또 한 사람의 예언자인 호세아를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상황을 보았지만, 각자가 가진 견해와 상황에 따라 다른 메시지를 내놓았던 것이지요. 아모스가 ‘정의’를 떠올리도록 한다면, 호세아는 ‘사랑’을 떠올리게 됩니다. 슬프고도 아픈 사랑을 한 사람이지요. 그가 보았던 세계,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메데이아(BC 431)
- 에우리피데스
고대 그리스의 삼대 비극작가는 아이스킬로스(비극의 창시자), 소포클레스(비극의 완성자), 에우리피데스입니다. 에우리피데스는 다른 두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웅보다는 미천한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인간의 감정 묘사, 여성의 심리묘사에 탁월했습니다. 그는 ‘신의 존재’에 깊은 의심과 불신을 드러냈고, 인간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폭력성’, 내면의 심리적 갈등에 의해 몸부림치는 ‘인간의 고통’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특히, 비극적 희생의 주인공인 ‘여성의 운명과 고통’에 깊이 공감했고 여성, 이방인, 노예 등 타자를 폄하는 차별 이데올로기를 비판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5백 년 전의 작가가 여성의 삶을 깊이 바라보고 그런 관점으로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굉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작품 중 『메데이아』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이아손
『메데이아』에는 영웅이 한 사람 등장하는데, 이올코스의 왕 아이손의 아들 이아손입니다. 아이손 왕이 몸이 쇠약해져 어린 이아손을 대신해 숙부 펠리아스에게 통치를 맡깁니다. 그리고 이아손은 켄타우로스 케이론에게 맡겨져 자라나게 되지요. 장성한 이아손이 숙부에게 왕위를 돌려줄 것을 요구하자, 잠을 자지 않으며, 불을 뿜는 괴물인 용이 지키고 있는 “콜키스의 황금 양피를 가져오면 돌려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아르고스 원정대’가 탄생하게 되지요. 유명한 영웅들을 모아 함께 보물을 가져오기 위한 원정대를 꾸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물의 주인인 콜키스의 왕 아이에테스는 ‘황금 양피를 잃으면 왕위에서 쫓겨난다.’는 신탁을 받은 터입니다. 그러니 순순히 보물을 내어줄 리가 없지요. 그런데 이아손에게 반한 공주 메데이아가 자신과 결혼해주면, ‘불에 타지 않는 약’과 ‘마법의 돌’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결국, 메데이아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이아손이 황금 양피를 얻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함께 도망을 치지요. 도망치는 과정에서 추격해오는 동생인 왕자 압시르토스를 속여 토막을 내어 바다에 던져 버립니다. 사랑을 위해 나라도, 부모도, 동생도 모두를 버린 것이지요.
그렇게 온갖 어려움을 딛고 보물을 가지고 돌아왔으나 숙부 펠리아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형인 아이손을 죽여 왕위를 완전히 차지해 버리고 맙니다.
- 메데이아
메데이아는 펠리아스 왕의 두 딸에게 접근해, 늙은 숫양 한 마리를 토막을 낸 후 마법의 약초와 함께 삶아서 어린 양으로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며, 같은 방법으로 아버지의 젊음을 되찾게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말을 듣고 두 딸은 아버지에게 젊음을 찾아드리겠다는 생각으로 아버지를 토막을 내어 삶아 죽이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되지요. 메데이아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이아손의 복수를 대신해 준 것입니다.
이 일로 이아손과 메데이아는 추방되어 고린토스로 도망 와 두 아들을 낳고 살게 되는데, 고린토스 왕 크레온은 이아손이 마음에 들어 자신의 딸인 크레우사와 결혼시키려 합니다. 그리고 믿었던 이아손마저 고린토스의 왕이 되려는 야심으로 가득 차, 구차한 변명을 하며 그 결혼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이에 격분한 메데이아는 독이든 화려한 의상과 금관을 크레우사 공주에게 선물하여 화염에 싸여 죽게 만들고 딸을 구하려던 크레온 왕마저 목숨을 잃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이아손이 더욱 고통을 받도록, 자신의 두 아들마저 칼로 살해하고 자신의 할아버지인 태양신 헬리오스가 보낸 용이 끄는 마차를 타고 아테네의 늙은 왕 아이게우스에게로 떠나지요.
“숨을 쉬고 느끼는 모든 창조물 가운데 우리 여성들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족속이다.”
“여성은 남편을 사기 위해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그를 우리의 몸의 주인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아손에게 배신당하고 그녀가 했던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시 고대 그리스는 세계 어디보다 상대적으로 여성의 인권이 높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 이후 남성의 노예로 전락하는 여성의 보편적인 운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테네에서 여성은 사회 경제 정치 영역에서 철저히 배제된 주변적인 타자였던 것이지요.
『메데이아』는 여러 가지 면에서 놀라운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우리 책읽기 모임에서 함께 읽고 심도 있는 논의를 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에서 고대 여인의 ‘비극적 사랑’의 모습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인간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 주제입니다. 사랑 때문에 온 삶이 파괴되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비천했던 삶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살기도하고 죽기도 합니다.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하며, 세상 무엇보다 행복하게도 합니다. 대체 사랑은 무엇일까요?
▣ 예언자 호세아
- 이상한 명령
아모스를 이해하기 위해 제가 잡고 있던 중심주제가 ‘그는 왜 북 왕국으로 가야했을까?’였다면, 호세아를 이해하는 데에 저를 계속해서 괴롭힌 것은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대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런 명령이 가능할까요? 왜 이런 명령을 했을까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명령, 상황이었기에 수많은 학자들도 이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것은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저 상징적인 은유일 뿐이라 생각해왔습니다. 호세아와 고멜의 사랑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허구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허구라고 하는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마땅치도 충분치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사랑과 결혼이 사실이라면, 음란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먼저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고멜이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하고 결혼을 하고 나서 후에 그녀가 음란한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일까요?
- 음란한 여인
‘음란한 여자’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 볼프의 해석이 폭넓은 지지를 받아오고 있습니다. 그는 고멜의 행동이 고대 근동의 태를 여는 의식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결혼 가능한 연령의 소녀는 거룩한 곳(초야의 신부방)에서 남신을 대표하는 제사장 또는 제의 보조원과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성적인 의식이 이스라엘에서도 널리 행해졌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읍에서 신적인 힘이 머물러 있다고 믿는 언덕이나 나무, 돌기둥, 나무기둥 앞에 각자의 성소와 제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역 성소들은 본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었습니다. 여기서 행해지는 희생제사는 취할 정도까지 포도주를 마시고, 제의 창기들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딸들과 며느리들을 이곳으로 데려왔고 밤늦게까지 계속되던 축제가 절정에 도달하면 음란한 성관계가 행해졌습니다.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서도 하니…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4:13)
너무나 충격적이지요? 하지만 오늘날의 시각과 관점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의식이 자기들의 딸들과 여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의식에 참여함으로써 여인들의 태가 열린다고 믿었습니다. 그 의식은 아울러 풍요로운 신년을 기원하는 의도도 있었지요. 축제 때에 행해지던 성적인 결합의 행위는 아마도 인간과 동물 및 식물 등의 생식력과 번식력을 증진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상징적인 행위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 왔던 ‘음란한 여인 고멜’이라는 이미지는 다르게 판단되어야 합니다. 그녀는 대부분의 순결한 여인과 다른 유별나게 나쁘고 추악한 음녀가 아니라, 당시의 일반적인 보통의 여인인 것이지요.
- 바알 / 여호와
그런데 놀랍게도 호세아는 이러한 것들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그것이 야웨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할지라도, 아니 정확하게는 야웨의 이름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호세아는 그것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그는 그것을 거룩한 행위가 아니라 수치스러운 음행으로 봅니다. (놀랍고도 혁명적인 통찰입니다. 당시의 여인은 지금처럼 온전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성적인 대상이나 생식, 번식을 위한 도구, 더 심하게 표현해보자면 가축과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소가 새끼를 많이 낳기를 바라서 좋은 소와 교배를 시키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시대에 호세아는 고멜을 사람으로 여인으로 무엇보다 사랑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의 대상으로 본 것입니다.)
종교적 관점으로 볼 때, 당시 북이스라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혼합주의”입니다. 혼합주의란 종교가 서로 섞여버렸다는 말입니다. 북 왕국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이 주전 920년경 벧엘에 국가 성소를 세웁니다. 이스라엘이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진 것이지요. 북이스라엘의 왕의 입장에서는 정치과 종교가 일치되어 있는 사회에서-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나라가 분리되었지만 그들이 섬기는 신이 바뀐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 절기 때마다 북쪽 사람들은 남쪽의 예루살렘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언제든 남 유다에 먹힐 수 있는 상황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을 대신할 수 있는 북쪽의 성전을 건설합니다.
믿음의 조상들의 중요한 삶의 자취를 따라 벧엘을 비롯한 곳곳에 산당을 건설합니다. 그 과정에서 황소의 형상이 세워집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도 그런 장면이 목격되지요.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32:4)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생 제사를 드리면서 바알로 칭송하던 야웨는 벧엘이나 사마리아와 같은 제의 장소들에서 무쇠로 만들어진 황소 형상으로 표현되었고 백성들은 그 황소 형상에 기꺼이 입을 맞춥니다. 처음부터 황소 형상의 바알을 섬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황소 형상으로 표현했고 따라서 황소를 섬기는 것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고대 근동 문화권에서 황소는 풍요의 전형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따라서 농부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지요. 황소의 형상으로 표현된 바알은 곡물과 비와 기름과 양털과 물 등을 주는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농부들은 땅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신들의 신비로운 힘들의 영향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고, 팔레스타인에서 풍요는 비에 의존하고 있었던 까닭에 비와 바람과 폭풍의 신인 바알을 숭배했던 것입니다. 이런 바알 숭배와 여호와 숭배가 결합하면서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혼합주의에 빠지게 된 것이지요.
호세아는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꿰뚫어 보았고, 그것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덧붙일 것은 여기서 ‘바알’이라는 이름은 고유명사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바알’이라는 이름은 기능적인 성격의 용어로서, 아내나 노예, 비옥한 땅, 가축 등을 다스리는 권한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알은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한 권한, 힘이라는 말입니다.
▣ 사랑, 그 위대한 이름
이제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호세아를 다시 이해해 보겠습니다. 호세아의 출신지나 사회적 위치 등 그의 개인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호세아서에 드러난 모습은 그가 대단히 뛰어난 통찰을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 등을 살펴보아도 국제적 안목과 감각이 탁월한 사람임이 드러납니다.
- 운명 같은 사랑, 고멜
그런 호세아는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을 만나 사랑하게 됩니다.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합니다. 이전과는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의 삶은 고멜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랑이 삶을 이렇게 풍요롭게 아름답게 근원적으로 다르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에게는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그리도 아플 줄 어찌 알 수 있었을까요. 지독한 고통으로 몰아 넣습니다. 당시의 세상이 여인을 그저 생식과 번식을 위한 수단, 많은 아이를 낳아 번성하고 재산을 불려줄 수단으로 여기던 때에, 그는 고멜을 온전한 사람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람으로, 심지어 죽어도 좋을 사람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랑하다 보니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세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인들을 데려다가 산당에서 술을 먹이고 신에게 희생 제사를 드린다는 빌미로, 태를 열어 풍요를 가져다준다는 어처구니없는 명분을 가지고 성행위를 강요하고 짓밟은 끔찍한 만행들이 보입니다. 자신의 연인 고멜도 다른 여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달이 차지 않았는데 아이를 낳습니다. 첫째 아들 “이스르엘”입니다. 분명 자기의 아들이 아닙니다. 희생 제사의 성적인 일을 통해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를 아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마음이 찢어집니다. “하나님이 흩으신다.”라는 뜻의 이름을 짓습니다. 마음이 갈가리 찢기고 흩어집니다. 두 번째 딸 아이 “로루하마”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다”, 셋째 아들 “로암미” “내 백성이 아니다.” 세 아이 모두 자기 아이들이 아닙니다.
이렇게 지독하고 추하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끔찍한 고통과 불행이 또 있을까요. 미칠 것만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멜이라는 여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고멜을 향한 불타는 사랑을 없애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불행한 사내가 또 있을까요.
- 사랑의 신을 만나다
그 지독한 사랑의 과정을 통해 그는 여호와를 다시 인식하게 됩니다. “음란한 여자를 만나 사랑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그의 눈이 열리고 세상을 보는 지평이 열립니다. 이스라엘 백성(고멜)을 지독히도 사랑하시는 여호와(신랑)가 보입니다.
그 이전까지 누구도 여호와를 그런 식으로 이해한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의 삶과는 관계가 없는, 저 멀리서 우주의 심판자로서 우리의 잘잘못을 가리는 하나님, 우리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존재. 그런데, 이제야 호세아는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다. 엄숙하고 냉정한 하나님이 아니라, 호 불면 꺼질까, 쥐면 깨질까, 전전긍긍 자나 깨나 애타는 마음과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안절부절 가슴 졸이는 사랑하는 남자.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더 줄 것 없어 마음 아픈 바보 같은 남자. 하나님 여호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가 다르게 보입니다. 이집트의 노예상태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까지,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11:3) “내가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11:4) 몸도 가누지 못하는 어린 것을, 분별이 없는 너희를 걸음마를 가르치고 안고 먹이며… 그렇게 애지중지 길러서 마침내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어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렀는데, 이제 둘이 알콩달콩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았는데… 그 복된 땅에 들어가자마자 너는 다른 남자 바알을 사랑하며, 나를 배신하고, 그와 행음하며 나를 버렸다. 그 땅에서 누리는 모든 것이 신부를 위해 준비한 나의 선물이었는데, 너는 그것이 바알이 준 것이라며 그들을 좇았다.
- 사랑 / 앎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4: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호세아가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하나님을 배신하고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은 지식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 안다면, 결코 그 사랑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11:8)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14:9)
너는 아느냐?
애타는 내 마음을, 내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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