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 2018년 6월3일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10.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사무엘의 신탁 이야기
고대 이스라엘의 부족시대와 왕정시대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한 대표적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사사, 제사장. 선지자라는 일인삼역을 감당한 인물입니다. 아주 특이한 역할입니다. 이런 사람을 구약성경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의 이름은 사무엘입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신탁을 받는 이야기의 본문은 삼상 3:1-10절에 나옵니다. 이야기의 시작인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이 한 구절에 당시의 여러 상황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아이 사무엘’의 출생에 얽힌 비화는 삼상 1,2장에 나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오랜 세월 불임으로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그는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집’에 가서 서원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들을 낳게 해주면 아들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서원이었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낳게 되자 이름을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는 뜻인 사무엘로 정했습니다. 사무엘을 집에서 일단 키우다가 젖을 뗄 나이가 되자 실로로 데리고 가서 제사장 엘리에게 사무엘을 맡깁니다. 이때부터 어린나이의 사무엘은 마치 절간의 동자승처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여호와의 집’에서 제사장 엘리와 함께 살았습니다. 거기서 제사를 드리는 일을 돕기도 하고 조상들과 하나님에 관해서 엘리에게 배우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의 진행을 따라가다 보면 사무엘이 엘리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할 수 있습니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사무엘의 스승인 엘리는 이제 늙었습니다. 2절에 따르면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졌다고 합니다. 당시 제사 업무의 대부분을 사무엘이 감당했을 겁니다. 공식적으로는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스하스가 제사장직을 이어받았지만 이들은 신앙과 인격과 도덕성에서 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이 없었습니다. 엘리가 자식교육을 잘못 시킨 것이라고 성경기자는 지적합니다. 어느 날 모든 업무가 끝나고 엘리와 사무엘은 각각 자신들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한 사람은 몸이 늙었을 뿐만 아니라 속 썩이는 자식들로 근심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다른 한 사람은 믿음이 좋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고, 엘리를 통해서 제사장 훈련을 잘 받은 젊은 사무엘입니다. 당시 사무엘의 영혼이 얼마나 풍요로웠을지는 여러분의 상상력에 맡기겠습니다. 성경기자는 그런 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생략합니다.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1절)라는 짧은 표현에 모든 것이 포함되었습니다. 잠자리에 대한 묘사가 다릅니다. 엘리는 단순히 ‘자기 처소’에 누웠으나 사무엘은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다고 합니다. 3절이 많은 걸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사무엘의 잠자리에 대한 설명에서는 두 가지 성물이 상징적으로 나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등불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궤입니다. 당시는 예루살렘 성전이 건립되기 한참 전이라서 ‘여호와의 전’은 천막이나 간단한 건축 재료로 지은 소박한 건물입니다. 한곳에 동물을 잡을 수 있는 시설이 놓여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양피지 창고라든가, 번제에 필요한 불씨 보관소도 있었을 겁니다. 조명을 위한 등불도 중요한 성물이었습니다.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말은 날이 아직 밝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특히 만나와 십계명과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 있다고 알려진 법궤는 핵심 중에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이런 분위기에서 잠을 자던 사무엘은 한 밤중 꿈결에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당연히 제사장이자 자신의 영적인 멘토인 엘리가 부르는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평소에도 엘리가 종종 밤중에 사무엘을 불러서 성소 업무를 확인시킨다거나 아니면 물을 좀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했겠지요. 사무엘은 누운 상태에서 일단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대답한 뒤에 엘리에게 급히 달려가서 ‘선생님이 나를 부르셔서 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네가 뭔가 잘못 들은 거 같으니 가서 자거라.’고 일렀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해서 세 번이나 일어났습니다. 엘리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오늘 밤에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자신은 너무 늙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느낄 수가 없었고, 두 아들들은 영성이 턱없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가 없을 때였습니다. 1절에서는 이런 사실을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고 표현했습니다. 엘리와 두 아들들이 양피지에 기록된 성경을 읽기는 했겠지만 그것이 실제 삶의 능력으로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일종의 ‘하나님의 침묵’ 현상입니다. 이런 현상이 계속된다는 것은 엘리와 두 아들에게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에게 영적인 위기입니다. 사무엘에게 일말의 기대를 할 수는 있었겠지만 하나님을 경험하기에는 사무엘이 너무 어려서 엘리는 속으로만 걱정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밤에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이릅니다. 다시 누웠다가 너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여호와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하라 일렀습니다. 자리에 누운 사무엘이 잠들었는지 비몽사몽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무엘아, 사무엘아.’하는 소리를 다시 들었습니다. 그 장면을 오늘 설교 본문 마지막 구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그러자 야훼께서 거기에 나타나 서시어 아까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이 “야훼여,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여러분들은 동화처럼 들리는 이런 성경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뭐냐 하는 질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가 일상에서 친구를 부르듯이 사무엘을 불렀다는 이야기는 사실적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성대의 떨림을 통해서 말씀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말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직접 부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종종 나옵니다.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 등등의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아브라함은 흑암과 두려움에 휩싸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모세는 역시 호렙산에서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가시떨기 나무 현상 앞에서 두려워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이사야는 한밤중 성전에서 스랍이라 불리는 천사들의 합창소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런 하나님 경험 이야기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불이나 불꽃, 어두운 성전 등등, 어떤 거룩한 힘을 느낄만한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런 현상과 더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특이한 현상과 소명이 하나님 경험에서 핵심입니다. 이를 전하기 위해서 성경기자들은 고대인들에게 익숙한 문학적인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사무엘 이야기를 다시 보십시오. 그를 둘러싼 환경은 여호와의 집인 성소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당과 비슷하긴 하지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느낌은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정한 공간을 거룩하게 여겼습니다. 실로의 성소는 오랫동안 거룩한 장소로 인정받은 곳입니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성소에서 생활했습니다. 그의 일상은 제사장 엘리와 함께 하는 제사업무였습니다. 그가 자라면서 엘리에게서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영웅들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누구나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만 사무엘은 특별한 아이였습니다. 엘리가 하나를 말하면 둘이나 셋, 또는 열까지 깨닫는 아이였습니다. 엘리의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무엘은 성소의 등불을 켜고 끄는 일도 맡았고, 궤를 손질하거나 청소하는 일도 다 맡았고, 제단에 빵을 올리는 일들도 맡았을 겁니다. 매일 밤 그는 성소의 한 귀퉁이 방에서 잠들었습니다. 그는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모세 이야기를 되새기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잠을 청했고, 성소 업무를 생각하면서 아침에 눈을 떴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자는 곳에는 거룩한 등불과 궤가 있었으니 그의 영혼이 거룩한 힘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같은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 밤에 그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네 번에 걸쳐서 자기를 부르는 어떤 소리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제사장 엘리의 호출이라고 여겼으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의 가장 궁극적인 내면을 찾아온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자신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한 확신을, 즉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소명을 깨달았습니다. 이를 가리켜서 성경기자는 하나님이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신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일련의 서사를 끝낸 뒤에 삼상 3:21절에서 성경기자가 하고 싶었던 핵심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나시니라.
이런 표현을 오늘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 한 사람의 설교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신학을 전공하고 일정한 교회 임상 경험을 쌓은 뒤에 교회에서 설교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설교를 한다고 해서 그게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목사 스스로 압니다. 대충 들은 풍월로 설교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설교 행위에서 하나님이 침묵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큼 설교자에게 두려운 일은 없습니다. 그걸 감추기 위해서 자신의 설교에 치장을 합니다. 성형미인이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세월을 보내다가 어느 순간에 그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을 주시는 경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시인이 시가 쓰이지 않아 절필을 했다가 다시 언어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경험을 통해서 시를 쓰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순간이 지속되어야 설교자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에게 처음으로 그런 순간이 왔습니다. 그걸 가리켜서 성경기자는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냈다.’고 묘사한 것입니다.
오늘의 하나님 경험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른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어디서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이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그냥 세상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 자리에 없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굳이 예수 믿는 사람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기독교의 하나님 경험을 뭔가 부족한 사람들이 찾는 것으로 여깁니다. 속된 표현으로는 좀 구질구질한 삶의 태도라는 겁니다. 삶에 대한 자신감이 오죽 없으면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찾느냐고 말입니다. 저는 그들과 이런 문제로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습니다. 논쟁으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닙니다. 그들의 입장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하나님 경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이 오해하는 데에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책임도 크긴 합니다. 우리 스스로 오해할 때도 많으니까요.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은 한 밤중 성소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 경험은 그런 장소에만 한정되는 게 아닙니다. 모든 순간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물은 하나님 경험의 통로입니다. 하나님 경험에서 배제되는 것이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빵과 포도주, 꽃과 나무, 새와 나비, 구름과 안개, 책상과 의자, 아이들과 노인들과 젊은이들, 병원과 결혼식장과 장례식장 등등,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 놓여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연결됩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서재의 책상 위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뒹굴고 있습니다. 컴퓨터, 스피커, 책받침 대, 연필통, 그 안에 든 필기도구, 안경과 안경집, 성경과 찬송가와 수첩 등등입니다. 그런 사물과의 소통을 통해서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연필 한 자루를 통해서 생명을 경험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 경험에 속하는 겁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의 가장 궁극적인 능력이 하나님이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할 겁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당신들의 경험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무엘이 일상에서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우리의 일상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할 수 있으며, 그런 경험이 가능하도록 우리의 영혼이 일상을 향해서 예민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대목까지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같은 길을 갈 수 있지만, 기독교인들은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생명의 빛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모든 하나님 경험, 즉 생명 충만 경험의 실질적인 토대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지를 오늘 교회력에 따라서 주어진 제3독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막 2:23-3:6절에는 안식일에 얽힌 두 편의 일화가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다가 밀 이삭을 잘라서 먹자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비판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 마른 장애인을 고치자 역시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걸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당시 안식일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삶을 위축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매달리게 함으로써 영혼을 파멸시키는 힘이 이데올로기입니다. 사람은 종교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세련되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자의든 타의든 여러 가지의 이데올로기에,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하는데, 묶일 수밖에 없습니다. 문학적으로 표현해서, 아침 이슬 한 방울에 감격해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전체 운명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무엘의 부분적인 하나님 경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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