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말
- 예언자들의 시대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황홀경 속에서 환상을 보는 자들이나, 세상을 유랑하며 시로 세상을 비판하고 노래하는 방랑 시인들이거나, 순수하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설교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탁월한 직관과 통찰을 지닌 독자적인 사상가들에 가깝습니다. “예언자는 미래를 향하여 말하는 자이다.”(클라우스 코흐, 『예언자들』) 그들은 시대를 앞서 내다보고, 세계의 흐름을 읽어내며, 세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탁월한 선구자이자 사상가입니다. 소위 ‘영빨 쎈’ 좀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이 전혀 아닙니다. 깊은 어둠과 혼돈의 세계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로 가치관의 혼동과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 등 사람들이 길을 잃었을 때, 어디로 나아가야하는 지 방향성을 상실했을 때 어둠을 비추는 빛으로 등장합니다.
- 여로보암 2세 시대(번영의 그림자)
당시 이스라엘은 남 유대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남쪽에는 웃시야가 통치하고 있었고, 북쪽에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40년간 북이스라엘을 통치했는데, 가장 번영을 누리던 때였습니다. 외부의 큰 적이 없었고,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영토를 회복했고 활발한 국제 무역과 상업의 발달을 통해 경제적으로도 부유했습니다. 이로 인해 대지주, 거대 자본가 등이 등장합니다.
우가릿 본문에 의하면, 당시 ‘마르제흐’라고 하는 조합이 있었는데, 죽은 자들을 위해 베푸는 잔치를 여는 모임입니다. 회원은 주로 지배층 남성 군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마르제흐’는 이 잔치만을 위한 용도로 지어진 집입니다. 요즘으로 보면 클럽 하우스 같은 곳이지요. 왕실의 후원을 받아 막대한 비용이 드는 잔치를 엽니다. 죽은 자들을 위해서요. 특징은 술을 엄청나게 마시는 것으로 유명한데, ‘엘 신’마저 땅바닥에 쓰러질 정도라고 합니다. 이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의 목표는 자신도 죽은 자처럼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 시리아 북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우가릿(Ugarit)은 주전 6,000년~1,190년경까지 지중해에 인접한 고대 항구도시이자 무역의 중심지였다. 청동기 시대에 번성했던 도시국가 우가릿은 기원전 1,200년경 해양민족의 침략에 멸망당한 후, 1928년에 우연히 그 실마리가 발견되었다. 우가릿의 라스샴라 언덕에서 발견된 쐐기문자 형태인 우가릿 문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서의 토판에는 가나안 종교와 바알 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우가릿 토판문서는 쐐기문자를 사용한 최초의 알파벳 기록이다.)
이렇듯 도덕적 타락과 사치와 불의가 만연했습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극에 달하지요. 대지주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난한 자들의 땅을 빼앗고 재산을 약탈합니다. 엄청난 고리대금업이 발달하고, 이를 기반으로 가난한 이들의 삶의 터전을 짓밟고 빼앗고 농부들을 노예로 삼고 여성들을 성노예로 팔면서 온갖 부정과 부패, 악행을 일삼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더욱 더 가난해져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떠나 이리저리 떠도는 유민들이 생겨났고, 도시로 몰려들어 생존을 위해 자신들의 노동력을 파는 노동자들이 되기도 합니다.
부자들은 거대한 토지와 상업 등을 발판으로 엄청난 부를 형성하고 권력과 사법, 종교 등이 결탁해서 온갖 부정부패와 불법과 비리가 넘쳐났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시대. 가진 자들만을 위한 세상이었지요. 이 시기는 기원전 8세기(760년경) 무렵인데,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가족 중심적인 전통적인 가치체계가 붕괴하게 됩니다. 불법의 시대. 야만의 시대가 펼쳐졌던 것입니다.
▣ 아모스의 등장
- 드고아 목자
바로 이러한 시대에 아모스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1:1)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7:14)의 말씀을 근거로 오랫동안 아모스를 가난한 시골의 목자로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무지렁이로 보았습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 남쪽 18km 위치한 해발 830m 유대광야 지역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목자’는 히브리어로 ‘노케드’인데, 이는 대규모 가축을 소유한 자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뽕나무’는 돌 무화과나무로 주로 가축 사료로 활용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상당한 규모의 가축을 소유했고, 가축이 많아서 가축을 위한 사료로 사용하기 위해 돌 무화과나무를 재배하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부유했던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7장 14절의 말씀은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7:12)라는 말에 대한 답입니다. 이곳은 내 구역이다. 내 사업장이니, 너는 다른 곳에 가서 벌어먹으라는 말입니다. 이에 나는 밥 빌어먹으려고 이곳에 와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 돈 많다. 이런 일 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지요.
- 환상을 보다!
아모스는 최초의 문서 예언자입니다. 문서 예언자는 자기 예언이 글로 기록되고, 자기 이름의 성경책이 있는 예언자를 말합니다. 그가 사용하는 시 문체 문장들이나 예언 장르를 사용하는 것, 그리고 주변 국가에 대한 분석(다메섹, 가사, 두로, 에돔, 암몬, 모압, 유다, 이스라엘)등을 고려해 보면, 그는 성경(하나님)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믿음, 그리고 국제적인 안목과 세계적 정세를 꿰뚫고 있는 대단히 뛰어나고 탁월한 인물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환상을 봅니다.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1:1) “What he saw”(NIV, holy bible) 글의 순서로 보면 7장부터 그가 본 5가지 환상(메뚜기, 불, 다림줄, 여름 과일, 성전 붕괴와 민족의 멸망)이 등장하지만, 제가 보았을 때 오히려 그 순서가 반대로 보입니다.
니콜라스 게이지가 출연했던 2009년 영화 『노잉』에는 어린 아들이 다니던 학교 행사에서 50년 전에 학교에서 타임 캡슐에 넣었던 것들을 오픈해서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는 행사를 합니다. 그런데 숫자만 가득히 적인 종이를 니콜라스 게이지의 아들이 받게 되는데… 그 숫자는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큰 재앙을 기록하고 있고, 결국 지구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결국, 외계인에게 선택받은 아이만 살아남고 인류는 멸망하게 되지요.
아모스가 본 것도 그런 것이었을까요? 그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요? 상당히 부유했고, 아마 여행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주변 국가의 상황과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국가적 상황을 정확히 꿰뚫고 있습니다. 겉보기에 국가는 강력한 왕과 경제적 번영, 정치적 안정, 영토의 확장… 모든 것이 잘되고 있는 상황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너머의 다른 것을 봅니다. 그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을 지녔습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모국은 아니지만 동족입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들의 닥쳐올 불운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고민이 깊어 갑니다. 눈앞에 이익과 욕망에 사로잡혀 사치와 향락에 빠져 다가오고 있는 재앙을 잊고 있는 어리석은 지도자들과 엘리트들을 보고 있노라면 피가 거꾸로 흐릅니다. 그들의 비열함과 추악함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 이하의 끔찍한 절망과 고통의 삶 속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이 부르짖는 절규가 매일 귓전에 맴 돕니다.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갑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나 자신은 그저 한 개인에 불과합니다.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치가도 아니요, 군사력을 지닌 군인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고위 관료도 아닙니다. 그는 그저 시골의 이름 없는 목자일 뿐입니다.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내가 무엇이라고, 너무 오지랖이 넓은 거 아닐까요? 대체 누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나 할까요.
- 5가지 환상
그가 처음 본 환상은 메뚜기 떼입니다. 온 하늘이 메뚜기 떼로 뒤덮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먹어 치우는 끔찍한 광경이지요. 그다음은 온 세상을 삼키는 불입니다. 엄청난 불이 바다에서 일어납니다.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바다를 삼켜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곧장 육지를 덮쳐옵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릅니다. 온몸이 덜덜 떨립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그저 세계에 대한 분명한 판단인지 알 수 없지만… 아모스는 마치 세상의 종말을 보는 것 같은 공포를 느낍니다.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7:2,5) “안됩니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백성들이 당할 고통이 너무나 큽니다.” “당신께서 아껴 사랑하시던 백성이 아닙니까?” 떨리는 온몸을 부여잡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엎드려 빕니다. 부르짖음이나 절규에 가깝습니다. 그의 기도를 들으셨던 것일까요? “뜻을 돌이켜”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그 뜻을 거둡니다.
그러나… 이후의 세 가지 환상은 더 이상 철회되지 않습니다. 아모스는 깨닫습니다. 되돌릴 수 없음을 말입니다.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니”(8:2) 너무나 고통스럽고 슬픕니다. 그래서 그는 슬픈 노래를 부릅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5:1-2) 피가 끓고 애가 타는 슬프고도 슬픈 노래를 지어 부릅니다.
- 짐을 진 자!
아모스라는 이름은 ‘짐을 진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남 유다 사람입니다. 북이스라엘로 향합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슬픔과 고통을 가득 안은 채 동족을 향해 외칩니다. 절규합니다.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5:6) 그는 민족의 멸망을 예언한 첫 번째 예언자이기도 합니다. 여로보암 2세의 죽음과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누가 복이 아니라 저주를 선포하고 싶을까요. 굳이 남의 나라에까지 가서 모두에게 미움을 받으며 멸망을 선포해야 했을까요. 그만큼 그의 짐은 무거운 것이었고, 그가 본 환상은 그의 사명이자, 두려움이고,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게 만든 것이기도 합니다.
- 메시지 / 여호와의 분노
아모스의 식견은 대단합니다. 그리고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 또한 대단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의 잘못부터 선포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날”를 고대했습니다. 그날이 오면, 주변의 모든 이방 민족 족속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자신들은 완전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모든 환난과 어려움이 사라지는 날이며, 이방 민족이 심판받고 멸망하는 날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남쪽에서 온 예언자가 이방인들의 죄를 폭로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벌을 받을 것을 예언하니 얼마나 신이 났을까요.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벌하리라” “와~ 아멘~”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내가 블레셋(가사, 아스돗)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리라.” “와~ 와~”. “내가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불사르리라.” “짝짝짝~”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불사르리라.”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모압…” “유다”
그들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주변의 모든 국가와 민족의 죄상을 낱낱이 폭로하며 저주를 퍼붙은 아모스의 예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심지어 동족이지만 남 유다의 죄를 폭로합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의 동족이면서 라이벌인 유다마저 가차 없이 공격하니 너무나 신이 납니다. 드디어 그들이 고대하던 여호와의 날이 곧 도래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축복으로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자신들을 향한 무시무시한 저주의 말이 쏟아집니다. 정치적인 죄, 경제적인 죄, 윤리적인 죄, 법적인 죄(사법의 정의를 무너뜨린 죄), 종교적인 죄… 삶의 모든 면에 걸친 죄를 낱낱이 고발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부패하고 썩어 문드러졌는지 밝힙니다.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았다.”
“힘없는 자의 머리를 먼지 속에 발로 밟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인에게 다녀..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다.”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셨다.”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했다.”
“그러면서도 벧엘과 길갈에 가서 아침마다 희생을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며
그것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뻔뻔하게 예배드렸다.”
그러한 아모스의 예언, 저주의 말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경악했을 것입니다. 대체 누가 저주의 예언을 하고 싶을까요. 축복의 말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너희들이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고 있느냐?
그날이 기쁨의 날이 될지, 두려움과 공포의 날이 될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 나가는 말
- 그는 왜 북쪽으로 가야만 했을까?
그는 수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을 것입니다. 외면하고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내 일이 아니라고 거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기 나라의 일도 아닙니다. 나의 일도 아닙니다. 남의 일일 뿐입니다. 그들이 감당해야할 몫일뿐입니다.
왜 그여야만 했을까요? 그리도 많은 종교인들이 있었을 것인데, 굳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에게 이런 일을 시켰어야 했을까요? 그가 가진 지식, 통찰, 안목이기도 했을 것이고, 자신의 사명이기도 했을 것이고, 스스로 짊어진 짐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짐을 진 자”라는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스스로 짐을 진 것입니다. 감히 한 개인이 질 수 없는 것인데, 한 국가의 운명을 연약한 무명한 한 개인에게 지우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자신의 운명으로, 사명으로, 자기의 짐으로 여깁니다. 온몸이 떨리고, 턱이 딱딱 부딪칠 만큼의 두려움과 공포와 전율을 경험하고 그는 북을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압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멸망이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선언으로 바뀌지 않을 것을 압니다. 자신이 실패할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그는 선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가 끓는 외침과 절규, 안타까움과 슬픔과 분노와… 모든 것을 쏟아내는 선포… 누구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혹여 라도 돌이킬 수 있다면… 자신의 짐을 짊어집니다.
- 성경은 답인가?
흔히 우리는 성경이 답이라고, 예수가 답이라고 배워왔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질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놀라운 환상으로, 탁월한 통찰력으로 하나님은, 성경은, 역사는 아모스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닐까요?
“이 현실 앞에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오늘도 하나님은, 성경은 각자의 다양한 삶의 자리에 처해 있는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너의 짐은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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