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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10:34~43, 부활 주일, 2022417

 

 

베드로의 설교

베드로는 가이사랴 주둔 로마 군부대에 속한 백부장인 고넬료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런 일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전통적으로 경건한 유대인은 이방인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동적 유대인들에게 욕먹을 각오를 하고(10:28 참조) 고넬료의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일을 성령께서 이끄셨다고 그는 판단한 겁니다.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베드로가 선포한 내용이 오늘 설교의 성경 본문인 행 10:34~43절입니다. 그 선포의 핵심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일에 관한 것입니다. 42절에 파격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라는 표현은 사도신경과 니케아신조 후반부에도 나옵니다.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통이었다는 뜻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21세기를 사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고백을 실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충 그러려니 할 뿐이지 진지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우선 재판장이라는 단어 자체가 현대인에게는 불편하게 들립니다. 자기가 노력한 것만큼 인생이 잘 풀리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운이 좋아서 노력보다 인생이 더 잘 풀리면 금상첨화입니다. 그런 소박한 마음으로 사는 이들에게, 또는 나름으로 야심 차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심판장이라는 말은 한편으로 거리가 멀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기분 나쁘기도 들립니다. 지옥에 간다는 건지, 이 세상에서 불행한 일을 당한다는 건지 모르겠으나 심판은 무슨 심판하면서, 자기의 실제 삶과는 상관없는 말이라고 여깁니다. 교회에서 심판, 회개, 지옥과 천국 등등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현대인들은 교회를 멀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어느 정도 진지하게 대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주제 앞에서는 망설여질 겁니다. 그런 심정이 설교자인 저도 이해가 갑니다.

여기서 살아있는 자죽은 자라는 표현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은 자의 재판장이라는 말은 우리가 확인할 수 없으니 그렇다 하더라도 살아있는 자의 재판장이라는 말은 수긍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지금의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재판장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히 악한 사람인데도 출세하기도 하고, 권력을 잡기도 합니다. 거꾸로 착한 사람인데도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합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요령껏 사는 게 최선입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유독 그렇습니다. 한반도가 미래 지향적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해서 서로 지혜와 의지를 모으고, 서로 다른 생각을 통합해나가는 게 정치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정적을 원수 대하듯이 정치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일종의 격투기장처럼 정치판이 돌아가는 겁니다. 관중들의 심리도 모두는 아니지만 대체로 비슷하게 작동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정치는 국민의 정신 건강을 돕는 게 아니라 헤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국회의원과 자치단체장과 대통령이 되겠다고 삿대질하면서 싸우기보다는, 당신이 먼저 일을 맡으라고 양보하는 세상이 언젠가는 올 수 있을까요? 너무 이상적으로 들리겠으나 그런 세상을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가 자신의 권력 욕망을 실현하는 자리가 아니라 대구 샘터교회 운영위원처럼 순전히 봉사하는 자리로 바뀌면 그게 가능하겠지요.

 

생명 심판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라는 명제는 공허한 게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판은 생명 재판입니다. 생명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의 기준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을 부를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8:36)

 

온 천하와 생명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온 천하를 얻어야 성공한 인생으로 여기는 세계관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입니다. 우리는 온 천하를 손에 넣는 것만을 생명을 얻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게 습관이 되고 고착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철학이자 인생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부와 권력을 손에 넣어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생명은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따라서 피조물인 우리는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없고, 완성할 수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 하나님의 생명은 죽음에 의해서도 파멸되지 않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몇몇 교우와 함께 두 번의 조문을 다녀왔습니다. 한 번은 부친상을 당한 교우 가정이고, 다른 한 번은 며느리를 잃은 교우 가정입니다. 87세의 죽음과 41세의 죽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입니다. 죽음은 하나님 품에 안긴 사건이 죽음이니까 원칙적으로만 말하면 기뻐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극도의 슬픔에 떨어집니다. 자식이 죽었을 때는 참척의 고통을 겪습니다. 조문이나 장례예식에서 말씀을 전할 때마다 저는 곤혹스러움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견뎌내야 할 상실의 슬픔과 새로운 생명을 덧입는다는 기쁨을 동시에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우리 자신의 죽음도 미리 준비하는 게 마땅합니다. 그런 준비 없이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는 없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준비는 죽음으로 우리의 생명이,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생명이 파멸하지 않는다는 사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자만이 아니라 죽은 자의 재판장이라는 베드로의 설교가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생명 심판이라는 말을 오해하여, 착한 사람은 상을 주고 악한 사람은 벌을 주는 것쯤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지옥 표상과 천국 표상이 대표적입니다. 그런 표상은 종교적인 진리를 가리키는 메타포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은 지옥이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세상은 천국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가 생명 심판자라는 말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구원이 발생했다는 뜻이지 그가 어떤 대상에게 벌을 직접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은 곧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절대적이기에 생명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징벌을 받은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함 자체가 징벌입니다. 사랑받지 못함이 심판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겁내지 않는다고 말할 겁니다. 지옥은 말장난이지 실제로는 없다고 말할 겁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사랑받는다는 게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그리고 사랑받지 못함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모릅니다. 쉬운 예로, 여기 커피 전문가가 있습니다. 그는 커피의 세계에서 어떤 특별한 생명을 경험합니다. 다른 사람은 커피 맛을 전혀 느낄 줄 모릅니다.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는 커피의 세계에서 징벌을 받은 겁니다. 이건 하나의 비유니까 억지로라도 커피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죄 사함

앞의 설명을 전제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 심판이야말로 죄 사함이라는 베드로의 진술은 옳습니다. 저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고 도덕적인 사람이라서 구원하고, 저 사람은 미련하고 부도덕한 사람이라서 제외하는 게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방식으로 심판하십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43절을 읽어볼 테니 귀 기울여보십시오. 이게 귀에 번쩍 뜨이면 여러분은 그리스도교 복음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갈 것입니다.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죄 사함이 곧 생명을 얻는 구원입니다. 죄 사함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여기서 죄는 자기의 노력으로 자기 생명을 완성해야 한다는 강요와 욕망에 떨어지는 삶의 태도입니다.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거나 느슨해졌으니 생명을 얻기 위해서 목이 마른 사람처럼 몸부림을 치는 겁니다. 제가 설교할 때마다 종종 강조한 내용인데, 이는 곧 자기를 절대화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죄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자아말고는 중요한 게 없습니다. 이런 욕망이 우리의 삶에서 압도적으로 작용합니다. 극단적인 예로, 여기 자기 인생을 포기할 정도로 희생하면서 자식을 키우고 사회에 봉사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 노력과 열정의 내면에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욕망으로, 자아를 확대하려는 욕망으로 가득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서 율법주의라고, 자기 의라고 보았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로 그렇게 살라고 유혹하고 강요하고, 거꾸로 바울은 그런 행태를 죄라고 말합니다. 죄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없습니다. 온 천하를 얻었는데도 자기 목숨을 잃은 거와 같습니다.

제가 설교자로 살면서, 죄 사함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저를 포함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는지가 종종 걱정됩니다. 그걸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 어떤 설교도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죄 사함이 없어도 괜찮으니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더 노골적으로는 돈이나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쉽게 밖으로 냅니다. 전인교육을 목표로 하는 공교육도 온통 세상에서 인정받는 일에 쏠려 있습니다. 여러분, 온 천하를 얻는 노하우만 찾게 하는 세상의 가르침에 너무 솔깃해하지 마십시오. 죄 사함의 능력과는 정반대의 길을 따라가게 만드는 겁니다. 이렇게 적당하게 인생을 즐기면서 살다가 때가 되어 죽으면 됐다, 하면서 삶을 마칠 건가요? 그런 방식으로 실제로 행복한 인생이 될 거라고 확신하십니까? 세상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말이, 즉 자유와 평화와 사랑의 능력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설득력이 있을까요? 그래서 여러분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살기를 바란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의 이름이 알라딘의 램프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그의 이름이 어떻게 자기 집착과 자기 집중과 자기 연민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걸까요? 그래서 살아있는 자나 죽은 자가 다 구원받는다는 말일까요?

 

부활 경험

이런 질문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자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40) 베드로는 하나님이 사흘 만에 그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한 분의 현현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41절에서 자기를 가리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부활 현현이야말로 죄 사함의 참된 능력입니다. 예수 부활 현현은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확증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 부활에 관한 증거를 대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세상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반드시 증거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증거도 그렇게 명확한 게 아닙니다. 비유적으로,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이 여러분을 사랑할만한 분명한 증거가 있을까요? 그 증거를 다른 사람도 인정할까요? 우주의 빅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증거를 인간이 알 수 있을까요? 예수 부활 문제에서는 모두가 확인할만한 증거는 없어도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있습니다. 그들이 부활 증인들입니다. 그들의 경험이 옳은지 아닌지는 우리가 따져봐야 합니다. 검증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 부활을 경험한 이들은 자신들이 다 이해하지 못한 어떤 특별한 사건을 예수에게서 경험한 게 분명합니다. 그들은 없는 걸을 일부러 꾸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해 숨지고 무덤에 묻혔던 예수가 살아있는 자로 그들 앞에 나타났다는 그들의 진술은 명백하고 솔직한 것입니다. 그런 경험에 근거하여 그들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그의 이름을 힘입어죄 사람을 받는다고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 그리스도교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질문할 분들이 계십니까? 바울은 이미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고(고전 15:19) 말입니다. 예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교의 미래는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부활 신앙이 없어도 숭고하고 이타적인 예수의 가르침만으로 얼마든지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유대교인이나 이슬람교도가 되어도 좋습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인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토대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취약합니다. 예수 부활 여부라는 한 가지 사실로 인해서 모든 게 허물어지거나 세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그 한 가지 사실에 모든 것을 걸었기에 다른 이들보다 더 절실합니다. 더 단순합니다. 더 신비롭습니다. 더 깊은 영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동의가 되나요, 안 되나요?

동의가 안 되는 분들이 계시겠으나 제가 다시 뒤로 돌아가서 설교하거나 다른 어떤 것을 지금 보충할 수는 없습니다. 다음의 문장을 외워두기만 하시라고 부탁드립니다. 그 문장이 여러분에게 거룩한 죽비가 되어서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되는 순간이 언젠가는 닥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살아있는 자와 이미죽은 자의 운명을 결정할 재판장이십니다.” 아멘.

사도행전 10:34~43
https://youtu.be/cuZYOsQ6pZ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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