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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삶과 죽음의 경계 (눅 20:27-38

삶과 죽음의 경계

눅 20:27-38, 창조절 열한번째 주일, 11월10일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윤리 도덕이나 풍습 등은 민족에 따라서 다르고 시대에 따라서 다릅니다. 오늘 우리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고대 풍습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입니다. 고구려와 부여가 대표적입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취하는 풍습입니다. 오늘의 관점으로 보면 황당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사회를 지탱하는 풍습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미망인과 어린 자녀들을 그런 방식으로라도 지켜줘야 한다는 이유가 한 가지입니다. 이슬람권의 일부다처제 역시 이런 이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미망인이 죽은 남편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갖고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입니다.


형사취수혼 제도는 구약성경에도 나옵니다. 신 25:5절에 따르면 아들을 두지 않은 채 남편이 죽으면 이 여자는 다른 남자를 찾아서 재혼하지 말고 죽은 남편의 동생과 결합해야 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나오면 이 아이에게 죽은 아버지의 이름을 지어주어야 합니다. 고대 유대사회에서 이런 제도가 실제로 실행되었는지는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드물게라도 있긴 있었을 겁니다. 율법이 그걸 다룬 이유가 거기에 있었겠지요.


오늘 제3독서에도 형사취수혼 문제가 언급됩니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모세의 율법 운운하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형사취수혼이라는 율법에 따라서 한 여자와 살다가 아무도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여자도 죽었습니다. 부활 때에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말도 되지 않는 경우이지만 일단 상상은 할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황당한 상황을 전제하고 질문하는 이유는 트집을 잡으려는 데에 있습니다. 트집을 잡으려는 사람들은 복음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 대목(눅 20:19-26)에도 나옵니다.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에게 전권을 받은 사람이 예수님에게 와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느냐 하고 질문했습니다. 일종의 함정입니다. 옳다고 대답하면 로마 정권을 인정하냐는 비판을 할 것이고, 옳지 않다고 하면 실정법을 어겼다면서 로마 정부에 고발할 것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이렇게 트집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번 사두개인들의 질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트집 잡으려는 걸 알고 계셨지만 예수님은 대답을 피하지 않습니다. 좌고우면 없이 실체적인 진실을 그대로 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선 사두개인들의 오해를 바로잡습니다. 부활의 세계에는 지금 사두개인들이 말하고 있는 결혼 제도 자체가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런 세계에서 이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 하는 질문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36절에서 부활의 세계를 좀더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결혼, 부부, 가정이라는 제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일단 끝났다고 봐도 좋습니다. 부활의 세계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거니까요. 그러나 그런 대답으로 사두개인들이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트집을 잡듯이 비틀어서 질문한 본래의 의도는 부활을 부정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 달리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부활을 믿지 않을 수 있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건 좀 복잡한 문제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부활 사상이 별로 강하지 않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모두 스올이라는 어두움 세계로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보다는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 행복하게 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활 사상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로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오늘 기독교 안에서 반복됩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개인처럼 예수님을 믿긴 하지만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 경건한 기독교인으로 살기는 하나 부활 사상을 유치한 것으로 치부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실제의 생명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이나 사랑을 제자들이 깨닫게 된 것쯤으로 여깁니다. 민중신학 계열의 사람들이나 고도의 지성적인 사람들이 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들과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죽어서 우주 어느 곳에 마련된 천당에 가는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그 천당을 이 세상의 복지가 최상으로 구현된 장소쯤으로 상상합니다. 양쪽 모두 치우친 생각들입니다. 한쪽은 무조건 부정하고 다른 한쪽은 무조건 긍정합니다. 양 극단에 문제가 되는 것은 부활 개념에 대한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부활 문제를 정확하게 설명하십니다. 죽음 이후에 삶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의 생각은 성경에 위배된다는 점을 본문 눅 20:37절에서 지적했습니다. 출 3:6절의 인용입니다. 이 구절은 모세의 호렙 산 경험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모세는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 현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후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이 구절은 파스칼이 <팡세>에서도 인용했다 해서 유명합니다. 여기에 나열된 인물들을 보십시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고대 이스라엘 족장들입니다. 이 구절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자기를 알려주신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철학자들의 사유에서 발현된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2) 고대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십니다. 3) 이런 의미를 포함하면서 오늘 본문이 말하려는 핵심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입니다. 38a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만약 그들이 죽어 실제로 무(無)가 되어버렸다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주장이 실질적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자칫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정직하게, 정확하게 어떤 것을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들의 뼈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모세의 이런 발언에 근거해서 부활의 정당성을 무조건 주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래도 무조건 믿으라고 윽박질러야 할지요. 아니면 이런 문제는 복잡하니까 대충 넘어가고 구제와 봉사나 열심히 하고, 또는 교회 성장에나 매달려야 할지요. 초기 기독교도 이런 문제가 곤혹스럽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본문의 병행구를 비교해보면 당시의 이런 형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병행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나옵니다. 세 복음서를 비교해보면 거의 똑같은 내용입니다. 다만 누가는 한 가지 점에서 마태와 마가와 차이가 납니다. 마태와 마가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마 22:32, 막 12:27)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까지는 똑같이 말한 뒤에 38b절에서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마태나 마가와 달리 누가가 이 문장을 이 이야기 끝에 덧붙였다는 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만으로 부활을 설득시키기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누가가 보충한 이 문장도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닙니다. 이 문장으로 인해서 오히려 전체 내용이 더 복잡하게 느껴졌을지 모르겠습니다. 잘 보십시오. 이 문장의 번역들도 조금씩 다릅니다. 영어 현대어 번역은 ‘하나님께 연관되어 있는 한 모든 사람은 살아있습니다.’라고 했고, 루터 번역은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있습니다.’로, 우리말 공동번역은 ‘하느님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살아있는 것이다.’로 번역했습니다.


여러 번역에서 공통되는 점은 일단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거꾸로 죽었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숨 쉬고 심장이 뛰고 먹고 배설하면 일단 생리적으로 살아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런 작용이 멈추면 죽었다고 말합니다. 중간쯤의 단계도 있습니다. 숨을 쉬고 심장이 뛰기는 하지만 뇌가 정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뇌사자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람을 죽은 거로 보냐, 아니냐는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뇌사자를 빨리 인정해야 장기 기능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아주 드믄 경우지만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다시 살아나는 사람도 있으니 뇌사를 함부로 결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뇌는 살아 있으나 호흡이나 심장 박동이 멈춘 사람을 기계 장치로 연명해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에도 찬반양론이 있습니다. 생리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살아있다는 게 뭐냐, 하는 질문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 이 질문은 더 복잡해집니다. 신체는 멀쩡하지만 정신이 죽은 거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고만 들고, 더 나가서 파괴하려고만 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있는 거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 심한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은 살아 있으나 거의 죽은 것 같은 상태로 살아갑니다. 오히려 죽는 게 낫다는 생각도 가능합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동반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니까요.


이 문제를 좀더 철학적인 차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살아 있지만 죽음이 우리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사고로 죽는 일도 허다합니다. 불치병도 많고, 자동차 사고도 많습니다. 돌연사도 많습니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요행에 가까운 일이지 모르겠습니다. 운이 좋아 늙을 때까지 산다고 하더라도 결국 모두 죽습니다. 단지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라는 게 아주 짧기 때문에 일찍 죽으나 늙어 죽으나 차이가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있었던 특강에 루터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루터는 1546년에 죽었습니다. 그의 신학대학교 후배 교수이자 종교개혁 동지였던 멜랑히톤은 14년을 더 활동하다가 1560년에 죽었습니다. 500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볼 때 14년 전에 죽은 루터나 후에 죽은 멜랑히톤이나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철학적 차원에서 본다면 삶과 죽음은 동시적 사건입니다. 그래서 중세기 유럽 사람들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삶이 허무하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하니 열정적으로 살지 말고 대충 살아도 좋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을 무책임하게 살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사두개인들의 시비로 불거진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여러분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는 말씀을 해석하는 중입니다. 특히 ‘살아있다.’는 게 그렇게 명료하지 않다는 사실을 설명한 겁니다.


이 구절을 다시 보십시오. 영어 번역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연관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번역도 이런 뜻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든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 숨 쉬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관계된 사람만이 아니라 숨을 쉬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관계된 사람까지 포함됩니다. 숨을 쉬지 않는 방식의 생명이 무언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일반적으로 죽음 이전의 숨 쉬는 생명 현상만을 살아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생명 현상 너머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세상살이가 오직 이런 생명 현상을 강화하고 확대하는 것에만 집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선입견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생명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무덤 속에서 잠자는 사람들까지, 아니 그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질료들이 해체된 사람들까지 살아있다고 말입니다. 우리 눈에 너무나 또렷한 삶과 죽음의 경계가 하나님 안에서 해체된다는 뜻입니다. 이게 부활 신앙의 요체입니다.


부활 생명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라고, 저에게 요구하지 마십시오. 그럴 능력이 저에게 없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해체된 생명의 세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고 희망하는 것이라는 사실만 말씀드릴 수 있을 뿐이지 더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는 불가능합니다. 그걸 더 구체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이비 이단의 교주일 겁니다. 예수님도 본문 36절에서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장가가고 시집가는 방식으로만 생명을 이해하는 한 부활 생명을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해체된다는 의미의 부활 생명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지금 필요한 태도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가 경험한 생명 현상에 대한 선입견을 허무는 일입니다. 그런 훈련이 신앙공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조건과 관계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팔복에서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이유를 여러분이 아실 겁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는 어렵겠지요? 여러분의 영적 분량만큼 가보십시오. 거기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둘째, 하나님과의 연관성을 유지하고 심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입니다. 세례는 바로 그 일치를 가리킵니다. 성만찬이 있는 예배를 통해서 일치를 죽을 때까지 반복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죽는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연관성을 팽팽하게 유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살아있든지 죽었든지 모두 살아있는 겁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설교를 밑바탕에 놓고, 이제 제가 공동번역으로 본문 38절을 읽을 테니 들어보십시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 설교듣기와 보기가 다 대구샘터교회 예배에서 온 겁니다.
듣기보다는 보기의 소리가 더 깨끗하군요.

누가복음 20: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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