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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삶의 견고한 토대 (시 90:1-6, 13-17)

삶의 견고한 토대

90:1-6, 13-17, 창조절 여덟째 주일, 20201025

 

 

바둑 격언에 장고 끝에 악수 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수를 찾으려고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가 결국은 나쁜 수를 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도 비슷합니다. 행복하게 살려고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다가 영혼이 산만해집니다. 산만한 생각을 좇기만 하면 삶의 근본에 관한 생각은 종적을 감춥니다. 이런 방식으로 끝까지 허둥대다가 인생을 끝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삶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삶의 근본을 말합니다.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면 삶에 대한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는 사실을 느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성경 본문에 나타난 새로운 차원으로 여러분을 안내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렙니다.

 

우리 손의 일

90편은 크게 세 단락으로 구분됩니다. 1-6절은 인간 삶의 허무에 관해서, 7-12절은 인간의 죄에 관해서 말하고, 13-17절은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이 마지막 17절 한 구절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제가 지금 17절을 읽을 테니 집중해서 들어보십시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이 구절에는 특이하게 들리는 문장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이 그것입니다. 사람에게 손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일을 손이 합니다. 농사짓고, 기계를 다루고,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 일도 손이 있어야 합니다. 악기 연주와 그림 그리기도 다 손의 일입니다. 지금 설교를 작성하는 저도 손을 씁니다. 스마트폰이 출현한 후로는 손의 역할이 더 커졌습니다. 개인의 하루살이로부터 시작해서 인간 문명까지 모든 것이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손은 인간의 실존 전체를, 즉 우리의 삶 자체를 가리킵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해달라고 호소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실존이 견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실존만이 아니라 한 사회와 국가와 인류의 토대도 별로 단단하지 않습니다. 그 토대의 부실을 시편 기자는 3-6절에서 실감 나게 묘사했습니다.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1) 사람은 모두 티끌로 돌아간다. 2) 사람에게 천 년이 하나님에게는 밤의 한순간과 같다. 3) 인간의 삶은 아침에 돋아나서 저녁에 시드는 풀과 같다. 우리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다만 절실하게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이따금 절실하게 느껴도 다른 대안이 없으니 그러려니 하고 지나갑니다. 이런 실존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분주한 일상으로 몰입하는 겁니다. 다른 이들과 경쟁하거나 자기 목표를 성취하면서 어느 정도의 만족을 느끼는 방식으로 티끌과 한순간과 풀이라는 엄정한 사태를 외면합니다. 과연 외면한다고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임시방편 아닐까요?

인간 실존의 토대가 탄탄하지 않다는 말은 사람의 노력으로 삶의 기초가 확보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돈을 통해서 그게 가능했다면 시편 기자는 분명히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매달렸을 겁니다. 다른 이들의 칭찬이나, 학문적인 업적이나 정치적인 업적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꾸려도 역시 그것만으로는 삶의 토대가 견고해지지 않습니다. 인생은 이상합니다. 자신이 세운 인생의 목표가 삶의 토대, 즉 행복의 근원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그걸 이루면 그 목표는 티끌로 변합니다. 트리나 폴러스가 쓴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은 희망을 말하는 것 같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희망이 참된 희망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어느 애벌레가 다른 애벌레 떼와 경쟁을 벌이면서 탑 꼭대기에 오르는 과정이 그 책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른 애벌레를 짓밟고 정상에 올랐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옆을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갑니다.

 

하나님의 은총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17a)라고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삶의 토대가 견고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4절에서 언급된 주의 인자하심이나, 16절에 언급된 주의 영광도 큰 틀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은총과 같은 뜻입니다. 이 세 단어는 성경에 자주 나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단어가 너무 낯설어서 시큰둥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거꾸로 이런 단어가 너무 익숙해서 건성으로 대합니다. 은총, 자비하심, 영광은 우리 실존 전체를 압도하는 힘을 가리킵니다. 그 힘을 느끼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의 하나는 자기 초월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동서남북이 모두 끝없는 모래사장입니다. 강한 바람에 모래가 날려 눈앞도 분간할 수 없습니다. 강한 모래바람이 그를 압도하기에 그는 자신이 누구의 남편이거나 아버지인 사실을 잊습니다. 밤에 담요 한 장을 깔고 누웠습니다. 하늘 전체가 눈에 들어옵니다. 새카만 하늘에 별들이 모래를 뿌려놓은 듯합니다. 그 순간에도 그는 자기를 초월합니다. 무한한 우주의 힘이 그를 압도하기 때문입니다. 거시세계인 우주만이 아니라 미시세계인 양자도 우리를 압도합니다. 양자 개념이 느껴지면 자신이 목사라는 사실이 잊힙니다. 대통령이거나 노벨상 수상자라는 사실도 소소한 일이 되고 맙니다.

우주나 양자가 너무 먼 이야기라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사물을 보십시오. 거기에도 우리를 압도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걸 느끼는 사람도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올해는 우리 집 뜨락에 꽃들이 많이 피었습니다. 맨드라미 씨앗을 보신 분이 계신지요. 유난히 잘고 숫자가 많습니다. 작은데도 반짝거리기에 눈에 확 들어옵니다. 수백 개의 씨앗이 한 송이 꽃 밑동을 피부처럼 덮고 있습니다. 지인이 일전에 고구마를 캐다가 사진을 찍어서 저에게 보냈습니다. 130일 동안 어두운 땅속에서 묵언 수행하는 수행자처럼 자란 고구마입니다. 그 고구마를 보니 자신이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보통 때 대수롭지 않게 대하던 고구마에서 생명의 신비라는 압도적인 힘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 압도적인 힘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초월합니다. 그 초월에서 삶이 견고해집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은총을 내려달라고 호소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1세기 현대인들은 세상과 생명과 역사를 밋밋한 것으로 대합니다.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깁니다. 계몽주의와 근대주의 이후로 인간은 세상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계몽된 인간 앞에서 모든 권위는 부정당합니다. 그게 인간화이고 민주화이고 과학발전이라고 여깁니다. 그런 방식으로 인간의 삶이 자유로워진 것은 분명합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문명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모든 곤란한 숙제를 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만 보고 현대인이 실제로 자유로워졌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종교 자유를 찾아 북아메리카에 이민 온 영국 청교도들이 미국을 세웠습니다. 뉴욕항에는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선물로 준 자유의 여신상이 서 있습니다. 미국은 자유의 나라입니까? 미국은 세계의 자유를 위해서 헌신하는 나라입니까? 그렇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21세기 현대인은 하나님을 포기하고 대신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 우상이 자연과학일 수 있고, 자아 성취일 수 있고, 민족주의일 수 있고, 더 가깝게는 자본주의일 수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 달에 사람을 보낼 정도로 과학이 발전했으나 우리 영혼이 자유로워지지는 않았습니다.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으나 국가 간의 싸움은 그치지 않습니다. 돈은 많아졌으나 마음은 더 궁핍해졌습니다. 삶의 토대가 견고해지기는커녕 더 취약해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삶의 토대를 견고하게 세우기 위해서, 즉 행복해지기 위해서 굳이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살이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특히 현대 지성적인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신앙이 오히려 인간의 삶을 왜곡시킨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또는 기독교 신앙을 유치하게 여깁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 신앙과 현대 무신론 사이의 논쟁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삶의 태도는 반지성적이지도 않고 유치하지도 않다는 사실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신앙이야말로 훨씬 더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질적인, 그리고 더 자유롭고 더 적극적인 삶의 태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과연 이런 생각이 정당할까요? 아닐까요?

 

하나님의 영원성

하나님의 은총이 내려야만 삶의 토대가 견고해진다는 시편 기자의 고백은 공허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뭔가 잘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그가 볼 때 앞부분에서 이미 짚은 대로 우리의 삶은 티끌과 같고 밤의 한순간과 같고 풀과 같습니다. 의미심장한 예술과 강력한 정치적 성과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모두 지나갑니다. 그리고 끝장납니다. 성경은 하나님만이 영원한 존재이기에 하나님만이 우리 삶의 토대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끝까지 견지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시간과 더불어서 사라지는 무상한 것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가 삶의 토대를 견고하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그 하나님은 누구일까요?

우선 영원한 것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손으로 꼽아보십시오. 빅뱅 사건은 어떻습니까? 빅뱅은 138억 년 전에 일어나서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니까 영원하다는 말을 붙여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몇 가지 자연현상 역시 영원하다는 말에 어울립니다. , , 햇살, 바이러스 등등에서 볼 수 있는 황홀할 정도로 멋진 생명 현상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체는 개체로서는 한순간이지만 전체로서는 영원해 보입니다. 그러나 자연이 곧 하나님은 아닙니다. 성경에 따르면 자연도 피조물입니다. 아무리 장엄하고 신비해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만이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으나 피조물인 자연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지구도, 태양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너무 극단적인 말일까요?

이 대목에서 저는 사도 바울의 말을 전해야겠습니다. 고전 13:13절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항상 있다는 말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존재가 하나님이라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곧 하나님입니다. 그중에서 첫째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생명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곧 영원한, 더 정확히 말하면 종말로 열린 궁극의 생명입니다. 너무 교리적인 설명인가요?

예수를 믿어도, 즉 예수의 제자가 되어도 죽는 건 똑같은데 예수가 어떻게 영원한 생명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생명, 또는 삶, 또는 인생에 관한 생각을 완전히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이 실질적으로 느껴져야 성경 이야기가 귀에 들립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느끼고 믿어야 합니다. 그분이 창조했으니 그분이 통치하며 완성하십니다. 우리는 그의 창조와 통치와 완성 안에서 살아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창조주이고 구원자이신 그분에게 우리 자신을 완전히 맡기고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불난 집의 3층에서 어린아이가 마당에서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아빠에게 뛰어내리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아이는 아빠를 믿어야 합니다. 만약 그 아이가 무섭다고 해서, 그리고 아버지의 모습이 확실하지 않다고 해서 뛰어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가 불을 끄겠다고 나서거나 아직 불이 번지지 않은 곳으로 잠시 피신한다면 그 아이의 생명은 보장받지 못합니다. 삶의 토대가 견고할 수 없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고단한 세상살이를 모른 채 무조건 하나님께 매달리겠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종교 열광주의자가 아닙니다. 인격과 인식에서 미성숙한 사람이 아닙니다. 인생살이에서 실패하여 자신감을 상실한 현실 도피주의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작은 지식에 기대서 뭔가를 아는 듯이 포즈를 취하지만 실제로는 피상적으로만 아는 우리와 달리 삶을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뚫어본 사람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시 90편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는 표제가 달렸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 갔던 영웅으로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절실한 문제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33:19)이었습니다. 실제 삶에서나 신앙에서 성숙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자기 삶의 토대가 견고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삶의 거처

삶의 토대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견고해진 사람에게 실제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해보시오. 개인에 따라서 다를 겁니다. 이전에는 매사를 걱정하다가 이제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허무하게 여기던 사람이 이제는 그 허무를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다른 이들에게 짜증을 내던 사람이 짜증 내지 않게 될 겁니다. 이런 변화도 쉽지는 않습니다. 어쨌든지 이런 변화는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하고, 기독교인에게 많이 나타날수록 좋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그런 삶의 변화를 가리켜서 성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거룩해지라고 말합니다.

성화는 사람에 따라서 각각 다르나,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삶이 견고해진 사람에게 똑같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자기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찰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주변에 아무리 많은 일이 일어나도 그 사람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님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자들이 걸으면서 많은 사람과 사건을 만나지만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앞에서 예로 들 불난 집에서 보듯이 3층에 홀로 떨어진 아이의 관심은 불이 아니라 밑에서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아빠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는 영혼의 촉수를 하나님께만 맞춘 사람이었습니다. 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하나님이 거처이기에 다른 문제들은 사소해집니다. 가장 궁극적인 생명이 약속되었으니 다른 약속은 시시해 보입니다. 돈과 사회적 신분으로 행복해진다는 세상의 약속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우리가 치명적으로 압박해오는 세상의 약속에 어떻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냐고 반문하고 싶으신가요? 믿음의 흉내만 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실제로 가까이 가서 영혼의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다른 건 몰라도 오늘 시편 기자와 똑같은 심정으로 기도드리고 싶어질 것입니다. 지금 제가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은총을 저에게 베풀어 주십시오. 그래야만 제 삶의 토대가 단단해지기 때문입니다.”

시편 90:1-6, 13-17
https://youtu.be/RLXG2DlNU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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