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를 넘어서
딤전 6:3-10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
습니다. 신앙의 스승과 제자, 또는 부자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디모데는 한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바울에게 종종 가르침을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바울의
입장에서도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를 향한 관심이 매우 절실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디
모데가 당면한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알아 오늘 편지를 썼습니다. "그대는 이것들을 가
르치고 권하시오"(2절,후)라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디모데서(書)는 주로 교회에
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조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목회서신이면서
교육적인 성격을 많이 담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도리를 담은 케리그마와는 그 틀이 약
간 다릅니다. 그렇지만 그 근본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도리를 담고 있
다는 점에서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궤변론자들의 변
바울이 여기서 문제를 삼고 있는 사람은 궤변론자들입니다. 4절 말씀은 이렇습니
다. 이런 궤변론자들은 "잔뜩 교만해져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쓸데없는 질문과 토론
에만 미친 듯이 열중합니다." 이렇게 부질없는 논쟁에 힘을 쏟으면서 신앙생활하는 이
들이 그 당시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바울은 이런 궤변론자들을 정확하게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입담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논쟁을 통해서 자기 자
신을 내세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말이 되지 않는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그들
의 입을 통해서 어느 사이에 진리로 둔갑할 수 있습니다. 흡사 요즘의 잘 나가는 변호
사들처럼 없는 말도 만들어내고 있는 말도 없애면서 어떤 목표를 성취할 능력이 탁월
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곧 교만입니다. 진리에 마음을 열어두기 보다
는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는 헬라 신화의 어느 신처럼 모든 문제를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는 점에서 교만합니다.
입담이 좋다는 것은 논쟁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사도행전(26장)의 기록을 보면 사도바울은 말을 잘 했습니다. 유대인의 무고로 인해 예
루살렘에서 체포, 구속된 바울은 자기 스스로 변론할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 마지막
으로 바울의 자기 변론을 들은 아그리빠 왕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바울로, 그대는 미
쳤구나!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미쳐 버렸구나!".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그렇게 쉽게 나를 설복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바울 앞에서
는 그의 말을 부정했지만 나중에 바울의 말이 옳았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바울처럼 진
리에 사로잡힌 사람의 말은 구원의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은사입니다. 그러나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것은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성이 많습니다. 왜냐
하면 자기 스스로 진리를 담보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경계하고 있는 궤변론자들의 구체적인 문제는 3절이 가리키고 있듯이 기독
교인의 경건생활을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그들은 "다른 교리를 가르치거나 우리 주 예
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경건한 생활 원칙을 따르지 않는 사
람"들입니다. 초기 기독교 안에서도 예배, 기도, 말씀읽기, 구제활동 등, 기독교인의 경
건한 생활 태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형식적인 경건생활은 또 다른 차원에서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거나 위
선적으로 만들 위험성이 없지 않습니다. 율법주의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질식시키듯이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모든 경건생활을 온갖 궤변으로 깔아뭉개고 그저 언어
의 논리 속에 파묻히는 것도 아주 위험합니다. 한쪽은 삶의 내용 없이 종교적 형식만
있으며, 다른 한쪽도 역시 삶의 내용은 없고 공허한 언어기술만 있습니다. 양자 모두에
게 삶의 내용이 없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오늘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부분은 특별히 후
자에 속한 것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이들은 사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쓸데없는 질문과
토론에만 미친 듯이 열중합니다."
궤변의 목표와 결과
경건생활을 무시하고 공소한 언어논리에 집착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발생하는
것은 시기, 다툼, 비방, 못된 의심, 그리고 분쟁입니다. 바울은 5절에서 이렇게 설명합
니다.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종교를 한낱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
에는 분쟁이 있게 마련입니다." 궤변은 근본적으로 상대방을 극복의 대상으로만 여긴
다는 점에서 다툼과 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분쟁이 아
니라 단순히 상대방을 꺾기 위한 분쟁에 불과합니다. 이 차이를 구분해내기는 쉽지 않
습니다. 진리를 위한 투쟁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한 투쟁인가, 하는 것 말입니다.
이것은 구별해낼 수 있는 기준은 이들의 투쟁이 자신들의 이득을 위한 것인가 아닌가
에 달려 있습니다.
말을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들을 판단할 때도 역시 이것이 기준입니다. 우리가 경험
하는 우리의 사법구조는 그것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를 단지 경제적 이득
의 수단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물론 모든 이들이 그렇지는 않겠지요. 이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 자기에게 불이익이 오더라도 투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7,80년대 시국
사범의 변론을 맡은 변호사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훨씬 많은 법조인들은 순전히 자
기의 이익만을 기준으로 말의 성찬을 벌이고 있습니다. 대기업의 고문 변호사가 기업
총수의 불법 상속을 법적으로 도와주는 일이나, 조금 거슬러 올라가서 박정희 전대통
령이 주도한 유신헌법을 작성한 헌법학자들의 행위는 전형적인 이기주의에 의한 행위
였습니다. 말과 글은 세련되었지만 그것이 결국은 자기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
서 궤변입니다.
어떤 점에서 말을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들 중에 목사가 대표적일 것입니다. 흡사
하늘의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을 것처럼 온갖 언어와 개념을 펼칩니다. 부끄럽지
만 이런 설교 중에서 상당한 부분이 자기의 이익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런 설교에 익
숙한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자기의 이익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데 길이 들었습니다. 우
리가 '기복신앙'이라고 일컫는 현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종교 생활을 거의 세속적인 차
원에서 복을 받는 것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이것은 곧 종교이기주의입니다. 이런 신앙
생활은 깊어지면 질수록 분쟁의 골만 깊게 만듭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전무할 정
도로 빠르게 성장한 한국기독교가 마찬가지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분열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행복의 조건을 넘어서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경건생활이 유익한 결과를 내려면 기본적인 삶에 대한 직
관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갖추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아무리 열정적으로 경건생
활에 심취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무익하거나, 더 나아가서 해롭습니다. 그 삶에
대한 직관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
람에게는 종교가 크게 유익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
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6,7절). 이런 말은 굳이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더
라도 인간의 삶을 정직하게 들어야볼 줄 아는 사람에게는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습니
다. 탈무드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 세상에 나오는 어
린 생명은 두 주먹을 움켜잡지만, 죽는 사람은 손바닥이 보이도록 편다고 합니다. 무언
가를 잡아보겠다고 세상에 나왔지만 그 어떤 영웅호걸도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가르침
이겠지요.
더 나아가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
하시오."(8절). 이게 말이 될까요? 오늘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조건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입니다. 작은 것에서 만족하고 행복을 발견할 줄 모르는 사
람은 아무리 큰 것을 얻게 된다고 하더라도 만족할 줄도 모르고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소위 쾌락주의자의 원조라고 일컬어지는 에피큐로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그만 것
에 만족할 줄 모르는 자는 아무 것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나에게 보리 케이크와 한 잔
의 물을 준다고 하면 나는 제우스와 행복을 위해 경쟁해도 좋다." 이게 바로 인간입니
다. 남보다 많은 것을 갖고도 부족하다고,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고, 상대적으로
빈곤하면서도 만족하다고,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가치관의 차이라고 봅니다. 자기의 삶을 어디에 놓고 있
는가에 대한 판단의 차이 말입니다. 예컨대 장애아를 가진 가정에서는 그 아이가 정상
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행복할 것처럼 생각하고 살지만, 정상아를 가진 가정에서는 자
기 아이가 남보다 훨씬 공부를 잘해야 행복할 것처럼 생각하고 삽니다. 끝없이 많고 좋
은 것만을 따라가는 한에서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런 욕망을 바울은 구체적으로 돈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부자가 되려
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
렁텅이에 떨어진다고 말입니다. 돈을 따라 다니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서 결국 격
심한 고통을 겪은 이들이 있다고 증언합니다(9,10절). 지금이나 그때나 인간이 돈에 대
한 애착은 여전했나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돈 자체를 악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도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했으며, 예수도 하나님과 돈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
고 말씀했습니다. 실제로 돈이 있어야 신학교도 운영하고 선교도 하고 구제활동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돈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다만 오늘처럼 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이비 메시아니즘이 죄이며 악의 뿌리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
기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과 존재의 빛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입니
다. 당연히 기독교인들은 이런 욕망을 통한 행복의 조건을 넘어서 살아가는 이들입니
다. 흡사 스토아 철학자들처럼 바울이 언급한 삶의 지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런 삶의 지혜는 그렇게 유별난 것은 아닙니다. 좀 생각이 있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런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헬라의 많은 철학자들이나 중세기의 탁발수도승, 또는 동양
의 많은 스승들이 실제로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만족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무소유'를
제창한 법정이나 틱낫한 같은 이들, 요즘 기독교 안에 있는 많은 공동체들이 그런 식의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전우익 선생은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책을 쓰셨더군
요. 이런 책의 내용은 욕망을 채우는 것에서 인간이 행복할 수 없다는 가르침이겠지요.
그런데 이런 삶의 지혜는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도 실제로 따라가기는 힘듭니
다. 우리 개인의 욕망이 그렇게 치열할 탓이기도 하고, 현대사회 구조가 그것을 부추기
는 탓이기도 하지만, 어쨌든지 우리가 극복하기 힘든 그 소유의 욕망이 우리를 불행하
게 만들고 있습니다.
경건생활의 유익함으로
이런 직관과 인식이 있어야만 경건생활이 크게 유익하다는 바울의 이 가르침은 무
슨 의미일까요? 기독교 신앙은 위에서 언급한 그런 일반적인 삶의 지혜를 넘어서 시작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 기도, 찬송, 헌금, 구제 등등, 이런 경건한 종교생활은 그것 자
체로 사람들에게 크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이기심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오용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속칭 남묘호랑개교라고 일컬어지는 일련종정의 신자들은
자기들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주문을 반복적으로 암송합니다. 그들이 경건생활에
쏟는 그 열정은 철저하게 자기의 이익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느 종교에나 있는 이런 경
건생활을 기독교가 그대로 유지한다면 다른 종교에 비해서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
다. 기독교의 신앙생활은 보편적인 삶의 지혜를 전제하고, 즉 그것을 넘어서서 시작된
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당한 경우에 기독교인들이 이런 삶의 지혜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신
앙생활에만 열정을 바치고 있습니다. 삶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과 성찰 없이 기독교라
는 종교현상에만 집중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종교적 열정은 자
기 몸을 불사를 정도입니다. 저와 같은 테니스 동우회에서 활동하는 어떤 분의 아내가
기독교인인데, 거의 매일 교회에 나간다고 합니다. 승용차로 20분 이상 걸리는 거리의
교회인데도 매일 새벽마다 기도회에 참석하고, 금요일마다 철야기도회에 참석하는 등,
거의 모든 삶을 교회에 쏟고 있습니다. 그런 정열은 다른 사람이 판단할 문제는 아닙니
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보다 더 철저하게 종교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데 대개 이런 패턴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자들 대부분은 삶의 지혜와 전혀 상관
없이 살아간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가족들과의 관계나 이웃과의 관계가 왜곡되기
일수이고, 삶의 보편적인 현실들에 대한 깊은 성찰도 없으며, 때로는 현실로부터 분리
되어 버립니다. 이런 상태에서 경건생활의 농도가 깊어지니까 어쩔 수 없이 위선적인
상태에 빠지거나 아니면 정신분열적인 증세를 보이게 됩니다.
제 주변에 있는 신자들을 보면서 왜 그들에게 삶에 대한 진정성이 부족할까, 하는
궁금증이 많았습니다. 평생 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신앙적으로 자기를 돌아보는 게 아
니라 세상사는 요령만 터득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결국 그들의 경우에 경건의 모양은
많이 갖추었지만 경건의 능력이 부족한 이유는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
는" 지혜 없이 무조건 경건생활에 치우쳤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인문학적 사유
나는 여기서 삶의 지혜를 인문학적 사유, 또는 철학적 사유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는 복음을 삶의 지혜인 인문학적 바탕에서 선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인식과 성찰이 있을 때만 그 사람에게 영
적인 세계가 열리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경건생활과 철학적 사유의 관계를 음악경험과 연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음악
은 음악 자체가 있고 그 이론이 있습니다. 음악적 재능을 아무리 많이 갖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음악을 분석하고 체계화할 만한 이론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완전한 음악가가
될 수 없습니다. 거꾸로 음악대학에서 아무리 음악에 대한 이론 공부를 철저하게 했다
고 하더라고 음악 자체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다면 그것은 순식간에 궤변으로 변질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양측 모두 자기 이익을 위해서 음악이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겠지요.
이런 점에서 이제 설교의 지평도 분명히 달라져야 합니다. 이런 문제는 신학교에서
다루어야 하겠지만, 설교가 인문학적 토대에서 전달되지 않는다면 자기 성찰을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며칠 전 기독교 방송에서 대
구 서문교회 아무개 목사의 설교를 청취했습니다. 성탄절에 관한 본문을 읽은 다음에
'성탄절의 의미'(?)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습니다. 성서에 대한 해석은 전혀 없이 첫째,
이웃과 함께 하는 성탄절을!, 둘째, 조용한 성탄절을!, 셋째, ... 등등, 이런 작은 주제를
나열하는 것으로 설교를 이끌어갔습니다. 굳이 그런 투의 설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
웃의 의미가 무엇인지, 조용하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인문학적 토대에서 해명해나
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티브이 광고의 카피처럼 남편에게 사랑 받으려면 무슨무슨 화
장품을 써야 한다는 식입니다. 물론 일반 신자들의 입장에서도 각성해야 할 부분이 참
으로 많습니다. 자기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만을 추종하는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한 교회의 인문학적 토대는 요원하기만 합니다.
영적 체험을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은 단지 종교적 심리작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
의 지혜라 할 철학적, 인문학적 사유에 근거해서 그것을 뛰어넘는 영적 리얼리티를 확
보하려는 우리의 정신적 노력입니다. 그렇다고 인문학적 지식이 그것을 무조건 담보해
준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영성에 이르는 다리 역할을 해줄 것입니다. 아는 것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경건생활에 힘을 쏟는 우리 기독교인의 경우에 우리가 삶
을 이해하는 것만큼 영적 현실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2003. 12.28.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