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5.18. (고후 13:11-13)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삼위일체라는 말은 들었지만 ‘삼위일체 주일’이라는 말은 별로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며, 들어봤다 하더라도 조금 생소할 겁니다. 교회가 이런 교회력을 지키는 이유는 신자들의 신앙이 한쪽으로 편중되지 않고 균형을 이룸으로써 건강을 유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도 자기의 입맛에 맞는 것만 편식하면 건강을 잃습니다. 맛이 없어도 골고루 먹는 게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독교 신앙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나 성화같은 가르침이 맛이 있다고 해서 늘 그런 데만 영적인 촉수를 맞추고 산다면 그는 신앙의 건강을 잃을 겁니다. 삼위일체 주일이라는 교회력을 지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감칠맛은 아니지만 우리의 신앙에 필수 영양소인 삼위일체를 신자들에게 먹이려는 것입니다. 그 깊은 맛을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하게 말해서 성서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이 없습니다. 구약은 물론이고, 신약에도 없습니다. 그것은 성서가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서 발생한 개념입니다. 성서에도 없는 말을 무엇 때문에 만들었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실 분들도 있을 겁니다. 더구나 수학의 미분이나 적분처럼 이해하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별로 실용적이지도 않는 개념을 말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서가 하나님을 완전히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종말에 이르러서야 자신을 모두 계시하시는 분이기에 성서만으로 하나님을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서가 삼위일체를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없지만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발전할 수 있는 어떤 기초를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우리가 서신의 말씀으로 읽은 고린도후서 13:11-13절입니다.
본문주석
오늘 본문은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세 구절로 된 작별인사입니다. 첫 구절인 1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형제 여러분, 그러면 안녕히 계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며 내 권고를 귀담아들으십시오. 그리고 뜻을 같이하여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셔주실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우들에게 권고를 한 이유는 사람의 삶이 참으로 허약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사람은 중심을 잘 잡지 못합니다. 평생 동안 속상한 일에 파묻혀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제로 살림살이가 힘든 사람만이 아니라 그런대로 괜찮거나 썩 좋은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기의 마음이 드는 사람과 함께 살아도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된다고 권고합니다. 그 하나님에게 온전히 의존하고 살아야 한다는 권고입니다.
이어서 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인사를 보충합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거룩한 입맞춤은 고린도교회에서 행한 특별한 인사 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서양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들이 만났을 때 포옹을 하면서 볼을 맞댑니다. 아주 가까운 사람들은 이마나 뺨에 입을 맞추기도 합니다. 이런 인사법이 초기 기독교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졌는지는 그렇게 확실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13절이 아주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이 13절이 앞의 11,12절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바울의 진심이 담긴 인사라는 점에서 서로 통합니다. 11절은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인사이며, 12절은 실제로 교우들끼리 나누는 인사이고, 이제 13절은 그 모든 인사를 초기 기독교의 독특한 신앙형식에 담은 인사입니다. 인사이며, 동시에 축복입니다. 요즘 우리가 드리는 예배 마지막 순서인 축복기도가 바로 이 구절을 근거로 합니다. 큄멜은 이 구절이 “역사적이고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적절한 표현 형식”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우리가 이 구절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여기에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볼까요?
첫째, 바울은 고린도교우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누리기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사셨던 바로 그 역사적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분의 은총(카리스)은 바로 구원을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 구원을 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의 구원이 오직 은총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둘째, 바울은 “하느님의 사랑”을 누리라고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고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그분이 인간을 향한 모든 행위는 바로 그의 사랑(아가페)을 가리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받아야 할 가장 큰 축복입니다.
셋째, 바울은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누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지금 하나님이 우리와 영적으로 소통하는 영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도 경험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도 알지 못합니다. 성령과의 친교(코이노니아)야말로 오늘 신자들이 생명의 역동성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령 충만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해서 바울이 이 구절에서 구체적으로 삼위일체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바울 시대에는 삼위일체 개념이 무르익지 않았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바울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이 구절에서 거론된 세 위격이라기보다는 그 위격의 속성이라고 보는 게 학자들의 일반적인 주장입니다. 카리스, 아가페, 코이노니아가 바로 바울의 관심 사항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 같은 신학자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활동하고, 성령의 친교가 나타나고 전해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 재미있는 해석이면서 적절한 해석입니다.
비록 바울이 삼위일체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세 위격이 신적으로 동질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삼위일체 신앙의 문을 연 셈입니다. 우연한 일이었지만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기독교 역사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어렴풋했던 삼위일체 개념이 이제 역사 과정에서 명료해졌습니다. 이런 설명이 약간 이상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는 분인데,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명료해지냐고 말입니다.
다른 것과 비교해서 생각해보십시오. 다윈이 진화론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다윈이 그것을 <종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증명해내기 전에도 이미 다른 학자들이 어느 정도 그런 생물학적 원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양자역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그 앞에 이에 관해서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학자들은 많았습니다. 그런 학자들에 의해서 과학의 세계가 점점 더 열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세계도 그런 신학자들에 의해서 점점 더 열립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과학자들이 새로운 과학의 세계를 연다고 해서 물리의 세계가 변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찬가지로 신학자들에 의해서 하나님 개념이 심층적으로 드러난다 하더라도 하나님 자체가 변하는 건 아닙니다. 바울은 이제 삼위일체로 들어서는 입구를 자기도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한 채 들어선 것입니다. 그 뒤로 기독교는 천천히 하나님을 삼위일체 개념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신비
도대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영, 이렇게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다, 하고 말할 수 있겠지요. 말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런 하나님 개념이 우리의 머리에 잡히지는 않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여기에 책상이 있습니다. 이것이 셋이면서 하나일 수는 없습니다. 정용섭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셋이면서 하나일 수는 없습니다. 쉬운 설명으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정용섭이라는 사람은 하나지만 교회에서는 목사이고, 집에서는 아버지이고, 신학대학에서는 교수로 불리니까 셋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설명은 삼위일체의 하나님과는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이런 예에서 정용섭이라는 인격은 어디서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나, 집에서나, 학교에서 저는 그대로 저이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세 위격이 이렇게 동일한 게 아니라 구별됩니다. 예수님의 위격과 하나님의 위격이, 그리고 성령의 위격이 구별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기도드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게 바로 위격의 구별입니다. 만약 그런 위격이 동일하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기도드린, 아주 이상한 현상이 됩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문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에서 위격은 구별되지만 본질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존재가 도대체 이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이런 존재를 이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물을 그런 예로 들을 수 있을까요? 물이 얼면 얼음이 되고 증발하면 공기가 되니까, 형태만 다르지 본질이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그럴듯한 예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은 액체로 그냥 그렇게 존재할 뿐이고, 산소와 수소는 기체의 형태로, 얼음은 고체의 형태로 존재할 뿐입니다. 이 셋 사이에는 내면적으로 서로 영향을 끼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삼위일체에서 본질이 동일하다는 것은 각각의 위격이 서로 의존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시고 완성하실 하나님은 단독적으로 그런 일을 행하시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존적입니다. 물론 성령에게도 의존적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역사적 예수님도 그 구원 사역을 단독으로가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에게 의존적으로 행하십니다. 물론 성령에게도 의존적이십니다. 생명의 영인 성령도 창조자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님에게 의존적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이 동일하기 때문에 이렇게 위격이 구별되면서 동시에 의존적입니다. 이런 존재를 우리는 이 땅에서 실증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습니다. 위격이 셋으로 구별되지만 동일한 본질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 개념은 하나님의 존재신비입니다.
참 인간, 참 하나님
존재신비라고 해서 삼위일체론이 명백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서 신비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10년 전에 여러분은 각각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10년 후에 이렇게 샘터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리라는 걸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컴퓨터로 계산해내도 그런 대답을 얻을 수 없을 정도로 역사는 신비로운 겁니다. 꽃나무 한 그루도 역시 그런 아득한 역사를 안고 있어서 신비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며 완성하실 하나님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아직 우리에게 다 알려지지 않고 조금씩 열어주시는 그 계시를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인식의 매우 중요한 역사적 계기가 바로 삼위일체론입니다.
저는 앞에서 하나님의 존재신비인 삼위일체론의 단초가 오늘 본문인 고후 13:13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런 구절을 출발점으로 해서 4세기에 열린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를 거치면서 교회 역사에서 삼위일체가 정식 도그마로 자리 잡게 된 근본적인 사유의 배경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필요합니다. 지금까지의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신학 강연처럼 들렸을 텐데, 이 대목은 다행히 설교로 들지 모르겠군요. 그 배경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질문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예수가 하나님이냐, 인간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예수님을 무조건 하나님으로 믿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교주를 무조건 신성시하는 광신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는 가현설을 이단으로 배격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에비온주의도 이단으로 배격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을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vere homo, vere Deus)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요? 반인반신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 온전한 신이 어떻게 한 인격체 안에서 가능한가요? 저는 이것을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여러분들에게 전할 뿐입니다. 그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저렇게 믿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 나라가 현재한다는 사실을 목도했습니다. 공생애에 일어난 사건과 십자가, 특별히 부활 현현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에게 현존한다는 사실을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와 하나님의 일치에 대한 경험은 사실 ‘불립문자’입니다. 하나님의 행위를 말과 문자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시의 개념으로 비슷하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호모 우시오스)을 이루셨다고 말입니다. 이런 신앙이 기초가 되어 삼위일체론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인식의 이런 긴 역사에서 한 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후손들에게는 하나님이 어떻게 더 계시하실는지 참으로 기대가 됩니다. 다만 오늘 이 시간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난 2천년의 긴 기독교 역사에서 핵심적인 하나님 인식이었던 삼위일체의 신앙을 바르게 알고 믿고 변증하는 것입니다. 이 뒤의 역사는 우리 후손들의 책임입니다. 2천 년 전 고린도교우들을 향한 바울의 축원을 다시 여러분들에게 전해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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