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사 6:1-8, 삼위일체, 성령강림후 첫째 주일, 2015년 5월31일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지난 2천 년 기독교 미사나 예배에서 ‘상투스’(거룩하다)라는 찬송보다 더 자주 불린 찬송은 없을 겁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 순서에도 공동기도 후에 ‘거룩 거룩 거룩하시다 온 누리의 주 하나님’이라는 노랫말의 ‘거룩 찬송’이 나옵니다. 예배의 본질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죄선포 이후에 부르는 ‘영광 찬송’도 이 거룩 찬송과 연결됩니다. 우리가 영광을 바칠 대상은 거룩하신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찬송을 들으면 ‘이게 뭐지?’ 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거룩 찬송과 영광 찬송을 부르는 기독교인들의 속마음도 실제로는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너무 현란한 세상에 우리의 영혼이 단단히 묶여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이 정말 행복할까요?
저는 오늘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성경의 한 대목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소위 ‘이사야의 소명사건’이라고 불리는 사 6:1-8절 말씀입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기는 기원전 8세기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는데, 그 소명 장면이 특이합니다. 1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
이사야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것으로 보입니다. 위 구절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두 가지로 묘사되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층계의 보좌는 당시 왕들이 앉던 자리입니다. 밑에 늘어선 문무백관들은 감히 머리를 쳐들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높은 보좌에 앉아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존엄에 대한 문학적 묘사입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다는 말도 역시 하나님의 존엄이 성전에 가득하다는 사실에 대한 문학적 수사입니다. 이사야가 실제로는 아무 것도 본 것이 없으면서 문학적으로만 그럴듯하게 말한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의 하나님 경험은 분명했습니다. 다만 그것은 인간의 언어와 문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서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 경험에 대한 이사야의 또 다른 이야기가 2절에도 나옵니다. 1절은 하나님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2절은 스랍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스랍의 생김새가 특이합니다. 여섯 개의 날개가 달렸다고 합니다. 날개 둘로는 자기 얼굴을 가렸고, 다른 둘로는 발을 가렸고, 둘로는 날았습니다. 사 14:29, 30:6, 민 21:6, 신 8:15절에도 스랍이 나오는데, 우리말 성경은 그것을 ‘불뱀’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스랍들은 날개 달린 뱀, 또는 사람 얼굴에 뱀의 몸과 새의 날개가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의 역할은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본문에서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 머리에 그려질 겁니다. 이사야는 지금 어둠이 깊은 밤 아무도 없는 성전에 들어왔습니다. 기도하러 왔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의 길을 갈 건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을까요? 성전 한쪽에는 번제 단에서 불씨로 사용되는 숯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불씨는 필수였습니다. 더구나 동물을 불에 태워서 제사를 드리는 성전에서는 더 없이 중요했습니다. 숯불의 불빛이 성전 안의 여러 기물에 반사되어 날아다니는 듯이 보였을 겁니다. 숯불 자체에서 나오는 냄새만이 아니라 번제드릴 때 탄 동물의 냄새도 남아 있었을 겁니다. 이런 성전에 혼자 들어가 앉아 있으면 뭔가 환상적인 경험을 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이사야가 어디 보통 사람입니까. 영적 감수성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시인이기도 하고, 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평소에 하나님의 존재 신비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가 지금 거대한 성전에 들어가 앉아 있습니다. 그의 눈에 층계 높은 곳의 보좌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좌에 앉아 있는 이는 존엄한 존재였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존엄이 옷자락처럼 성전에 가득한 것으로, 또한 불꽃같은 스랍들이 하나님을 지키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가시나무 불길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것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제가 화가라면 이런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거룩- 삶의 깊이
이사야의 환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스랍들의 합창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합창은 성전 제사에서 실제로 들을 수 있는 것이었겠지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목동들이 천사들의 합창 소리를 들은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본문 3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 구절을 외워두십시오.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얼마나 많은 신학자와 영성가와 기독교 음악가와 예술가들이 이 말씀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을지 상상이 됩니다. 스랍들의 이런 합창소리는 기자들이 와서 녹음하거나 그 장면을 녹화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건 이사야의 영적 시각으로만 경험이 가능한 겁니다. 실제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거를 이사야가 꾸며서 말한 것뿐이라고 주장할 분들은 없겠지요. 자기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사실 궁극적인 것은 다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 샤갈의 <노아의 방주>라는 미술품이 있다고 합시다.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작품을 유치원 아이들의 그림쯤으로 여길 겁니다. 샤갈의 영적 깊이와 안목이 저 그림에 은폐되어 있어서 볼 수 있는 사람의 눈에만 보입니다. 이사야는 샤갈과 같은 안목으로 거룩하다는 스랍들의 합창을 들었습니다. 거룩하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일반적으로 거룩하다는 말은 속되다는 말의 반대입니다. 속되다는 건 이 세상에서 이전투구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가리킵니다. 남을 지배하고, 속이고, 돈만 아는 것을 속되다고 말합니다. 이에 반해서 거룩하다는 것은 이런 속된 것이 개입하지 못하는 삶의 방식을 가리킵니다. 이기심이 아니라 이타심,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 그런 것들입니다. 자기 삶을 완전히 희생하면서 고귀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우리는 성자라고 부릅니다. 여기서의 기준은 주로 윤리적 가치입니다. 이런 기준들이 귀한 것이기는 하지만 성서는 그런 윤리적 가치를 거룩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존재론적인 차원의 거룩을 말합니다. 인간이 하는 일은 그것이 윤리적으로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결혼하고, 돈 벌고, 자식을 키우고, 취미생활과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모든 일상도 그것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스랍들이 노래한 하나님의 거룩성은 그가 우리와 질적으로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를 전적 타자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예컨대 우리는 착한 사람이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이 벌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돈과 권력이 많은 사람이 행복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늘 그런 것도 아닙니다. 더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원천과 그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물리학과 생물학 등의 학문을 통해서 거기에 가까이 가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으니까 대략 50년 정도 신앙생활을 한 셈입니다. 목사가 된지도 35년이 지났습니다. 설교를 전업으로 했고, 신학공부도 열심히 해서 신학자 행세도 하고, 신학책을 쓰기도 하고 번역도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좀더 많이 아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질 뿐입니다. 이게 여전히 설교자로서 살고 있는 저의 영적인 고민입니다. 예를 들어 창 1:1절 말씀만 해도 그렇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서 말하는 태초가 언제인지를 생각하면 까마득할 뿐입니다. 창조했다는 말은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즉 무에서 무언가를 존재하게 했다는 뜻인데,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리학과 생물학 공부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창 1:1절 한 구절 앞에서도 당황하고 있으니 성경 전체 앞에서는 말문이 아예 막히는 겁니다. 이사야는 바로 그런 분을 가리켜 거룩하다고 말한 겁니다.
태초나 창조 등은 거시적인 차원이니까 그렇다 치고, 우리의 일상은 어떨까요? 좀더 생생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교회의 일상에 한정해서 생각해봅시다. 오늘 우리는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에 우리 모두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난다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어떤 이는 병원에 갈수도 있고, 어떤 이는 마음의 병이 들어서 교회를 쉴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사업이 너무 번창하거나 친구의 말을 듣고 예배에 관심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며칠 후에 당장 엄청난 해일이나 지진이 일어나 한반도가 바다에 잠긴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예배에 참여한 어떤 한 교우의 사연 역시 아득할 정도로 특별합니다. 그런 아득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함께 모였다는 사실은 더 아득한 일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모든 일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판넨베르크의 표현을 빌리면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인 하나님을 가리켜 거룩하다고 말한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찬송은 삶의 깊이와 신비를 뚫어보는 사람만 부를 수 있습니다. 저는 성서의 이런 진술을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저는 그런 마음으로 ‘거룩 찬송’을 불렀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뜻의 다른 말은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이 그분의 본질을 가리킨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섭리와 통치 방식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스랍들은 거룩 찬송에 이어서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는 말에 동의하십니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영광과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답답한 일이 많습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나는 아이들도 많고, 나중에 장애를 입게 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요즘 수요 성경공부 시간에 <욥기>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기가 당한 그 재앙을 견딜 수 없어서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자식들이 죽고, 재산을 다 잃었으며, 극심한 피부병에 걸려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어야만 했습니다. 친구들은 그를 향해서 회개하라고, 잠시 징계를 받는 것에 불과하니 참으라고 말합니다. 욥은 자신의 운명을 친구들의 관점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욥의 기구한 운명은 오늘도 반복됩니다. 이런 일을 직접 당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다 늙어 죽어야 한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모든 부귀영화는 한낱 바람이나 구름에 불과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는 온갖 욕심, 배신, 미움, 폭력이 난무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도 그런 속성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는, 우리 자신의 삶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는 찬양을 부를 수 있을까요?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여러분들은 그런 영광을 보고 있으며, 그래서 오늘 본문의 이사야처럼 영혼의 깊이에서 그 영광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으신가요?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런 말을 상투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입으로는 늘 ‘하나님께 영광을!’이라고 외치지만 실제로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것을 예수 믿으면 만사 오케이라는 승리주의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인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서 벌어지는 모든 왜곡과 모순을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다는 말은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말과 직결됩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 그래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눈으로 볼 때만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그런 눈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통과 죽음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여러분들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영광 운운은 세상의 악과 고통을 너무 안이하게 여기는 태도라고 보십니까?
이런 질문에 지금 제가 속 시원한 대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가룟 유다와 예수님의 관계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겠습니다. 유다는 선생을 배신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체포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유다의 배신은 용서받기 어려운 악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도 파멸이자 재앙이고 저주입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그런 죽음을 피할 수 있는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겠으며, 십자가 위에 달렸을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절규했겠습니까. 배신과 십자가 죽음은 우리가 피해야 할 악이자 재앙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다의 배신과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통해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십시오. 죄와 죽음으로부터 인류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유다의 배신이 없었다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그렇다면 예수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며,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은총으로서의 구원 사건은 일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무슨 말인가요? 인류 역사에서 부분적으로는 악이 기승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가 압도하고 있습니다. 부분에서는 악이, 전체에서는 하나님이 승리합니다. 칼 바르트는 이것을 심포니 연주로 비유했습니다. 부분적으로 불협화음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완전한 작품이 되는 거라고 말입니다. 그런 영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본문의 스랍들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다는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그분의 세상 통치는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합니다. 우리 개개인의 운명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거룩하시다, 하고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살아있는 동안은 물론이고, 죽는 순간에도 역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랍들의 노래를 중얼거림으로라도 따라 부르고 싶습니다.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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