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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상호내주의 비밀 (요 17:20-26)

상호내주의 비밀

요한복음 17:20-26, 부활절 제7주, 5월12일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어리석은 질문을 먼저 드립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면서 사셨을까요? 당연히 기도하셨겠지요. 언제, 얼마나 자주,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하셨을까? 그건 우리가 잘 모릅니다. 예수님은 어떤 기도를 드리셨을까요? 그것에 대해서도 복음서는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예수님이 체포당하는 날 밤에 겟세마네 언덕에서 바친 기도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유언처럼 드리신 기도입니다. 그것도 그렇게 긴 내용은 아닙니다. 가능하면 십자가 죽음의 길을 피하고 싶지만 하나님 당신의 처분에 맡기겠다는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도 예수님이 체포당하기 직전에 드린 기도를 전합니다. 그 기도가 오늘 설교 본문이 속한 요 17장에 나옵니다. 이 기도를 드리고 예수님은 체포당하시고, 재판을 받으신 후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공관복음의 겟세마네 기도와 요한복음의 이 기도는 똑같은 순간에 드린 기도인데 내용은 완전히 다릅니다. 공관복음의 기도는 죽음 앞에서의 실존적 고뇌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라고 한다면, 요한복음의 기도는 제자들에게 대한 염려입니다. 요한복음만 이렇게 다른 내용의 기도문을 전하는 이유는 그들이 처한 상황이 특별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재림의 지연입니다. 재림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존속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들의 생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일시적이긴 했지만 신자들이 개인 재산을 포기하고 공동체 생활을 한 것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면 개인 재산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예수님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공관복음서가 기록되던 때에는 여전히 예수님에 대한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에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었지만 한 세대 후인 기원후 90년 이후에 기록된 요한복음 공동체의 시대에는 그런 기억이 잊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도 대부분 죽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합니까? 재림 지연의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게 없다면 신앙은 공허해지거나 무기력해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미 교회 안에서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그 뒤의 모든 신자들이 하나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확실하다면 재림의 지연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인 예수의 재림이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생명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어디서 대답을 찾아야 할까요? 요한복음 기자의 대답이 바로 오늘 우리의 대답입니다. 예수님과의 일치만이 재림 이전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생명 완성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걸 이론적으로는 아는 것과 실제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과의 일치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실제로 예수님과 하나가 된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얼마나 시급하고 진지한 질문인지 아십니까? 아니면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

본문 요 17:21a절은 이렇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 이런 표현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겁니다. 물론 대충은 압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 사실을 각각 ‘안에’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원칙적으로 예수님과 하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인간적인 실존 안에 계셨습니다. 세상에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짠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외롭습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은 이런 것을 다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그 창조를 고유한 방식으로 보존하시고, 결국 완성하실 겁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구별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무조건 똑같다면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게 기도를 드렸다는 말이 됩니다.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에게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22a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영광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독사’의 번역입니다. 사전적으로는 glory, splendor, grandeur, power, kingdom 등등의 뜻입니다. 성서가 사용하는 영광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만 나타나는 거룩한 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임재, 또는 하나님의 현현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구약성서는 그것을 ‘카봇’이라는 히브리어로 표현했습니다. 출 33:17-23절에는 모세와 하나님의 대화가 나옵니다. 모세는 율법을 받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소명을 받은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물은 것과 비슷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는 말씀과 함께 모세를 반석 틈에 숨기시고 영광 가운데 지나가셨다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등만 봐야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누구도 궁극의 생명을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가로와 세로 1km로 된, 1만개의 퍼즐 조각으로 만들어진 퍼즐판 위를 기어가는 개미가 퍼즐 전체를 직접 볼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예수님에게 나타났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지요?


문제는 예수님에게 나타나는 영광이 실제로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무지개와 구름과 천둥 번개, 그리고 회오리바람을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현현을 그런 현상으로 묘사한 성경 구절들은 제법 됩니다. 고대인들은 그런 장엄한 자연현상을 하나님의 현현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경험은 요즘도 비슷합니다. 어젯밤 12시 넘어 마당에 나가 밤하늘의 별들을 보았습니다. 날씨가 맑아서 별을 보기에 좋았습니다. 우리 눈에는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태양에 가장 가까운 별도 최소 2광년이나 떨어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밤하늘의 모습은 수만, 수십만 년 전의 모습이지 현재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들과 이사야 같은 선지자는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고 노랬습니다. 대표적으로 시 19편의 첫 구절은 이렇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복음서 기자들도 예수님을 그런 방식으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두 군데만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입니다. 그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마 3:16,17). 다음은 변화산에서의 현상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가, 다시 빛난 구름이 임하면서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마 17:1절 이하). 이런 현상들은 자현현상에 대한 고대인들의 독특한 경험입니다. 오늘 우리는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임재나 현현을, 즉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서 기자는 무엇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 운운한 것일까요?

 

앎의 깊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 대답입니다. 십자가를 먼저 보십시오. 그것은 가장 끔찍한 사건입니다. 아무도 십자가로 죽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도 그 잔을 물리칠 수 있으면 물리쳐달라고 기도했겠습니까. 십자가는 역설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끔찍한 운명이 십자가 처형이지만, 그것은 곧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막연해서 믿기 힘들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래서 아무런 감격도 없으신가요? 그렇다면 불행입니다. 이는 마치 세계에서 가장 값진 보석을 앞에 두고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사람은 계속해서 다른 보석을 찾아다니겠지요.


다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실제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십자가 처형은 로마 정권에 무력으로 반역을 시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사형제도였습니다. 당시에 그것은 수치요 저주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저주받은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 겁니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자신을 완전히 맡겼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를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또는 로마법을 준수해서 로마 제국의 정직한 시민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로마법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하나님 나라에만 집중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종교법이나 국법을 지키는 게 아니라 온전히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위험에 처하는 일이 있어도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나서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와 정치의 허위의식을 꿰뚫어보신 겁니다. 이렇게 사람을 살리는 일에만 전적으로 매달린 예수님을 당시 유대교와 로마 제국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로부터 멈추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계속 외쳤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할지 모른다는 위협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고,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리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류 구원의 드라마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제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달게 한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왜 십자가의 죽음이어야만 하는지요? 하나님께서 창조의 능력으로 단번에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창조의 원리를 해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죽어야 할 인간의 운명을 초능력적으로 바꾸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와 죽음이라는 숙명적인 실존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창조원리를, 즉 인간의 실존을 해체하지 않은 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걸 예수님이 감당하셨고, 하나님은 그걸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3절과 26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게 왜 사랑인지를 한발 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해보십시오. 십자가는 요술방망이가 아닙니다. 악령 영화에서 보듯이 악령을 제압할 수 있는 묵주의 십자가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핵심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죽음의 자리로 하나님의 아들이, 즉 하나님이 내려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혼자 죽는 게 아닙니다. 죽음의 무게를 혼자서 감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곳에 이미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독과 허무의 끝자락에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니 그 어떤 상황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루터는 예수님이 계신 곳이라면 지옥이라도 선택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이 말하는 것은 다음의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할 인간 운명이 더 이상 절망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과 기독교인의 신비로운 관계를 가리키는 상호내주의 비밀입니다.


여기서 아는 게 중요합니다. 안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25절과 26절에서 안다는 뜻의 헬라어 단어 기노스코가 약간 씩 변형되어서 반복해서 나옵니다. 마지막절인 26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십자가가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을 따라가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못 보는 신출귀몰한 사건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고 그 구원의 능력을 아는 게 핵심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실제로 알고 계신지요? 안타깝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잘 알지도 못하고, ‘바빠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목사님들도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것만큼의 깊이에서 예수님과의 상호내주라는 신앙경험이 주어질 것입니다.

요한복음 17: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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