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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6)

새 하늘과 새 땅

요한계시록 21:1-6, 부활절 제5주, 4월28일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 있는 행성입니다. 태양이라는 항성은 가장 가깝게 있는 수성부터 시작해서 가장 멀리 있는 해왕성까지 8개의 행성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십년 전쯤만 하더라도 해왕성보다 더 바깥의 궤도를 도는 명왕성도 행성에 속했었습니다. 우주과학자들이 연구 끝에 지금은 명왕성을 행성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지구는 약간 기울어진 채로 태양에 세 번째로 가까운 궤도를 돌고 있습니다.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의 나이는 대략 45억년입니다. 까마득한 세월입니다. 앞으로 45억년 정도 세월이 흐르면 태양이 죽습니다. 태양이 죽기 전에 백색 거성으로 부풀어 올라서 주변의 모든 행성과 혜성 등, 태양계의 모든 것들을 집어삼킵니다. 지구도 없어집니다. 그때가 되면 인류의 후손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때를 대비해서 지구와 환경이 비슷한 행성을 찾으려고 우주과학자들이 우주를 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행성이 발견된다고 해도 거기까지 이주할 수 있는 가능성은 별로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빛의 속도를 내는 비행선을 만들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지 지구가 포함된 태양계의 모든 행성들, 그리고 우주의 모든 별들은 다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우주물리학에 근거해서 이것을 설명할 자신은 없습니다. 설교 시간에 그걸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서가 이 세상, 이 우주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설명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은 세상을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처음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새 세상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여기에 나오는 하늘, 땅, 바다는 우주 전체를 가리킵니다. 성서시대 사람들은 세상을 이렇게 세 범주로 생각했습니다. 창세기의 창조 전승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빛을 처음으로 만드신 후에 두 번째로는 하늘을, 세 번째로는 땅과 바다를 만드셨습니다. 세상을 세 영역으로 만드신 겁니다. 그 다음에는 그 세 영역에 사는 생명체를 만드셨습니다. 요한계시록 기자가 말하는 하늘과 땅과 바다는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전체를 가리킵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와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이 우주, 즉 세상의 시작과 마지막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되고 있습니다.


도대체 요한은 무엇을 본 것일까요? 실제로 뭔가를 본 것일까요? 아니면 환상을 본 것일까요? 꿈을 꾼 것일까요? 요한계시록은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독특한 책입니다. 신학 용어로 ‘묵시문학’이라고 합니다. 묵시문학은 극단적인 상징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는 고대 유대인들의 글쓰기 방식입니다. 구약의 에스겔, 다니엘, 이사야 등에 그런 글들이 나옵니다. 신약에는 요한계시록과 공관복음의 일부분입니다. 특징은 초현실적인 상징이 많이 나온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늘 보좌, 일곱 인, 네 생물, 구원받은 이의 숫자 144,000, 악마의 숫자 666 등등의 상징 언어가 많이 나옵니다. 상징인 탓에 종종 오해되거나 왜곡되기도 합니다. 기독교 계통의 사이비 소종파들이 대개 요한계시록을 아전인수로 해석합니다. 144,000이라는 숫자를 자기들 종파에 속한 사람들로 주장하고, 또 666을 상품의 바코드라고 주장합니다. 어리석은 해석들입니다.


우선 고대 유대인들은 왜 묵시문학적인 방식으로 글을 썼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묵시문학은 그들의 혹독한 역사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결정적으로는 바벨론 포로 사건입니다. 바벨론 포로 사건은 유대인들의 신앙을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지켜주신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게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 등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으로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에 먼지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나라를 세워보고 싶었지만 바벨론이라는 제국은 너무 강하고, 너무 악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 의식에 휩싸였습니다. 왜 악한 바벨론이 승승장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이 망하는가? 이런 의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왜 악한 사람이 잘되기도 하고, 죄가 없는 사람이 고난을 당할까요?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계신 걸까요? 그분이 전능하신 걸까요? 사랑이 있는 분일까요? 세상일에 간섭하지 않는 건 아닐까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이 세상은 모순이라고 생각할 만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모순과 갈등을 겪어본 적이 없으신가? 이 세상은 왜 악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고 말입니다.


공포를 느낄만한, 그래서 하나님 신앙을 포기할만한 상황에서 고대 유대인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선포들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했는데, 그게 곧 묵시문학입니다. 이 묵시문학 계열에 속한 선지자들은 바벨론이라는 세상의 힘을 악한 세력으라고 단정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악한 세력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최후 승리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승리는 아직은 감춰져 있습니다. 그것은 비밀입니다. 그것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밝히면 천기누설입니다. 그래서 묵시문학 계열의 선지자들은 초현실적 내용과 극한의 상징 언어를 사용해서 글을 썼습니다. 그것을 읽어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것을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말씀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기자도 세상과 역사를 구약의 묵시문학과 같은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구약의 역사적 배경이 바벨론이라면, 요한계시록의 역사적 배경은 로마입니다. 요한계시록 기자가 볼 때 로마는 제2의 바벨론 제국이었습니다. 따라서 로마는 적그리스도였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자신들을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모든 신민들은 황제를 신으로 섬겨야만 했습니다. 일본의 황제도 신이고, 오늘 자본주의의 돈도 신입니다. 로마 황제들도 천차만별입니다. 형편없는 황제들도 있고, 괜찮은 황제들도 있었습니다. 형편없는 황제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기독교를 무자비하게 박해했습니다. 네로 황제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로마의 대화재에 대한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렸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황제들이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요한계시록 기자는 그런 박해가 극심할 때 살았던 인물이거나, 그런 박해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황제의 막강한 권력 앞에서 기독교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배교하든지 순교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배교자들이 속출했을 겁니다. 그걸 보고 있는 요한의 심정은 피눈물이 났겠지요. 그는 로마 제국과 황제는 곧 없어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처음 하늘도, 처음 땅도, 그리고 바다도 없어질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된다고 표현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묵시입니다.


요한이 본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세상일까? 그는 그 세상을 2절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는데, 남편을 맞는 신부처럼 아름답게 단장한 도시였습니다. 하늘 보좌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눈물, 사망, 애통, 아픔은 다 처음 것들입니다. 그것이 인간 삶의 실존입니다. 이 땅에서는 아무리 좋은 환경과 조건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이런 아픔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요한은 그런 것들이 모두 치유되는 새로운 세상을 묵시적 환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세상이 어떤 건지 느낌이 옵니까? 모든 고통과 슬픔과 아픔이 극복된 세상은 어떤 겁니까? 지금 눈물과 고통의 이유가 무언지를 먼저 보십시오. 연봉이 높은 직업이 없거나 돈벌이가 시원치 않아서 힘든 경우가 있을 겁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취업 자체가 어렵다고 합니다. 수십 장의 이력서를 내고 수십 번의 면접을 보면서도 취업하지 못한 젊은이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천적, 후천적 장애를 얻었거나 난치병에 걸린 경우는 그 고통이 더 심합니다. 실연을 당하거나 사별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의료 사고로 자식을 잃는 사람들도 있고, 테러로 억울한 생명을 잃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인생 자체가 고통, 슬픔, 아픔의 연속처럼 보입니다. 그게 다 해결된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일까요? 그런 세상은 비현실적입니다. 우리가 아는 세상에서는 병이 없으면 건강도 없습니다.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습니다. 배고픔을 모르면 배부름도 모릅니다. 고독을 모르면 사랑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세상을 경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것을 현실로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심한 정신장애를 앓거나 약물에 중독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다 지나갔다.’는 요한의 묵시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현실 도피적인 판타지입니까? 초현실적 몽상입니까?


앞에서 묵시문학의 글쓰기 방식이 상징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눈물이 없다는 것은 상징입니다. 병이 없다는 것도 상징입니다. 그것은 어떤 절대적인 세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암호이자 기호입니다. 요한이 이런 상징을 통해서 말하려는 핵심은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여기서 ‘새롭게 한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십시오. 그것을 개량한다거나 개혁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개량, 개혁도 필요하고 중요하긴 합니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정치 경제의 민주화는 개혁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중세기 가톨릭교회를 새롭게 한 것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런 개혁과 개량으로 세상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지지는 않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개신교회가 지금 다시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개혁적인 교회도 사람이 모였기에 문제가 발생하고, 그것이 반복되면서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교육 현장도 그렇고, 정치 현장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사람이 행하는 모든 새로움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복지 향상도 상대적인 것에 머뭅니다. 다른 사람보다 좀더 좋은 집에 살고, 품위 있는 차를 타고, 좀더 다양하게 취미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요한의 묵시는 전혀 다른 차원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근본이 달라지는 겁니다. 상대적인 생명이 아니라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가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이 멀게 느껴지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냥 예수님을 잘 믿으면 되지, 무슨 상대적인 생명과 절대적인 생명을 구분해서 보라는 말이냐, 하고 말입니다. 그런 분들은 안타깝지만 성경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분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건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구원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 구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기껏해야 여기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운명에서 일어난 결정적인 사건인 부활 생명을 얻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지금과 같은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게 아니라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 변화된 부활 생명이 곧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요한의 묵시가 가리키는 그 세상의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셨듯이 지금의 이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신다는 뜻입니다. 그게 창조의 완성인 부활 생명입니다.


이런 사실을 믿는 사람에게 필요한 영적인 태도는 ‘기다림’입니다. 만물이 새로워지는데 우리가 할 일은 기다림 말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뭔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긴 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봉사할 분들도 있어야 하겠지요. 당연합니다. 누가 인정하든지 않든지 상관없이 성령과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봉사할 일꾼들이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 곳곳에 필요합니다. 지금 저는 그것을 부인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일이 아무리 선해도 절대적인 생명 사건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일은 아무리 귀해도 상징에 불과합니다. 생명의 실체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합니다. 그분이 직접 행하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묵시를 마치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바울도 고린도전서를 끝내면서 ‘마라나타’, 즉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 16:22)라고 썼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저 깊은 중심에는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실 그 순간에 대한 강렬한 기다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겉으로 무기력해 보일지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가장 강력한 삶의 태도입니다. 그것은 삶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을 때만 가능합니다. 자기를 성취하는 것에 몰두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상황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제국 앞에서 순교를 불사했습니다. 지금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기다림으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그 약속에 대한 희망으로 여러분의 영혼이 충만하신가요?

요한계시록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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