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소유
(눅 12:13-2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예수님은 주로 비유로 제자들과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비유는 아주 간단한 내용이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비유는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것입니다. 크게 농사를 짓는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해에 밭의 소출이 풍성했다고 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사업을 해서 대박이 난 것입니다. 그동안 애쓴 보람이 결실을 맺은 겁니다. 기분이 흐뭇했겠지요. 그 사람만이 아니라 가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간사합니다. 소출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걸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문제로 걱정이 생겼습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17절) 우리가 이 부자였다면 어떤 해결책을 생각했을까요? 이 부자는 우리와 똑같이 곳간을 더 크게 짓고 그곳에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두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19절)
여러분은 이 부자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보기에 잘못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그 사람은 칭찬을 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람입니다. 성실하기도 하고 머리도 좋고, 또 운도 따랐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믿었는지 아닌지는 성경이 말하지 않지만 이 비유가 유대인을 대상으로 했다고 볼 때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겠지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출세하고 성공했으니 보기에도 좋습니다.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지 않은 것은 잘못일까요? 물론 그렇게 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사업이 잘못될 수도 있으니, 그때를 대비해야 하고, 앞으로 자식들이 독립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어느 정도 밑천도 장만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것마저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사람마저 비난하기 시작하면 이 세상에 비난받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느 모로 봐도 이 부자는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이 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절) 예수님의 비유는 이 부자를 악하다고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어리석다고 평가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 구절을 읽는 사람들은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옳은 말씀 같긴 한데 어딘가 불편합니다. 사람이 결국 죽을 테니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런 재산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미래를 준비하거나 풍족하게 사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라는 말씀일까요? 더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이 죽음을 무기로 사람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그런 뉘앙스로 설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업이 크게 잘 됐는데, 교회당 건축 헌금을 인색하게 냈다가 곧 병에 결려 죽었다는 예를 들기도 합니다.
이 비유의 마지막 구절인 2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곡간을 더 크게 짓겠다는 부자의 생각은 결국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것이 어리석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는다는 20절과 마찬가지로 21절도 불편하게 다가옵니다. 21절이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이 요구하는 삶의 원리와 완전히 대립됩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세속을 등진 수도자들 외에는 없을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해도 사실은 일단 재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는 재물을 쌓아두는 것과 하나님께 부요한 것이 대립되는 것처럼 말합니다. 이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요? 이 부자가 소출의 반은 하나님께 바치고 반은 곡간에 채웠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까요?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게 된 동기를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와서 유산 상속에 대해서 상담을 청했습니다. 이 사람 집에서는 형제들 사이에 유산 상속 문제로 다툼이 있었나 봅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재산 문제는 똑같이 예민합니다. 형제 사이에도 유산 분할 소송이 흔하게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속의 이해타산을 해결해주는 재판관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더 근본적인 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5절) 이어서 앞에서 설명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비유의 핵심은 바로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생명과 소유의 관계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소유 지향성
소유가 전혀 없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주 굶고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해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루를 살아가려고 해도 일용할 양식이 필요합니다. 가족이 함께 몸을 의탁할 집도 필요합니다. 사람이 늘 아침 이슬만 마시고, 구름을 바라보면서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소유가 늘 넉넉해야 행복하다는 고정관념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든 삶에서 소유 지향적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자본주의는 소유 지향적인 삶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시대정신입니다. 대한민국은 늘 세계에서 경제 수준이 10 몇 위라는 걸 자랑합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2020년에는 5위 안으로 진입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경제 부분만이 아니라 정치, 교육도 모두 이런 이념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이렇게 돌아가는 세상을 뭐라 할 자격이 우리 기독교에는 없습니다. 이런 시대정신을 기독교가 앞장서서 선전합니다.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축복해서 이렇게 잘 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폭식증 환자나 또는 충동구매 중독증에 걸린 사람과 비슷합니다. 무언가를 계속해서 늘려갈수록 불안 증세가 더 심해집니다. 이런 삶의 패턴은 복음이 아니라 바알 숭배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비현실적이어서 마음에 들지 않지만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할 규범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복음을 크게 오해하는 겁니다. 복음은 여러분을 일부러 골치 아프고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합니다. 이 말씀은 비현실적인 게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줍니다.
첫째로 이 말씀은 사람이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소유가 불가능한 이유는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주먹을 쥡니다. 세상에서 소유를 늘려보자는 생각입니다. 죽을 때는 손바닥을 폅니다. 결국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소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평생 소유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물론 완전한 무소유로 살아갈 수는 없겠지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일용할 양식도 필요하고, 최미생활을 위한 돈도 필요합니다. 그것 자체를 어리석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생명을 소유의 넉넉한 데서만 확인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의 삶은 그런 방식으로 소진되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모두 왕자와 공주처럼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실제의 생명은 가난합니다. 조금이라도 소유를 늘리는 경쟁에서 처질까, 늘 불안합니다.
지난 주간에 저희 집에 두 여동생 내외와 누님이 다니러 왔습니다. 바로 밑 매제가 공무원 은퇴하고 영어 유치원 기사로 일합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그 유치원의 월 원비가 100만원이라고 합니다. 그 아이들은 유치원이 끝난 뒤에 몇 군데 학원을 또 다닌다고 합니다. 그 젊은 어머니들도 그런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지만 동류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불안해서 어쩔 수 없이 따라갑니다. 각자 처해 있는 상황이 다르니까 이런 것을 무조건 매도하는 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경쟁력만을 절대 가치로 보는 신자유주의의 한 전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유의 넉넉한 데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신념입니다. 성서는 그런 삶을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그런 데서는 결국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게 별 거냐, 그런 식으로 삶의 토대를 탄탄하게 다지면서 교양도 쌓고, 남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예, 그것도 나름으로 일리가 있는 생각입니다. 믿는 사람들도 세상의 작동원리에서 완전하게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평범하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살아가는 것만 해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모르겠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성서가 말하는 생명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생명을 얻는 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과 일치해서 살아야 합니다.
둘째,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는 말씀은 생명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내가 말하고, 내가 먹고, 내가 돈을 벌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의 주인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생명은 소유를 늘리는 데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부요한 삶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삶은 무엇이며, 거꾸로 부요한 삶은 무엇일까요? 가장 간단한 대답은 교회에 잘 나와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교회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들어가는 일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부요하다는 것을 보장받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께 부요한 삶일까요? 이미 대답은 앞에서 주어졌습니다. 우선 소극적인 대답입니다. 소유의 넉넉함이나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데서 생명을 확인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적극적인 대답은 영적인 삶을 가리킵니다. 에릭 프롬의 책 <소유나, 존재냐>의 관점으로 말하면 소유 지향적인 삶이 아니라 존재 지향적 삶을 가리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부요한 삶을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셨습니다. 잘 알려진 까마귀와 백합화 이야기입니다. 까마귀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지만 하나님이 기르십니다. 까마귀보다 귀한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호하실지 알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염려해도 키를 키울 수도 없고, 생명을 연장할 수도 없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근심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염려와 근심이 쓸데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든 필요를 다 아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런 세상 사람들과 달리 “그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나머지 것은 하나님이 더하신다고 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 부요한 삶이라는 뜻입니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아무리 그래도 어느 정도 먹을 게 있어야 염려를 하지 않을 게 아니냐, 그런 소리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 하는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염려와 근심은 근본적으로 성서가 죄라고 말하는 자기연민입니다. 거기서 돌아서지 않으면 아무리 형편이 좋아져도 죽을 때까지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설교의 마지막 질문은 하나님께 부요한 사람들이 구해야 할 하나님 나라는 무엇일까요? 그 나라는 우리가 생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했지 만들어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종말론적인 생명의 나라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여기서 영생은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영생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소유를 늘리는 것에서 삶을 확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는 소유로 생명을 확인하는 삶을 강요하고, 또 그렇게 유혹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와 똑같습니다. 그냥 죽을 때까지 그럭저럭 그런 방식으로 살면서 대충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부요한 삶으로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시겠습니까? 더 늦기 전에, 더 늙기 전에 바르게 선택하십시오. (성령강림절 후 열째 주일, 8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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