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지옥
막 9:42~50, 창조절 넷째 주일, 2021년 9월26일
성경에는 자극적인 표현이 가끔 나옵니다. 그런 표현을 대할 때 내용은 들어오지 않고 마음 한편이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연자맷돌, 지옥, 구더기와 꺼지지 않는 불, 등등의 단어가 나옵니다. 이런 단어로 구성된 문장을 눈에 들어오는 대로만 읽으면 읽는 이의 영혼에 나쁜 영향을 줍니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집에서 쫓겨나 어두운 문밖에서 벌벌 떠는 심리와 비슷한 상태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연자맷돌의 운명
우선 첫 구절인 42절을 읽겠습니다. 이 구절은 마 18:6절과 눅 17:2절에도 나옵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연자맷돌은 나귀나 말 같은 가축을 이용해서 곡식을 가는 큰 맷돌입니다. 당시 유대 사람들이 사용하던 연자맷돌의 무게는 1톤가량이라고 합니다. 연자맷돌을 목에 달 수는 없고, 단다고 해도 바다에 던짐을 당하기 전에 이미 그 무게로 죽습니다. 이런 표현은 헤어나올 수 없는 처참한 운명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문학적 수사입니다.
처참한 운명에 떨어지는 사람의 잘못은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족하게 한다는 말은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σκανδαλίσῃ로 기본형은 우리가 보통 ‘스캔들’이라고 할 때 사용하는 σκάνδαλον입니다. 바울은 고전 1:23절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스칸달론)이라고 말입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종종 벌어집니다. 무식하고 폭력적인 사람만이 이런 일을 행하는 게 아닙니다. 학생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교수나 교사들도 많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교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들은 매일 실족할 겁니다. 실제로 그들은 일상생활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요즘은 많이 좋아졌지만, 휠체어를 타고 들어갈 수 없는 가게도 많습니다. 이런 실제적인 용무에서만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무시하는 행위도 결국은 실족하게 하는(스칸달리세) 것입니다.
여기서 ‘작은 자’가 누구냐, 하는 질문이 성경 해석자들 사이에서 이어졌습니다. 작은 자라는 단어에 “나를 믿는”이라는 표현이 포함된 걸 보면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는 건 분명합니다. 이 문장은 그리스도인을 무시하고 실제적인 피해를 주고 박해하는 세상 사람들을 향한 경고라고 볼 수도 있고, 또는 교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부자 그리스도인을 향한 경고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보든지 핵심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작은 자’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지는 운명보다 더 처참한 운명을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옥
이런 처참한 운명과 연관해서 세 가지 구체적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 세 가지 이야기도 예수께서 직접 발언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자극적입니다. 43절에는 ‘손’이 나옵니다. 손이 죄를 짓게 하면, 즉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면 손을 찍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45절에는 ‘발’이 나옵니다. 발이 죄를 짓게 하면, 즉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일에 참여하면 잘라버리라고 했습니다. 너무 끔찍한 표현입니다. 47절에는 ‘눈’이 나옵니다. 눈이 죄를 짓게 하면, 즉 눈이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면 빼어버리라는 겁니다. 손이나 발이나 눈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자신의 생명 전체를 잃는 일보다는 그중의 하나가 없이 생명을 유지하는 게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도 비유입니다.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인생은 결국 인생 전체를 잃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게 옳은 말씀일까요? 비현실적인 말씀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눈’에 관한 이야기인 47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지옥이 대비됩니다. 손을 예로 든 43절과 발을 예로 든 45절에는 영생과 지옥으로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와 영생은 같은 의미라서 이렇게 교차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각주가 달린 ‘영생’은 헬라어 ‘조에’(생명)의 번역입니다. KJV을 비롯한 모든 영어 성경과 루터 번역 성경, 우리말 새번역, 공동번역 등등, 대부분의 성경이 ‘생명’이라고 번역한 이 단어를 개역개정과 그 원류인 개역성경만 ‘영생’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큰 틀에서 보면 통하는 번역이지만 원칙적으로 보면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습니다. 어쨌든지 여기서 생명과 지옥이 상대 개념으로 나왔고, 특히 지옥이 강조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지옥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48절에 지옥 표상이 적나라하게 나옵니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이 묘사는 사 66:24절의 인용입니다. 벌레가 죽지 않고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사람이 가장 힘들어하는 대상이 벌레와 불이기에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쥐나 개구리나, 뱀이 들끓는 곳이라고 표현해야 더 실감이 나겠지만요. 후기 사본에는 지옥에 관한 48절 표현이 ‘손’을 말하는 43절과 ‘발’을 말하는 45절 뒤에 각각 나옵니다. 강조한다는 뜻이겠지요. 우리말 성경이 원본으로 택한 사본에는 그것이 빠져서 44절과 46절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지옥은 ‘게엔나’(γέεννα)의 번역입니다. 영어 hell에 해당합니다. 영어 사용권 사람들은 심하게 욕할 때 “Go to hell!”이라고 합니다. “천벌 받을 놈!”에 해당합니다. 게엔나는 예루살렘 남서쪽 어느 골짜기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게 힌놈’을 음역한 지명입니다. 그곳은 몰렉 숭배의 한 형태인 인신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그 광경이 얼마나 끔찍했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구역질 나는 장소입니다. 사람들이 그곳을 지옥이라고 생각할만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들고 괴로운 어떤 사태를 가리켜서 게엔나, 즉 지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사태가 어떤 것인지를 여러분은 진지하게 생각해보셨나요? 지옥을 경험해보셨나요? 혹시 죽은 다음에 영원히 구더기에 시달리고 불구덩이에 떨어져서 그 열기에 고통당할까 걱정이 됩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창조의 선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런 방식으로 괴롭힌다는 생각은 언어도단입니다. 소위 ‘탕자의 비유’에서 방탕했던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3년간 마당에 빗질하라거나 하루에 두 끼만 먹는 조처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죽었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사실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묻기보다는 잔치를 베푸실 겁니다. 책임을 묻더라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영원한 고통의 방식은 아닙니다. 이런 아버지가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신다는 사실을 믿어도 됩니다. 아니, 믿어야 합니다.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영혼
문제는 살아있는 지금 여기서 그 사랑의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또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지옥은 죽어서 가는 어떤 처참한 장소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끔찍하고 허무한 인생입니다. 구더기와 불에 시달리는 인생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해도 지옥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게 왜 지옥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겁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을 지옥 이야기로 위협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랑의 하나님을 실감하는지를 묻는 것뿐입니다.
현대인들이 지옥 표상을 시큰둥하게 여기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아야만 하나님 없음이 얼마나 공허한지도 실감합니다.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사는 사람만이 오염된 공기가 얼마나 답답한지를 압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실제로는 구더기에서 파묻혀 살면서도, 그리고 불구덩이에 떨어져 있는데도 그걸 진지하게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겉으로는 그럭저럭 행복하게 사는 듯이 보이긴 합니다. 나름으로 즐거운 일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미래인 하나님 없이 그런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궁극적인 의미가 없는 대상에만,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일 수도 있는데, 매달리는 삶이 지옥 아닐까요? 때에 따라서는 달콤한 지옥 말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넷블릭스에서 <빅토리아 & 압둘>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늙은 영국 여왕 빅토리아(1819~1901)가 왕실 행사에 인도를 대표해서 선물을 바치러 왔던 인도 청년 압둘에게서 인간적인 친밀감을 느낀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압둘을 영적인 스승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나라를 식민 지배하던 당시 영국의 최고 통치자였으나 그 누구에게도 토로할 수 없는 고독감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겉으로 화려하게 살던 그 여왕의 실제 삶은 지옥이었습니다. 약간 모양과 정도만 다를 뿐 우리의 삶에도 지옥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데, 여러분은 안 그렇습니까? 주변에 좋은 가족과 친구가 많아서, 또는 믿음이 깊어서 허무나 고독이나 지루함과는 전혀 상관없이 충분한 안식과 평화를 누리면서 잘살고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작은 자
지옥이라는 운명에 떨어지는 이유는 ‘작은 자’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행위에 놓여 있다고 앞에서 짚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작은 자를 무시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와 자기 소유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자기 안에 갇히는 겁니다. 자기를 절대화하는 삶입니다. 자기를 숭배하고 앞세우는 데만 모든 마음이 치우쳐 있기에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자기 삶에서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이고, 자기 방에 놓인 소품입니다. 기껏해야 자기에게 이익을 주는 대상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작은 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작은 자는 자기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어떤 궁극적인 진리 국면이 놓여 있습니다. 작은 자를 무시하고 실족하게 함으로써 그 결과로 죽은 다음에 지옥에 떨어지는 게 아니라, 무시하고 실족하게 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지옥이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서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구더기가 들끓는 구덩이와 불 구덩이 안으로 사생결단 뛰어드는 현상 자체가 지옥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대한민국은 지옥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헬조선’?
사회적 현상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실존에서 이 문제는 더 중요하고 심각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작은 자’라고 불릴만한 부분에 영혼의 촉수가 움직이는지 보십시오. 우리가 남에게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만을 허겁지겁 쫓아가면서 살지는 않으시는지요. 시속 100㎞로 달리는 고속도로에 올라섰기에 작은 사물이 눈에 들어오지 않듯이 우리 삶의 작은 부분을 모두 놓치고 사는지 모릅니다. 생명에 밀착하지 못하고 공중에 떠서 사는 겁니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1) 얼마 전에 민간인이 우주여행을 다녀왔다는 국제 뉴스가 크게 떴습니다. 미국 우주 기업체 ‘스페이스X’가 시도한 프로젝트였습니다. 인간 기술이 대단하기는 합니다. 전문 우주인이 아니라 민간인 4명을 우주선에 태워서 고도 575km까지 쏘아 올려 며칠간 지구를 돌게 하였다가 무사히 돌아오게 한 겁니다. 그 모든 과정을 원격으로 처리했습니다. 우주 관광 시대가 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좋은 쪽으로 보면 이런 우주과학의 발전이 인류의 다른 영역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나 상업주의에 근거한 우주 관광이라는 말에 너무 혹하지 마십시오. 이번에 우주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본 것도 지구라는 우주선을 타고 살아가는 우리가 보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 추석날 밤에 달을 자세하게 보고 그 신비로움을 느낀 사람은 수백만 달러의 비용을 내고 이번 우주여행을 다녀온 사람 못지않은 경험을 한 겁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천사도 디테일에 있습니다. 생명도 디테일에 있고, 지옥도 디테일에 있습니다. 자기 삶의 작은 영역을 무시하는 사람은 인생을 지옥처럼 사는 겁니다.
2)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주요 정당의 내부 경선이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두 종류의 후보자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권력을 향한 욕망이 강렬한 후보자와 국민을 섬기려는 후보자입니다. 이 두 속성이 한 사람에게 동시에 들어있기도 할 겁니다. 대통령은 사실 불행한 자리입니다. 나라 전체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이기에 권력자들과만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보다는 우리 일반 사람들이 삶의 본질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일상에 더 밀착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실제 내용인 ‘작은 자’를 무시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그가 우리의 이런 삶을 빼앗지 못합니다. 거꾸로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그가 우리의 이런 삶을 더 풍요롭게 하지도 못합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대통령이 당선되어도 여러분이 준비가 안 되었다면 가을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가을비를 황홀하게 느낄 수도 없고, 원하지 않는 대통령이 당선되었다고 해도 준비만 되었으면 밥 한 그릇을 마지막 식사처럼 특별한 느낌으로 먹을 수 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일이나 대구샘터교회 담임 목사의 일이나 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가정을 꾸리는 일도 생명의 본질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적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는 가르침에서(마 25:21, 23) 보듯이 작은 일 자체가 위대한 일이고 생명 사건이고, 하나님 나라의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지옥이 아니라 생명에 가까이 가는 삶을 살아낼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억지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고후 5:17)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마지막 50절에서 ‘소금’을 간직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소금의 짠맛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으로써 주어지는 존재론적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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