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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 (계 21:1-6)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

21:1-6, 부활절 다섯째 주일, 2019519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여러분은 현재와 같은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달라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때에 따라 생각이 다를 겁니다. 자신에게 좋은 것이 많은 경우에는 이대로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할 것이고, 불편한 게 많으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은 현재의 국제 질서를 만족스럽게 생각할 것이며,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뭔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지금 힘겨루기를 하는 북한과 미국의 입장도 서로 다르겠지요.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람은 세상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불공정한 세상이 공정한 세상으로 바뀌는 정도가 아니라 우주 전체가 완전히 새로워지는 새 창조를 꿈꾸었습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처음 바다도 없어지는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천지개벽과 같은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을 가리켜서 그는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4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구절에 열거되는 항목들은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피하고 싶은 것들입니다. 눈물, 사망, 애통, 곡하는 것과 아픈 것 등등은 우리를 불행에 떨어뜨립니다. 이런 불행한 것들을 줄여나가는 게 개인이나 사회에서나 최선입니다. 완전한 해결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지구의 생명 메커니즘이 서로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된다는 것이 가장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적나라한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미 치타는 어린 사슴을 잡아서 자기 새끼에게 먹입니다. 어린 사슴이 죽는 것도 불행한 일이지만, 치타가 사냥에 실패하여 치타 새끼가 굶주리는 것도 불행한 일입니다. 인간은 문명사회를 만들었기에 이런 정글의 법칙에 따라서 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근본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 인간은 동물들에 비해서 더 잔인하게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동물들은 일단 배가 고플 때만 사냥을 하지만 인간은 배가 불러도 많은 것을 쌓아두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수 샘물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저자는 로마의 가장 잔혹한 황제 치하에서 살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끔찍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런 상황이 인간의 노력으로 바뀌기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창조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선한 존재이기에 지금과 같은 잔인한 세상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갔다고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의 질서는 끝났습니다. 이전의 가치관도 끝났습니다. 미국에서 노예해방이 일어나서 흑인들도 백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된 것처럼, 그리고 갈릴레이의 지동설에 의해서 새로운 우주관이 자리를 잡은 것처럼 기존의 체제가 끝나는 세상입니다. 더 이상 눈물이 없고, 고통이 없고, 죽음이 없는 세상입니다. 모두가 영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세상을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신다는 겁니다. 그 완전한 만족에 대한 새로운 표현이 6절에 나옵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겠다.’는 문장을 여러분은 어떻게 들었습니까? 이미 4절에서 눈물, 사망, 애통, 곡하는 것, 아픈 것이 앞으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상태를 총괄하는 표현이 바로 생명수 샘물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이 사람은 자기가 독단적으로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닙니다. 그는 구약성경에서 그것을 배웠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55:1). 생각해보십시오. 슈퍼마켓에 가서 원하는 대로 물건을 가져올 수 있는 세상이 된다고 말입니다. 이게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가정만 놓고 보면 이해가 갑니다. 가정에서 돈을 내고 밥을 먹거나 과일을 먹지 않습니다. 수도원도 이런 원리로 돌아갑니다. 수도사들은 돈을 내고 밥을 먹거나 잠자리를 얻지 않습니다. 이런 원리가 가정 경제와 수도원 경제에서 가능하다면 국가 경제에서도 가능해야합니다. 원칙적으로만 보면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돈 없는 사람도 돈 있는 사람과 똑같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요한계시록 저자는 이사야의 그럼 꿈을 이어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 저자의 이런 거룩한 꿈은 궁극적인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궁극적인 미래는 이미 지금 여기서 생명의 능력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첫 창조와 지금과 새로운 창조인 궁극적인 미래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역사와 시간은 거대한 거미줄과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거미줄의 한쪽 끝에 매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저쪽 끝에서 거미줄의 진동이 시작되어 우리가 매달려 있는 자리까지 전달됩니다. 그 진동이 아주 미약하기에 그냥은 느끼지 못합니다. 거기에 집중하고 기다리는 사람만 느낄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람은 이렇게 저쪽 먼 미래에서 오는 미세한 진동을 느낀 사람입니다. 그는 보좌에 앉으신 이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새롭게 하는 분입니다. 생명수 샘물을 주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생명수 샘물을 맛본 사람들로 살고 있을까요? 그래서 그런 경험을 서로 나누려고 애를 쓰는 중일까요? 생명수 샘물을 무엇일까요?

 

목마른 자

생명수 샘물은 목마른 자에게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목마른 자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대신 다른 것을 찾습니다. 자신을 만족시켜줄 대상을 한평생 찾습니다. 단순히 찾는 게 아니라 찾아서 헤맵니다. 가장 일반적인 대상은 돈입니다. 인생을 갉아먹을 정도로 돈을 버는 이유는 실제로 자기가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해서라기보다는 그걸 통해서 만족을 얻어 보려는 데에 있습니다. 하루 세끼 먹고 살아가는 데에는 돈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지만 재산이 늘어나는 것으로 만족을 느끼기 때문에 계속 거기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것으로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거기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자신의 내면이 더 공허해진다는 사실만 확인됩니다. 정치인들이 정치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서 나름으로 만족을 얻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통해서 생명수 샘물을 맛보는 것 같은 만족을 얻은 사람은 없습니다. 생각이 있는 정치인들은 누구나 정치를 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좀더 고상한 대상도 있습니다. 학문이 그것입니다. 학문적인 업적은 우리에게 상당한 만족을 제공하긴 합니다. 역사 발전과 사회봉사에 기여하는 기회도 됩니다. 그것으로 영혼의 만족을 얻은 사람도 역시 없습니다. 가장 강렬한 대상은 사람입니다. 연인이기도 하고 가족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럽 사람들보다 가족애가 남달리 강하기는 합니다. 가족을 통해서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 등등이 명절이나 생일에 함께 모여 보내는 행복한 순간은 금방 지나고 쓸쓸함만 남습니다. 축제의 끝은 충만함이 아니라 아쉬움이라는 걸 여러분은 이미 여러 번 경험했을 겁니다. 그 어떤 황홀한 인간적인 경험도 우리의 내면을 충만하게 채워주지 못합니다. 생명수 샘물 경험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목마른 자는 하나님을 목말라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돈에 목말라 하거나 학문 성취에 목말라 하거나 정치 야망에 목말라 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고 보존하며 완성하실,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라고 표현되는 하나님을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목말라하는 것이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건 말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실제로 경험해야만 가능한 어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만 인식할 수 있지 그 너머는 인식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다도(茶道)를 생각해보십시오. 다도를 아는 사람들은 차를 마시면서 차의 원료가 어떤 일기 조건에서 생성되었는지를 느낍니다. 차가 입을 통해서 흘러들어가는 순간의 기쁨을 느낍니다. 저는 성찬식을 집행하면서 빵을 손으로 찢을 때 특별한 것을 경험합니다. 0.5초 정도의 순간에 적당한 힘을 가하면 빵이 찢어집니다. 빵의 잡아당기는 힘과 손의 벌리는 힘 사이에 유지되던 팽팽한 긴장감이 어느 순간에 끝나는 겁니다. 이런 느낌과 경험은 언어로 설명해서 전달되는 게 아닌 것처럼 하나님을 목말라 하는 게 무엇인지도 언어를 뛰어넘는 어떤 궁극적인 사태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목말라한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읽고 배우면 우리도 그들의 영적인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다도를 배우다보면 자신도 다도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런 사람들의 경험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군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고 싶어지고, 그게 강렬해지면 목말라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다도를 즐기는 사람들을 일반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듯이, 하나님을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설교할 때마다 하나님이 누군지를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값없이...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가리켜서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주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수 샘물은 생명의 원천을 가리킵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쉽게 생각해보십시오. 살기 위해서는 반복해서 숨을 쉬고 먹고 마셔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공급되지 않으면 죽습니다. 몸이 더 건강해지려면 운동을 해야 합니다.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에 더 존속하려면 후손을 낳아야 합니다. 사람은 몸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도 삽니다. 더 고급한 삶은 영혼과 관련됩니다. 아무리 몸이 건강해도 불안과 공포, 공황장애를 겪으면 살아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삶이 파괴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의 삶을 파괴합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생명을 값없이 주고받는 게 아니라 값을 치루고, 가능한 더 비싼 값을 치루고 주고받으려고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런 현실을 벗어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런 문제의 해결은 사회과학의 몫입니다. 저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 값없이 주어지는 생명수 샘물을 받을 수 있는지만 가능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는 조건 가운데서 값없이 가능한 것을 손에 꼽아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생명수 샘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몇 가지는 말씀드렸습니다. 숨쉬기가 첫 번째입니다.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차원인 숨쉬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값을 받지 않고 생명의 원천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얼마 전까지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다가 이제는 찔레꽃이 만발합니다. 그 향기를 우리는 값없이 맡을 수 있습니다. 죽기 전에 선택해야 할 경우가 온다면 저는 교황과 독대하기보다 아카시아와 찔레꽃 향기를 선택하겠습니다. 이런 것을 거론하기 시작하면 값없이 받을 수 있는 게 끝없이 많습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511일에 저는 서울샘터교회 수련회에서 나는 걷는다는 제목으로 특강을 했습니다. 돈이 들지 않는 걷는 행위는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데에 가장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오늘 현생인류는 호모 에렉투스(직립인)라는 유인원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걸으면서 우리는 지구의 중력을 느끼고 중심을 잡는 즐거움을 경험합니다. 손을 자유롭게 쓸 수도 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를 나서거나 티베트 불교의 성지인 라싸까지 삼보일배 순례를 나서는 이유도 걷는 행위가 곧 구도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걷는 데에 돈이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값없이 받을 수 있는 것을 영혼의 깊이에서 느끼고 경험하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목말라 하는 사람입니다.

이사야로부터 시작되어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이런 성서 전통은 단순히 개인의 영성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혁명적인 발상이기도 합니다. 값없이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가정 경제와 수도원 경제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확대되면 사회 경제가 됩니다. 돈이 없어도 먹고 잠자고 입고 치료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명백합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생명수의 샘물을 무시하고 값을 많이 주어야만 수준 높은 인생이라는 선입견이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21세기에는 이런 선입견이 숙명처럼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티브이 쇼핑몰에 터줏대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돈을 쓰는 재미로 사는 겁니다. 내수를 진작시키려면 그런 사람들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생명수 샘물을 맛볼 수 없다는 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돈을 쓰려면 돈을 모으는데,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부족하면 불행한 느낌이 들고, 때로는 돈을 더 모으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심판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상상을 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사용한 돈의 액수에 따라서 심판을 받을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그 심판은 이미 지금 여기서 발생했습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생명수 샘물에 영혼이 민감하게 움직이는 사람과 돈으로 자기 인생을 가꾸는 데만 신경이 집중된 사람은 이미 그에 해당하는 심판을 받은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 심판을 이미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수 샘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뜻입니다. 인생에서 낙오될까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장 값진 것을 값없이 받은 사람들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요한계시록 21:1-6
https://youtu.be/Zsez66AmAbA
http://afreecatv.com/nferm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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