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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생명의 왕국

생명의 왕국

로마서 5:12-19, 사순절 첫째 주일, 2011년 3월13일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는 신약성서 중에서 신학적인 성격이 가장 강한 책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세워진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사사로운 편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전체 분량이 16장에 이릅니다. 일종의 그리스도교 변증 논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한 번도 로마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는 로마에 가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 시도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당시에 로마는 유럽의 모든 정치, 문화, 예술, 경제가 집중되어 있던 도시였습니다. 세계 선교의 꿈을 꾸고 있던 바울에게 로마는 반드시 가봐야 할 도시였습니다. 당장 갈 수는 없지만 일단 글로나마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로마서입니다.

     신학적인 성격이 강한 편지인 까닭에 내용이 까다롭습니다. 특히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읽은 롬 5:12-19절은 더 그렇습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그리스도교의 구원론을 설명합니다. 바울은 12b절에서 인간의 실존을 죄와 죽음으로 규정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의 이런 주장은 구약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창세기의 선악과 이야기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취했고, 그로 말미암아 죽음의 운명으로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설명이 너무 교리적이어서 실질적으로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죄를 교만이라고 했고, 아퀴나스는 자기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불순종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개념이든지 여기서 핵심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분리는 곧 생명과의 분리입니다. 생명과의 분리는 죽음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12a절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여기서 한 사람은 물론 아담입니다.

     아담 때문에 우리가 죄의 후손이 되었고, 결국 죽을 운명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여기서 아담은 자연인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아담은 모든 인류를 대신합니다. 아담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죄의 실존에 떨어져 있습니다. 아담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않았고, 교만이나 자기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런 생각은 뭔가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제가 이에 대한 증거를 대야할까요?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이 크게 발전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폭력적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이 아니라 속에 숨은 폭력도 대단합니다. 성서는 인간의 죄가 존재론적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힘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죄가 없는 어린아이들의 죽음도 역시 죄 때문일까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성서기자들도 마땅히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그들이 내린 대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유전된다고 했습니다. 너무 야비하다거나 무책임한 대답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성서의 중심에서 볼 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은 우리가 모릅니다.

     이런 문제를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죄의 본질을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증적인 죄만을 죄라고 생각합니다. 도둑질하거나 남에게 여러 모양으로 피해를 주는 파렴치한 행위를 가리킵니다. 물론 이런 행위를 고치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크게 변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그런 부도덕한 행위들을 바로잡는 규범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도덕적인 세상이 된다고 해도, 아무리 사회적 안전망이 갖추어진다고 해도 사람은 죽습니다. 죄는 단순히 인간의 파렴치한 행위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율법 이전에도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은 율법이 가리키는 죄와 의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죽음의 힘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예수 이전의 인류가 처해진 엄정한 영적 실존이었습니다. 여기서 키워드는 사망의 왕 노릇입니다.

     어떤 이들은 다르게 생각할 겁니다. 사람이 죽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을 죄와 연결시키는 것은 지나치다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서의 주장과 생물학적인 주장이 서로 충돌하는 대목입니다. 생물학적인 것에만 머문다면 성서의 주장이 이상하게 들릴 겁니다. 성서의 출발점은 다릅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봅니다. 그 창조는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죽음은 그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늙어서 죽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라 왜곡된 것입니다. 죄로 인한 왜곡입니다. 이 왜곡은 율법이나 실정법으로 바로잡히지가 않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모든 시도가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분열이 극복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전혀 새로운 한 사건을 제시합니다. 죽음을 불러온 죄와 전혀 상관없는 선물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은사이며, 은혜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선물입니다.(15절) 이 선물은 범죄한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약간 복잡하게 들릴 겁니다. 여기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가 대비됩니다. 아담은 예수의 모형입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서 죄가 들어오고 죽음의 심판을 당하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많은 죄가 용서받고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설명은 17절에 이어집니다. 아담으로 인해서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이 왕 노릇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8절과 19절에서도 비슷한 논리가 계속됩니다. 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인류가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의 왕국이 이제 생명의 왕국으로 변한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설명은 약간 까다롭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대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설명이 실감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왕국이라는 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죽는다는 게 분명하니까요. 우리가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런데 생명의 왕국이라는 말은 확 와 닿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여전히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여전히 허무에 굴복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죄의 지배를 받습니다. 죄와 사망의 왕국에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명이 왕 노릇한다니요. 모순된 주장처럼 들립니다. 이런 모순을 벗어나기 위해서 종교적 열광주의에 떨어지기도 하고, 율법주의에 떨어지고 합니다. 한국교회의 신앙이 얼마나 열광적인지를 아실 겁니다. 마치 구름을 타고 있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한국교회의 신앙이 얼마나 율법적인지를 아실 겁니다. 교회에 나가면서 지켜야 할 일이 산더미 같습니다. 성수주일과 십일조가 신앙의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이런 것에 자발적으로, 또는 억지로 맞추면서 만족을 느낍니다. 이것으로 생명의 왕국으로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삶에 생명이 왕 노릇하게 되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로마서의 중심 주제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울의 논리는 그 중심으로부터 뻗어나갑니다. 칭의(稱義)가 그것입니다. 더 자세하게 이름을 붙이면 이신칭의(以信稱義), 즉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롬 1-4장에서 이것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걸 전제하고 오늘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칭의의 조건은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의로워진다는 것은 실증적인 차원이 아니라 법적인 차원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뿐입니다. 실제로 의로운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칼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칭의론에 근거해서 생명의 왕국이라는 말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실증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아닌 것처럼 지금 실증적으로 생명의 왕국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처럼 우리는 그분의 생명 나라에 들어갔다고 인정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가된 것, 즉 덧입혀진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과 완전히 일치된 것은 아닙니다. 생명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생명의 빛으로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을 뿐입니다. 죽음의 위협도 받습니다. 생명과의 완전한 일치, 빛과의 완전한 일치는 종말에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의 왕국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7b)

     바울의 이런 주장은 옳은가요? 옳다면 근거가 충분한가요? 바울은 자기도 잘 모르는 이야기를 그냥 그럴듯하게 한 것일까요? 이런 신앙의 깊은 세계를 말로 설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잘 아실 겁니다. 일단의 죄수들이 동굴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대를 이어 거기서 살았습니다. 후손들은 자기들이 경험한 동굴이 모든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우연하게 동굴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세계는 전혀 달랐습니다. 모든 게 달랐습니다. 꽃향기와 바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동굴로 돌아가서 동굴 밖의 세계를 전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동굴 안에서는 동굴 밖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로들은 이 젊은이를 처형했고, 동굴은 옛날 그대로 조용해졌다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 생명의 왕국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의 경험에 동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을 어떤 신앙적인 규범으로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 생활을 잘하는 것이 그 생명의 왕국에 들어간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 자체도 생명의 왕국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생명의 왕국에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의 통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의 운명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여기서 우선적으로 중요합니다. 그의 운명에서 하나님 나라가, 즉 생명의 왕국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을 잘 안다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다 알지 못합니다. 여전히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생명 왕국의 비밀입니다. 종말이 와야 다 드러날 생명이 신비입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생명이 왕 노릇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될 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여전히 죽음이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그게 어떤 것인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잘 알 것입니다. 자본이 왕처럼 군림합니다. 성공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다루고 있고, 자연을 물건 다루듯이 하고 있습니다. 인간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가르쳐야 할 학교가 비인간적인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교회마저도 세속적인 성장주의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말론적인 생명의 왕국에 참여하기 원한다면 지금 여기서 반(反)생명, 사이비 생명을 믿음으로 대항하며 살아가십시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로마서 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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