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관과 과부
막 12:38-44, 창조절 열 번째 주일, 2015년 11월8일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서기관 이야기
오늘의 성서일과 제3독서인 막 12:38-44절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불쾌하면서 두려운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2천 년 전의 이런 이야기를 지금 우리가 읽을 수 있다는 건 복음서 기자들의 수고 덕분입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두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첫째는 38-40절에 나오는 서기관 이야기입니다. 서기관은 유대교의 율법학자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전문적인 신학자와 같습니다. 당시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서기관은 오늘의 법조인 역할까지 했습니다. 사회적으로 꽤나 신분이 높은 이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집안에 서기관이 배출되면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행태를 세 가지로 묘사했습니다. 1)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인사를 받는 것과 회당과 잔치 자리에서 윗자리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늘 어른 대접을 받고 싶어 했다는 겁니다. 본인들이 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렇게 대우했을 겁니다. 이런 사회 구조 가운데서 서기관들은 대접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게 더 심각해지면 자기도 모르게 안하무인의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2) 그들은 과부의 재산을 삼켰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은 삼킨다는 단어를 ‘등쳐먹는다.’고 번역했습니다. 과부들은 사회적으로 약자입니다. 서기관이 과부의 재산을 막무가내로 강탈한 것은 아닙니다. 율법 해석의 도움을 주고 과도한 금액을 요구한 것입니다. 과부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서기관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3) 서기관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를 길게 했습니다. 다른 이들이 들어서 은혜롭게 느낄만한 내용으로 기도했습니다. 최고 지성인들이었던 그들은 그럴 능력이 있었습니다. 물론 길게 기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남에 보이기 위한 기도가 문제입니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심리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그런 심리가 여지없이 작동됩니다. 그게 목회적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어느 교회에는 장로들을 위한 예배 석이 따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대개 다른 사람들 눈에 잘 뜨이는 자리입니다. 제가 전도사로 활동했던 대구의 아무개 교회는 가운데 강단이 있고, 왼편에는 성가대석이, 오른편에는 장로석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가 회중들이 앉아 있는 자리보다 높아서 눈에 잘 뜨였습니다. 간혹 그런 자리가 불편하다 해서 일반 회중들 자리에 앉는 장로들도 있었는데, 대개는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가톨릭교회 미사에 참여해본 분들은 알겠지만 성가대가 개신교회처럼 앞자리에 앉지 않고 뒷자리, 주로 뒷자리 이층에 자리합니다. 회중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업적주의 신앙을 극복하고 순전한 복음에 천착하겠다는 결기로 시작된 종교개혁의 후예인 개신교회가 오늘날 가톨릭교회보다 더 남에게 보이는 식의 신앙행태로 퇴락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의 신앙행태를 엄중히 경고했습니다. 공동번역으로 40(후)절을 읽겠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지금 남에게 대접받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자랑할 일이 절대 아닙니다. 세상은 남에게 인정받는 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하나님을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별로 실감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관점이 여기서 필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이 종말론적이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것입니다. 지금 당장 남이 부러워하는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 지나가는 겁니다. 마지막 때의 판단이 결정적인 겁니다. 저도 목사로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이 지금 이미 여기에 비밀한 방식으로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서기관의 태도로 사는 사람들은 참된 평화와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이미 엄한 벌을 받은 겁니다. 보십시오. 매사에 자기를 기준으로 놓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자기를 대접해주지 않는 데서는 대접받으려고 신경 쓰고, 대접해주는 데서는 그런 대접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죽을 때까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것입니다.
서기관처럼 높은 지위에 올라가서 남에게 대접받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면서 살면 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세상에서도 인정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아주 좋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이 모두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쉽지 않다는 건 분명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릇이 있는데, 삶의 태도 역시 버릇과 비슷합니다. 한번 길들여진 버릇은 고치기 힘듭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 서기관의 삶이 몸에 배면 그걸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최선은 그런 잘못된 버릇이 들지 않도록 처음부터 조심하는 것이고, 이미 버릇이 들었으면 뼈를 깎는 태도로 그걸 고쳐야 합니다. 그게 바로 회심입니다. 그런데 회심을 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을 뿐이지 실제 삶의 태도를 바꾸기는 힘듭니다. 인격 변화가 어려운 거와 같습니다.
가난한 과부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는 41-44절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에 관한 것입니다. 앞에 나온 서기관과 대비되는 사람이 과부입니다. 서기관은 사회 고위층에 속하고 과부는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합니다. 아무도 과부와 비슷한 운명으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서기관으로 살든지, 과부로 살든지 그게 다 이 세상에서의 한 평생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이데거 식으로 표현하면 서기관이나 과부나 모두 세계-내-존재일 뿐입니다. 지구 안에서 먹고 배설하고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가는 실존은 모두 동일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신분의 차이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시각이 우리에게 고정되어 있는데, 그런 시각을 걷어내야만 하나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이 두 번째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보다 스토리의 성격이 좀더 강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의 헌금함 맞은편에 앉았다는 말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헌금함이 있는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여인의 뜰입니다. 나팔처럼 생긴 13개의 헌금함이 보물창고 안에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자진해서 헌금을 내는 헌금함입니다. 부자들은 많은 돈을 넣은 반면에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 동전을 넣었다고 합니다. 렙돈은 각주에 따르면 헬라 동전의 명칭인데, 그것을 로마 화폐로 바꾸면 한 고드란트입니다. 그 돈의 가치는 한 끼 식사에 해당됩니다. 이런 장면이 약간 이상하게 보입니다. 예수님이 과부의 헌금 액수가 두 렙돈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예수님이 과부에게 직접 물어봤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옆에서 눈으로 보고 확인한 것도 아닐 겁니다. 당시 헌금함을 지키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가 헌금 액수를 일일이 사람들에게 발표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건 헌금 총액을 올리기 위한 방법으로도 유용합니다. 명분으로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액수가 확인되는 경우에 사람들은 헌금을 더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적지 않게 벌어집니다. 십일조 헌금을 누가 얼마나 드렸는지, 생일감사 헌금을 누가 드렸는지를 소상하게 밝힙니다. 소상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대략 헌금 종류에 따라서 이름이 나오는 일은 허다합니다. 대구샘터교회의 헌금제도는 이와 반대로 갑니다. 헌금 종류도 월정헌금 한 가지일 뿐이고, 기본적으로 무기명에다가 주보에도 총액만 밝힙니다. 절기 헌금도 없고, 감사헌금도 없습니다. 이게 잘하는 일까요? 이런 방식으로 교회를 건강하게 운영하고, 기독교인으로서 재정적인 책임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 헌금 제도에서 실험적인 길을 가고 있는 겁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대구샘터교회는 한 벌의 옷만 입고 지내는 수도원의 수도자와 같습니다. 절기별로, 패션에 따라서 화려한 의상을 갖춘 일반 사람들에 비해서 초라해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우리 헌금은 과부의 두 렙돈과 같습니다.
두 렙돈을 바친 과부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43, 44절에 나옵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그 어떤 사람보다 많은 헌금을 바쳤다고 말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부자들의 헌금과 과부의 헌금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시각으로 헌금을 판단하셨습니다. 44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이런 말씀을 읽으면 뭔가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결국 생활비 전부를 넣은 과부처럼 헌금을 많이 하라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과부를 칭찬하셨다고 보면 곤란합니다. 오히려 그런 돈을 헌금하지 말라고 하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헌금 자체를 말씀하는 게 아닙니다. 헌금에 대해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오해하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헌금을 많이 드려야 한다는 생각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옳은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하나님에게 시혜를 베풀 듯이, 또는 우리교회에서 나만큼 헌금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바라 하는 태도로 헌금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창조이고, 우리가 다 하나님께 속했는데, 헌금 몇 푼만 떼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바친다 한들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영적인 태도를 가리킵니다.
가난한 과부는 다음날 자식들의 끼니를 준비해야 할 돈을 헌금으로 바쳤습니다. 미련해보이지요? 광신자처럼 보이지요? 이런 행동은 자신의 운명이 어디서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아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사랑의 능력에 빠진 사람에게서 볼 수 있듯이 이 가난한 과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까지 다 포기하고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세상살이의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밀착 관계만이 절대적인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충실한 태도입니다. 이 과부는 가장 많은 헌금을 드린 것이라는 평가를 예수님에게서 받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아닐까요? 정말 복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가난한 과부의 영혼
가난한 과부의 영혼이 어떤지를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끼니마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이 여자를 불쌍하게 여겼을 겁니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한 가지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과부의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것에 마음이 분산되었기 때문입니다. 갖고 싶은 것도 너무 많고 해결해야 할 문제도 너무 많습니다. 그게 인생이 아니냐, 그래서 인생을 고해와 같다고 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겁니다. 신경 쓸 일이 많은데 어떻게 마음이 분산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 말을 이해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과부의 영혼과 거리가 멀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무조건 가난하게 사는 게 좋다거나, 세상살이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말고 무조건 하나님만 생각하고 교회에 매달려서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절실한 태도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어떤 삶의 자리에 놓여 있든지, 풍족하든지 어렵든지를 불문하고 하나님을 향한 진정성이, 즉 절박한 심정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심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삶을 정확하게 뚫어보지 못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지요? 우리는 모두 결국 언젠가는 그녀처럼 다음 한 끼 식사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떨어질 겁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저는 성찬예식을 집행할 때마다 빵과 포도주가 우리의 마지막 먹을거리가 되는 날이 속히 온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고, 가끔 신자들에게 그 사실을 짚어주기도 합니다. 늙거나 사고나 병으로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우리는 인생 전체를 헌금함에 넣어야 합니다. 액수가 많든지 적든지 모든 것을 넣어야 합니다. 내 손에서 모든 것이 떠난다는 뜻입니다. 그런 절박한 심정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그것입니다. 그녀는 그 궁극적인 미래의 사건을 미리 현실의 삶으로 당겨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우리가 정말 가난한 과부의 영혼으로 이 척박한 세상을 버텨낼 수 있을까요?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는 아닐까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무엇인지는 여러분들이 굳이 듣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과부의 영혼으로 당연히 세상을 버텨낼 수 있고, 거기서만 참된 안식과 평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대답을 알아도 실제로 이렇게 살기는 힘듭니다. 대개는 서기관의 인생을 원하지 가난한 과부는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서편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소리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자식 남매에게 소리를 가르칩니다. 소리가 밥 먹여주지 않는다면서 도망가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소리는 밥보다 좋은 거야.’ 그래도 아들은 도망갑니다. 하나 남은 딸에게 소리를 가르칩니다. 소리에만 집중하게 하기 위해서 딸의 눈을 멀게 합니다. 끔찍한 이야기입니다만, 소리도 영혼의 문제라는 것이 분명해보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영혼의 울림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맡긴다는 게 무엇인지 느낄 수 없습니다.
이렇게 그럴듯한 말로 설교하고 있는 제 자신이 과연 이 가난한 과부의 영혼으로 살고 있는지 저 자신에게 질문할 차례입니다. 그건 제가 여러분에게 증명해보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그렇다고 확신하고 있어도 실제로는 아닐 수 있고, 그렇지 못하다고 말해도 실제로는 그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의 가장 깊은 차원에 해당되기 때문에 제가 그 물음에 직접 대답하는 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대신 저는 다음과 같이 저의 현재 상태를 말씀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가난한 과부의 영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것 외에는 저에게 관심이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죽기 전에 그런 영혼의 깊이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게 바로 저의 유일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여러분도 저와 똑같은 심정일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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