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의 운명
신 18:15~20 주현절 후 넷째 주일, 2021년 1월31일
오늘 설교 본문인 신 18:15~20에는 우리말 성경으로 “선지자를 일으키실 약속”이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성경의 다른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선지자 운운하는 이 본문에도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나서 40년 광야 생활을 거치고 이제 가나안이 건너다보이는 요단강 동편의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언처럼 마지막 연설을 하는 중입니다. 이 연설이 끝나면 모세는 평생소원이었던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죽어 모압 땅 어느 골짜기에 묻힙니다. 그의 마지막 연설 모음집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신명기가 다루는 주제의 하나가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선지자 문제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대체할 수 없는 모세의 역할은 하나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한 유일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모세 일대기에는 그런 이야기가 수없이 나옵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던 호렙산 이야기부터 그의 하나님 경험은 시작됩니다. 출 3, 4장이 이를 자세하게 전합니다. “나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낸 분의 이름을 그들이 물을 때 무엇이라 대답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모세는 묻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시내산 전승에는 모세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인 십계명과 율법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들입니다. 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후광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그를 쳐다볼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모세를 필적할만한 인물은 없습니다. 이제 모세가 죽으면 누가 모세와 같은 권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요? 모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걱정이었습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를 세워주신다고 말했습니다. 그 선지자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선택받습니다. 이런 말씀이 15절과 18절에서 반복됩니다. 이 중에 15절만 읽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선지자를 세우신다는 말은 단순히 모세의 뒤를 이을 정치 지도자를 뽑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진술에는 정치적인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그 정체성이 확보된다는 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 4:4)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런 전통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신 8:3절을 인용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런 신앙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에게 선지자들이 없다고 해서 그들이 당장 굶어 죽는다거나 민족이 말살되는 건 아닙니다. 먹고 마시며 아이를 낳으면 민족은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주변의 다른 민족은 이런 일에만, 조금 더 나아가서 과학과 문명을 일으키는 일에만 주력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일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교양과 인격을 쌓으면 됩니다. 모두 이런 차원에서 삽니다. 이걸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주변 여러 민족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했기에 선지자가 필요했습니다.
여러분은 ‘선지자’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우선 구약의 선지자들을 손에 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등, 이스라엘 역사에서 쟁쟁한 선지자들은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선지자 민족이라고 해도 됩니다. 선지자를 점쟁이쯤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런 위험이 신명기가 선포되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 구절인 신 18:14절에서 모세는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는 가나안 원주민들을 따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선지자는 복술가나 점쟁이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직접 말씀을 들어서 백성에게 전하는 자입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자만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가리켜서 신탁(神託) 담지자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을 얻는다고 믿었다는 말은 거꾸로 그 말씀에서 떠나면 생명을 잃는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생명 심판대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는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19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이런 구절은 오용되기 쉽습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국물도 없어!” 하는 식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의 엄중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한 생명의 깊이를 이해할 때만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허한 말이 됩니다. <서편제>라는 영화를 보셨는지요. 소리꾼 아버지가 아들과 딸에게 소리를 가르칩니다. 아들은 견디지 못하고 도망갑니다. 딸은 혹독한 소리 훈련을 받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소리에 더 전념하게 하려고 약초를 이용하여 딸의 눈을 멀게 합니다. 딸은 결국 득음의 세계에 들어갔습니다. 도망간 아들에게 아버지가 한 말이 있습니다. 소리는 네가 원하는 밥이나 떡보다 더 좋은 거야. 소리의 세계를 몰랐던 아들은 소리의 예술 세계로부터 벌을 받은 겁니다. 소리의 세계를 외면하면 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벌을 중병에 걸린다거나 사업이 망하는 일로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어떤 사태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생명 창조주이시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생명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없는 삶을 오히려 편하게 여깁니다. 그걸 행복이라는 말로 포장합니다. 착하고 인격적인 사람이 술에 취해서 별과 꽃과 비와 눈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상태와 비슷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낸 이유는 더 잘 먹고 더 좋은 옷 입고, 더 재미있게 살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살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없으면 애굽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살아도 실제로는 살아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멋도 모르고 모세를 따라 나왔던 이들 중에서 고난이 닥쳤을 때 실망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간 사람도 많았습니다.
선지자의 역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백성들이 벌을 받기도 하고 생명을 얻기도 하기에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되려는 사람은 모세처럼 애굽에서 하나님 말씀 없이 사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이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위험하고 두려운 일입니다. 두려운 일이나 삶과 죽음의 원초적인 경계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선지자의 운명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설교자로 활동하는 목사는 선지자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입니다. 목사는 당연히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고, 신학 공부도 게을리하지 말고, 인문학 서적도 탐독하면서 구도 정진의 길을 가야만 제대로 된 설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만 키우면, 또는 신자들이 은혜를 받기만 하면 좋은 설교자가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밖으로 표시는 나지 않으나 하나님 말씀을 종말론적 생명 사건으로 알아듣지 못하면 그 설교자는 말씀으로부터 벌을 받습니다. 말씀에서 점점 더 소외됩니다. 사람의 기분을 맞추기에 바쁩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설교자의 겉모습을 취해도 실제로는 설교자의 영혼이 병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 사건으로 알아듣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선지자라는 타이틀이 있었으나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설교자들이 있었습니다. 렘 28장에서 보듯이 선지자 하나냐는 예레미야와 정반대로 설교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와 다투다가 같은 해에 죽었다고 합니다. 선지자의 신탁 행위는 잘못 듣는 백성을 죽이기도 하지만 자신도 죽입니다. 그래서 위험한 일입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본문 20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가장 궁극적인 진술로 들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19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벌이 내린다고 했고, 여기 20절에서는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죽임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은 말을 전할 때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못 전하는 일이 두 가지로 언급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대고 자기 마음대로 전하는 것이며, 둘째는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첫째는 위선적인 선지자를 가리키고, 둘째는 무식한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위선과 무지를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그럴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인격적이고 심성이 착해도 위선과 무지에서 간단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정치인들도 그럴 수 있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이나 법조인과 의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점에서 그 책임은 그 어떤 이들의 책임보다 더 무겁습니다. 그걸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위선과 무지를 제가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코로나19 사태와 연관해서는 간단하게나마 짚어야겠습니다. 요즘 교회가 욕을 많이 먹고 있습니다. 교회 중심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많이 나왔으니 욕을 먹을만합니다. 더구나 확진자가 조금씩 줄어드는 때에 맞춰서 펑펑 터지곤 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확진자가 많이 나왔다는 그 사실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코로나19라는 국가 재난에 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태도입니다. 몇 달 전인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이들이 국무총리를 찾아가서 예배를 자유롭게 드리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일반 시민들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요. 교회도 역시 유흥업소나 헬스장과 다를 게 없다고 보았겠지요. 가톨릭이나 불교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교회로서도 할 말은 있습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전염될 수는 있습니다. 전국 교회 숫자와 비교하면 확진자가 나온 교회는 극히 일부입니다. 그리고 정부의 방역 대책이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닙니다. 방역과 내수경제의 역학관계를 아무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문가들의 말을 따르는 게 그래도 최선입니다. 정부의 방역 대책을 교회에 대한 박해로 오해하는 교회 지도자들도 있을 정도이니 위선과 무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지자로서의 교회 정체성
한국교회의 위선과 무지에는 일반 신자들의 책임도 적지 않습니다. 설교자를 신의 대리자쯤으로 여깁니다. 무슨 말을 들어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겠거니, 그리고 신자와 교회를 위한 말씀이라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목사도 위선과 무지에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목사의 설교나 가르침을 냉소적으로 대하는 기독교인들이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은 것을 제멋대로 외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있어야겠지요. 오늘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21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선지자의) 그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신학을 전공한 이들의 설교를 분간하기는 쉽지 않긴 합니다. 대형 교회의 목사라는 권위에 편승해 있으면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최소한이나마 합리적으로 사유할 줄 알면 웬만한 내용은 구분이 됩니다. 당장은 안 된다고 하더라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어딘가 왜곡되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요? 교회 조직에 너무 깊이 들어갔기에 좋은 게 좋다는 식의 교회 생활에 길든 결과이겠지요. 아니면 위선적이며 무지한 선지자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신 18:22b 말씀과는 반대로 사이비 이단 교주를 추종하는 교도들처럼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이 고대 이스라엘의 선지자만이 아니라, 그리고 오늘날의 설교자만이 아니라 일반 기독교인과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고 살아야 할 오늘날의 선지자입니다. 교회와 기독교인 개개인의 운명은 그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거기서 생명을 얻을 수도 있으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으나 소외당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말씀을 우리에게 실제로 주시는지, 그 말씀을 우리가 제대로 알아듣는지, 그리고 그 말씀을 세상에 제대로 전하는지, 아니면 거꾸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허망한 것에 매달려 있는지를 깨어 있는 영성으로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런 물음 없이 우리는 기독교인의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없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선지자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생명의 근원을 우리가 붙들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코로나19라는 대재난의 시절에 교회가 한국 사회에서 민폐 집단으로 욕을 먹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세상에서 욕먹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건 아닙니다. 마녀사냥당하는 동성애자 편에 서고, 외국인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가난한 북한을 포용하고, 반전 운동과 생태 운동에 앞장서는 일로 욕을 먹는다면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거꾸로 갑니다. 생업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유형무형의 실질적인 피해를 줬습니다. 이윤 창출을 위해서 오염물질을 배출하다가 들킨 기업체와 다를 게 없는 형국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은 말을 전하는 선지자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벌을 받고, 죽임을 당할 운명입니다. 이미 죽임을 당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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