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강림과 구원 경험
(행 2:14-21)
영과 말의 능력
오늘 설교의 성경본문이 포함된 행 2:14-36절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설교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선포된 최초의 설교입니다. 이 설교를 실제로 베드로가 한 거냐, 아니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나중에 편집한 거냐 하는 논란은 있습니다. 어느 쪽이었든지 이 설교가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 설교의 핵심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할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시고 높이셨습니다. 설교의 결론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고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었습니다. 베드로의 답변이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하면서,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곧 구원이었습니다.(행 2:40) 이날에 세례를 받은 사람이 3천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초기 기독교의 선교 역사에서 일어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사실을 본격적으로 전하기 전에 앞 대목에서 요엘서를 인용했습니다.(행 2:14-21) 그 내용이 오늘 설교의 본문입니다. 베드로는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혔습니다.(행 2:16) 이어서 욜 2:28절 이하의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의 도입부에서 요엘서를 인용한 이유는 예루살렘에 있는 어떤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기 때문입니다.(행 2:13) 술에 취했다는 것은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뜻입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술에 취한 사람처럼 살았을까요? 무엇을 근거로 사람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몰아붙였을까요? 이에 관한 배경을 이해하려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그것을 행 2:1절 이하에서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처음 맞은 오순절이었습니다. 유월절 후 50일이 지난 절기를 가리켜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이 유월절과 더불어 가장 중요하게 지키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50일이 지났으며, 승천 후로 10일이 지난 때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이 예루살렘의 한 집에 모였습니다. 그들을 일반적으로 120 명의 성도라고 부릅니다.(행 1:15) 그들은 그곳에서 기도하고, 성만찬을 행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 집에 갑자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강한 바람과 불길입니다. 그 현상에 대해서 지금 우리가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모두 종교적인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호렙 산에서 불길을 보았으며, 엘리야도 강한 바람 뒤에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강력한 영적인 경험입니다. 그걸 가리켜 사도행전 기자는 ‘성령의 충만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2:4)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120명의 성도들은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말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그것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1) 성령이 그들로 말하게 하셨습니다. 2) 그들은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과 말은 깊이 연결됩니다. 성령 경험은 말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시인들도 그런 고백을 합니다. 자신들이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언어가 말을 건다고 합니다. 말, 언어, 문자는 성령의 힘입니다. 성령을 경험한 사람은 무언가를 말합니다. 말을 청산유수로 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새로운 생명세계에 대한 경험이 말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달라지면 말이 달라집니다. 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는지를 알려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물론 말만 그럴듯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런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성령이 시키는 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말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교회 공동체에 전승되다가 결국 성서가 되었습니다. 그 뒤로 성서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적 경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말의 능력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현상이 방언입니다.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가 밖으로 튀어나오는 현상입니다. 새로운 말의 능력이 방언으로만 나타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신약성서 기자들은 방언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 말하는 성서기자들은 대표적으로 바울과 누가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방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 이상한 소리였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그런 열광적인 종교현상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그런 현상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교회의 질서를 허물지 모른다는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서 고전 14장에서 방언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누가가 전하는 방언은 그런 현상과 다릅니다. 외국어 능력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뒤에 기독교인들이 갈릴리 사람들이 쓰는 말(아람어)로 복음을 전했는데, 마침 오순절을 맞아 여러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은 각기 자기나라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본 사람들이 내린 결론은 기독교인들이 새 술에 취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횡설수설한다는 겁니다. 그런 횡설수설이 우연하게 각기 다른 나라 말로 들렸다는 뜻이겠지요. 과연 이런 현상이 가능할까요? 이런 현상이 지금도 일어날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베드로가 새 술에 취했다는 말을 듣고 시작한 설교의 첫 대목에서 요엘서를 인용했다는 사실을 살피면 자연적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영과 예언
선지자 요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세에 영을 모든 사람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본문은 구약 요엘서의 내용과 거의 똑같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의 영과 예언입니다. 젊은이들의 환상과 늙은이들의 꿈은 모두 예언에 속합니다. 누가는 요엘서를 인용하면서 18절에서 요엘서에는 없는 ‘예언’을 한 마디 보충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예언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언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이 모르는 미래의 일을 미리 알리는 능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같은 경우가 그것입니다. 점쟁이나 무당들이 사람의 미래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도 예언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성서는 그런 것을 예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미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마지막 때에 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성서가 말하는 예언은 설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대한 해명입니다. 요엘이 말하는 영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설교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에게 관심을 기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서, 그분의 약속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이 곧 예언이고 설교입니다.
사도행전이 말하는 방언과 요엘이 말하는 예언은 물론 현상적으로 다릅니다. 방언은 남이 알아들을 수 없는, 또는 특정한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이상한 소리이고, 예언은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입니다. 방언에 대한 증거자료로는 요엘서의 내용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사실을 잘 몰라서 요엘서를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방언이나 예언은 모두 언어 능력이라는 점에서 서로 통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가 모두 영 경험에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즉 언어의 능력이 영 경험에서 주어졌습니다. 사도행전 기자인 누가는 바로 그 사실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분명하게 알아야 할 사실은 방언이라는 현상 자체는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것이 중요했다면 굳이 요엘서를 인용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이들을 향해서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겁니다.
사도행전 기자가 요엘서를 인용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방언과 예언의 지향점이 동일하게 선교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방언과 예언의 방향은 근본적으로 선교 지향적입니다. 방언 문제는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나왔습니다. 성령을 경험한 그들은 예루살렘 거리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들은 갈릴리 사람들의 말로 전했지만 외국에서 온 여러 나라 사람들이 각기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런 현상이 그들에게는 아주 당혹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원시 기독교인들이 방언을 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이 그들을 강력한 방식으로 이끌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요엘의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통치를 선포하는 예언은 선교를 목적으로 합니다. 예언은 자기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 설교는 선교를 위한 것입니다.
이런 선교 지향적 특성은 사도행전 기자가 인용한 요엘서의 마지막 구절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2:21, 욜 2:32) 뒤이어 행 2:20-36절에서 그 주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주님은 바로 예루살렘 주민들이 로마 총독의 손을 빌려 죽였으나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신 구원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의 초기 기독교인들과 지난 2천년 역사에 살았던 모든 기독교인들과 지금 우리 모두는 바로 이 사실에 자신의 운명을 건 사람들입니다. 이를 전하는 것이 예언이고, 방언이고, 설교이고, 선교이고, 또한 성령 경험의 열매입니다.
구원 경험
오늘 이 자리에 앉아계신 분들 중에는 위와 같은 사실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 시간에 조금 더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하신 분들은 긍정적인 대답에 무게가 가겠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은 확신이 서지 않을 겁니다. 어느 쪽이었든지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식하고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지금 저는 경건의 모양이라는 차원으로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은 신앙의 경륜만 있으면 저절로 주어집니다. 기도를 세련되게 하고, 남이 인정할 정도의 교회나 사회봉사도 가능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훨씬 근원적인 차원입니다. 믿음의 능력을, 구원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믿음은 믿는 척 포즈를 취하는 게 아니라 믿음의 능력에 휩싸는 겁니다. 생명의 힘에 휩싸이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다르게 생각할 겁니다. 믿음생활을 뭐 그렇게 절대적인 차원으로, 뭔가 신비한 차원으로만 강조할 필요가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예,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 뛰어난 신학자가 영성가가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별로 없기도 합니다. 돈이 없으면 기가 죽고, 자식이 말썽을 피우면 속상합니다.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런데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실제로 살다보면 신앙이 있는 건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최소한 교회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만 해도 대견해보입니다. 옳습니다. 저도 기본적으로 유별나게 신앙생활 하는 걸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정과 사회생활을 거의 팽개치다시피 하면서 교회생활에 몰두하는 건 누가 봐도 건강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믿음의 능력은 구원에 대한 집중력을 가리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요엘의 외침에 우리가 집중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얼마나 교회에 잘 나오느냐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교회에 아무리 잘 나와도 구원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교회에 나오지 않더라도 구원에 집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이 손에 잘 잡히지 않으면 평화라는 말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우리는 평화에 집중하고 있을까요? 안식이라는 말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우리의 영혼은 안식을 누리고 있나요? 이런 질문에 자신이 없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 것은 아예 생각해보지도 않았을지 모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분들에게서 오히려 그런 현상이 많이 일어납니다. 기계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뿐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제쳐두고 사회 구조가 요구하는 것에 기계적으로 맞춰 살아가듯이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눈을 뜨라고 아무리 외쳐도 그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뭔가를 열정적으로 하긴 하는데 영혼에 안식도 없고, 평화도 없고, 영생에 대한 참된 기쁨도 없습니다. 그걸 문제로 의식하지도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에 대해서 무감각한 사람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실제적인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구원에 대한 관심, 거기에 눈을 뜨는 것은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초기 기독교의 시작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성령 경험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생명 현실에 눈을 떴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들과 똑같습니다. 성령 경험을 통해서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할 주님이라는 사실에 실제로 마음이 갑니다. 그리고 구원에 집중하게 됩니다. 거꾸로 구원에 온 영혼을 기울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성령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진지하게 자신에게 질문해보십시오. 나는 성령을 경험한 사람인가, 나는 구원을 경험한 사람인가?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성령강림 주일, 5월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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