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불
눅 3:7~18, 대림절 셋째 주일, 2021년 12월12일
누가복음 3:7~18절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설교는 매우 과격하게 들립니다. 자신에게 세례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격려받고 칭찬받아 마땅한 그들에게 듣기 민망할 정도로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 이유는 형식적으로 세례받아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의미 없는 정도가 아닙니다. 자신을 종교적인 포장지로 포장하면 위선에 떨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차라리 자기가 악하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하면 새로워질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자기가 적당하게 선하다고 생각하기에 새로워질 가능성이 막히는 겁니다. 이를 디이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값싼 은혜’라고 규정했습니다. 삶의 무게는 없고 공허하고 형식적인 신앙 행태를 보인 히틀러 집권 당시 독일 그리스도인을 비판한 겁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세례 요한의 설교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는 8절을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회개의 열매
속 시원한 설교입니다. 9절까지 포함해서 볼 때 요한은 세 가지 점을 짚었습니다. 하나는 삶으로 회개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혈통 안일주의에 떨어지지 말라는 것이고, 셋째는 심판의 긴박성입니다. 전체를 다시 요약하면 정신 차리고 지금 당장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설교입니다. 누가 들어도 양심이 찔리는 설교입니다.
요한은 말로만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제사장 아버지를 두었으나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황량한 빈 들에서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요한은 빈 들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습니다. 자연인도 이런 자연인이 없을 정도로 거칠게 살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헤롯 왕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실제의 삶이 담보되었기에 많은 사람이 요한의 설교에서 한편으로는 깊은 감동을, 즉 은혜를 받았고, 다른 한편으로 큰 두려움을 느꼈을 겁니다.
10절에 따르면 거기 모인 사람들이 요한에게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자신들의 삶에 문제의식을 느낀 겁니다. 요한의 대답이 아주 구체적으로 이어집니다. 옷 두 벌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먹을 것이 충분한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했습니다. 세리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공무원입니다. 그들에게도 요한은 대답합니다.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법을 이용해서 착복하거나 불로소득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군인들도 나옵니다. 그들에게 요한이 말합니다.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한마디로 자기 분수를 잘 지키면서 정의롭게 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사는 게 쉽지 않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외쳤던 경제 정의, 사회정의 문제가 21세기 오늘날까지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정의가 무엇인지 누구나 동의할만한 개념규정이 어렵기도 합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참조)
정의를 요즘 언어 감각으로 바꾸면 공정입니다. 공정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누구나 합니다. 지금 정부가 공정하지 않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가 그런 경향을 보입니다. 금수저, 흙수저라는 자조적인 표현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해가 갑니다. 부모를 잘 만나서 편안히 먹고 사는 사람이 있고, 가난한 부모를 만나서 뼈 빠지게 고생해도 미래가 불안한 사람이 있는 세상이라는 걸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공정하게 경쟁하게 해달라는 그들의 요구는 틀린 게 아닙니다. 문제는 처음부터 경쟁에 끼어들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인기 있는 어느 공기업에서 1천 명 채용 인원 중에 장애인을 10% 뽑겠다고 하면 비장애인들이 공정에 어긋난다고 반발할 겁니다. 경쟁률 높은 의대 입시에서 20%는 수능 시험 낮은 학생 중에서 뽑는 대학입시 제도는 공정할까요, 공정하지 않을까요? 논란이 끊이지 않을 겁니다. 이런 모든 논란은 자기가 불이익을 당한다는 생각에서, 또는 다른 사람들처럼 많은 이익을 얻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발생합니다. 개인적인 이익이냐 불이익이냐 하는 관점보다는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든다는 관점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면 이런 논란은 아예 벌어지지 않습니다. 수도원 수도사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도덕적인 변화
세례 요한의 청빈한 삶과 열정적인 설교를 접한 당시 민중들은 그가 혹시 그리스도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럴만합니다. 당시 유대 민중들은 자기들을 구원해줄 메시야(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가 오면 자신들의 불행이 완전히 해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런 메시야 대망이라는 민중의 열망에 불을 댕길만한 조건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요한이 나서서 “나를 따르라.” 했으면 수천, 수만 명이 헌신적으로 따랐을 겁니다.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날도 “내가 세상을 확 바꿀 테니 나를 따르라.”라고 외치는 정치인들이나 기업가들은 많습니다. 어떤 이를 메시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민중들도 많습니다. 요한은 민중들의 기대와 달리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16, 17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을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병행구인 요 1:20절에는 그리스도 문제가 더 분명하게 언급됩니다.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요한은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올 것이라고, 그가 물로 세례를 준 자기와 달리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그 능력이 많으신 분은 추수 때에 알곡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웁니다. 그에 의해서 개인의 운명과 세상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을 묘사함으로써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요한과 예수의 차이점이 세례라는 종교의식에 대한 다른 용어로 설명되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물로 베푸는 것이고, 예수의 세례는 성령과 불로 베푸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런 차이가 오늘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21세기 현대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세례라는 말도 낯선데 거기다가 물과 성령과 불이 섞여 있으니까 외계인의 세계에서 온 말처럼 들립니다.
우선 세례라는 말을 단순히 종교의식으로만 제한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종교의식이라는 말이 옳으나 그 의식은 종교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세례(밥티스마)는 씻는다는 의미의 그리어 동사 ‘밥티조’에서 왔습니다. 얼굴을 씻는 이유는 얼굴에 먼지와 때가 묻었기 때문이듯이 세례는 인생살이의 먼지와 때를 씻어내는 의식입니다. 씻어내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겠다는 생각이 없으면 세례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밖에 나가지 않고 ‘방콕’하면서 은둔할 사람은 씻지 않아도 됩니다. 보통 친구가 아니라 존경하는 스승이나 애틋한 사람을 만날 계획이라면 더 깨끗이 씻을 겁니다.
여기서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풀었다는 말은 도덕적으로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짚었듯이 요한은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려면 사람이 도덕적으로 변해야 합니다. 두 벌 옷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눠줘야 합니다. 일종의 경제 정의 실현입니다. 국가의 기능이 강력한 오늘날은 세금의 재분배를 통해서 경제 정의를 실현합니다. NGO 활동도 경제 정의 실현에 없어서는 안 될 요인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아프리카 기아 어린이를 위한 기금 모금에 동참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교회 형편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일 년 예산 중에서 30% 정도는 이런 일에 사용되는 게 바람직합니다. 우리 교회도 그런 쪽으로 방향을 정해서 나아가고 있는데, 아직은 약간 모자라는 형편입니다.
문제는 이런 도덕적이고 개혁적인 변화가 우리의 근본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인간으로서는 최선이지만 구원의 길 자체는 아닙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보다 더 개혁적이고, 더 도덕적이고, 더 헌신적이고, 더 이타적으로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옷을 나눠주고 먹을거리를 나눠줄 수 있습니다. 불로소득을 취하지 않고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공의를 무너뜨리지 않는 방식으로 삽니다. 요한이 말하는 대로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도 생명 충만감이 보장되는 건 아닙니다. 그런 회개의 열매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상대적으로 자기가 괜찮게 산다는 사실만 확인됩니다. 여전히 자기중심이고 교만하고 개인적인 차이는 있으나 여전히 위선적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진보적이고 개혁적으로 살아도 그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저 사람은 혼자 깨끗한 척하더니 다른 사람과 똑같아, 하는 비판입니다.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더 비판받습니다. 법을 정의롭게 행사해야 할 판사도 온정이나 사적인 이익에 치우쳐서 법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사회정의를 외치던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자기의 사적 이익에 예민할 수 있습니다. 그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도덕적이거나 개혁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업적만으로 우리 생명이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업적은 물로 세례를 받는 것뿐입니다.
존재론적 변화
오늘 본문은 능력 많으신 분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푼다고 말했습니다. 물로 베푼 요한의 세례를 도덕적인 변화라고 한다면, 성령과 불로 베푼 예수의 세례는 존재론적인 변화입니다. 물은 우리의 겉모양을 씻어주고, 불은 우리를 태웁니다. 성령의 불은 우리를 세련되고 모범적인 인간이 되도록 우리를 씻어내는 게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질적으로 바꿉니다. 물의 세례를 물리적 변화라고 한다면 불의 세례는 화학적 변화입니다.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요한의 세례는 인간에게 초점이 있다면 예수의 세례는 하나님에게 초점이 있습니다. 요한은 인간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외쳤다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선포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열매를 삶으로 맺으라고, 그래서 세리와 군인들에게 정의롭게 살라고 말했으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리와 군인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들과 세리들을 향해서 반듯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즘 식으로 바꿔서, ‘꼰대’처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 보이려고 애쓰기보다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지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관점이 완전히 달라진 겁니다. 사람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사람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회개혁과 경제 정의에 대한 요한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를 실제로 변하게 하는 궁극적인 능력이 무엇인지를 우선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보면 실망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존경은 할 수 있지만 믿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사랑할 줄 모릅니다. 사랑의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흉내를 내는 겁니다. 하나님만이 창조주이듯이 하나님만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창조 능력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제대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철부지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그가 마음을 바꿔서 엄마 마음에 들려고 애를 씁니다. 기특하기는 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 마음에 들게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를 낳은 엄마의 사랑을 마주하는 게 이 아이가 생명을 얻는 바른길입니다. 엄마와 철부지 아이 이야기는 비유입니다. 실제 엄마는 자녀를 온전하게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무엇이 아이에게 좋은지를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사랑의 능력은 오직 창조주에게만 있기에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우리는 사랑의 능력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요한이 가르친 대로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해도 괜찮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삶의 열매가 없어도 문제는 없습니다. 너무 극단적인 설명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두 벌 옷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는 회개의 열매를 맺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어딘가의 지점에서 한계를 느낄 겁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눠주지 않을 이유를 찾는 자신을 발견할 겁니다. 저 사람은 왜 나눠주지 않고 사느냐고 불평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요한이 가르친 대로 회개의 열매를 맺습니다. 더 율법적으로 살 것입니다. 더 수행하듯이 살 겁니다. 더 공부할 것이고, 더 기도할 것이며, 더 예배에 열심을 낼 것이며, 더 베풀고, 더 너그럽게 행동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놀라워서 그의 영혼이 이미 배부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으로 채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이미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살기에 다른 것으로 조금 손해 봐도 상심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변한 겁니다.
이런 존재의 변화는 현실에서 너무 어려울 것처럼 느껴지지요?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바로 성령과 불입니다. 본문 17절에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는 분이 추수 때에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성령의 불이 우리 삶의 쭉정이를, 즉 먼지와 때를 태운다면 우리는 당연히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를 바울의 표현으로 바꾸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의 연봉이 반으로 줄었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하늘이 무너진다고 생각했겠으나 이제는 그것으로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데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액의 연봉으로도 그는 겨울나무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느끼고 기뻐하는 데에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두 배의 연봉과 겨울나무의 아름다움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궁극적인 변화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았기에 자기에게 과몰입하지 않으며, 자기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신앙에서만 대림절이 가리키는 기쁨과 찬송의 삶을 살아낼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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