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9:1-7)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9:1-7절에는 네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차례대로 거명하면, 아볼로, 바울, 요한, 예수입니다. 실제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바울과 익명의 기독교인들입니다. 1절의 보도에 따르면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는데, 7절에 따르면 그 숫자가 그 제자들의 숫자가 열두 명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시작이 특이합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라고 합니다.(행 19:1a) 이 이야기를 기록한 누가는 이야기 중심에 아볼로가 등장하지 않는데 무슨 이유에서 이런 구절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걸까요?
아볼로는 바로 앞 구절인 행 18:24-28절에 나옵니다. 그는 아프리카 북쪽 해안 도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입니다. 그 당시 알렉산드리아 학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적인 전통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볼로는 말을 잘 하고 성경에도 능통했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일찌감치 믿고 중요한 설교자요 신학자요 선교사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에베소에 와서도 말씀을 전했는데, 안타깝게도 요한의 세례만을 알고 있었습니다.(행 18:25)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에게 복음의 진수를 정확하게 전했습니다. 아볼로는 에베소를 떠나 바다를 건너 유럽 지역으로 갔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바울의 에베소 체류를 보도하면서 아볼로를 거론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말씀을 전하던 아볼로의 가르침이 여전히 에베소 지역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것입니다. 그 아볼로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서 바울과 대화를 나눈 열두 명의 제자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으냐?” 이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이들의 대답입니다. “요한의 세례니라.” 바울은 이들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을 뿐입니다. 그는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믿으라고 선포했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열두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바울의 세례 안수를 받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으며, 그 증거가 방언과 예언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일반적입니다. 세례는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받아야 하는구나, 그리고 세례를 받으면 성령이 임하게 되고, 방언과 예언을 하게 되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자신과 연결시키게 되면, 무언가 불안감도 없지 않을 겁니다. 나는 세례를 받기는 받았지만 성령을 받은 증거가 없다는 불안감 말입니다. 방언과 예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거꾸로 방언이나 예언을 하는 사람들은 이게 바로 성령을 받은 증거구나 하고 뭔가 뿌듯할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방언과 예언은 핵심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성령의 임재를 그런 방식으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건 그 시대의 특징이기도 하고, 한계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임재 자체입니다. 성령 경험이며,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임재는 아직은 미숙한, 그래서 신학적 논란이 백가쟁명 식으로 표출되던 초기 기독교가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도 이런 논쟁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와 바울의 이방 기독교 사이에 치열한 신학 논쟁이 전개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지금의 팔레스틴과 이스라엘에서 벌어지는 전쟁처럼 ‘제로, 섬’ 게임과 같았습니다. 이 양자 사이에 타협점은 없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가 아니라 토라와 할례를 함께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옳다는 사실을 성령의 임재로 증명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갈 3:2,3절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성령의 임재가 관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제자들에게 당신들이 성령을 받았는가, 하고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똑같은 기독교인들이었지만 에베소 제자들은 바울이 복음 진리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성령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가 사용한 문장을 잘 봐야 합니다. 이 제자들은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말한 게 아니라 성령에 대해서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뒤이어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임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이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누가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은 이미 창조 사건 때부터 이 세상의 모든 생명 사건에 개입하는 영이었습니다. 자신이 성령에 대해서 전해 듣지 못했다는 것과 받지 않았다는 말은 다릅니다. 성령을 잘 모르면서도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정식으로 음악대학교에 다니지 않더라도 음악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실정이 이런데도 지금 갈라디아서와 마찬가지로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서도 바울이 성령을 받았느냐 하고 다져묻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음 투쟁
초기 기독교는 지금 여러분이 예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형편에 처해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투쟁에 참여한 것입니다. 아직 누가 승자인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것에 대한 흔적이 앞에서 언급한 갈라디아서만이 아니라 고린도서에도 나옵니다. 고린도교회에 심한 분쟁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 파, 또는 아볼로 파, 게바 파, 심지어 그리스도 파라고 자처했습니다.(고전 1:12) 이들이 각각 당시에 경쟁적이었다는 말입니다. 이중의 한 사람이 바로 아볼로입니다.
아볼로는 당대의 뛰어난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한 파를 형성했습니다. 그 뿌리는 세례 요한에게 이어집니다. 바울이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하고 물었을 때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볼로는 바로 이 요한의 세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핵심으로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모두가 개혁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불을 토하듯이 혁명적 변화를 외친 요한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에게 요한은 바로 메시아처럼 보였을 겁니다. 아볼로를 통해서 요한 신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지금 바울을 통해서 예수의 복음을 이어받은 사람들과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경쟁은 지난 2천년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서도 일어납니다. 자칭 진보인사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예수처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는 이유는, 그래서 사회적 영향력을 점점 잃어가는 이유는 개혁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옳은 주장입니다. 오늘 한국사회에서는 세례 요한과 같은 메시지, 회개의 세례가 필요합니다. 이들과 달리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이면서 개혁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사회윤리를, 후자는 개인윤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양쪽 모두 고린도전서와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볼로 파와 비슷합니다. 회개의 세례가 그 중심입니다.
바울은 이들과 싸웠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토라와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 기독교인들과 싸웠고, 고린도서와 사도행전에서는 요한의 회개 세례의 전통을 강조하는 아볼로 파와 싸웠습니다. 바울이 싸운 이들의 특징은 혼합주의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만 여전히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토라와 할례와 도덕적 변화입니다. 이에 반해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복음의 토대로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는 더 이상의 부가적인 요소가 필요 없습니다. 토라와 할례도 상대적인 가치가 있을 뿐이고, 요한의 회개 세례도 상대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아볼로 파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명확하게 전달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그리스도로 내세우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요한은 오히려 자기 뒤에 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전했습니다. 요한의 도덕성과 개혁과 변화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예수와 존재론적으로 하나 되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존재론적으로 하나 되는 길이 바로 그를 믿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믿고, 그의 운명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입니다.
이런 바울의 주장이 그 당시 여러 기독교 파들에게 곧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바울의 주장은 너무 극단적이라서 오히려 거부감이 있을 정도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세상이 기독교를 향해서 무엇을 요구합니까? 세례 요한처럼 살아보라는 요구가 가장 강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의식이 있는 사람들도 그걸 주장합니다.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그런 요구는 강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바울이 설립한 교회들이 크게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이런 부분에서 타협하거나 절충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그대로 믿고 나갔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아니라 예수의 세례가 ‘답이야.’라고 말입니다.
바울의 주장이 옳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울과 바울을 변호하고 있는 누가의 설명에 따르면 성령이 그 대답입니다. 누가는 바울이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안수를 하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리고 그 현상을 방언과 예언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앞에서 방언과 성령은 그 당시에 다른 방식으로는 성령의 임재를 설명할 길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사용된 단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그런 현상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이 그런 현상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그 사건에 임재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가 해명하는 성령과 세례의 관계가 너무 모호하다고, 그건 너무 일방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옳습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당장 가슴이 뜨거워진다거나 불을 받는다거나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세례의 안수를 받을 때 성령이 임재했다는 누가의 해명은 더 근본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다.”라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성령이 임재했다는 말은 생명의 영이 임했다는 뜻입니다. 누가는 그것을 방언과 예언으로 표현했지만 반드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현상이 없을 때가 많을 뿐만 아니라 없는 게 오히려 더 정상적인 것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성령의 임재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활동은 우리의 오감 경험, 우리의 인식 범주를 뛰어넘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몇 가지 경험으로 성령의 임재를, 성령의 활동을 재단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에 성령이 함께 했다는 말은 바로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생명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입니다. 바울의 이방 기독교는 바로 이 사실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온 인류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죄의 용서는 바로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당한 인간은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 회복의 길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생명 사건이며, 따라서 성령의 사건입니다. 교부들은 성령이 바로 하나님과 ‘그리고 아들로부터’(필리오 께)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아들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에 성령이 임한다고 보는 것은 당연한 논리입니다.
저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기독교 교리의 초보를 말씀드렸습니다. 진부하게 들리시나요? 그렇다면 바울이 왜 이런 문제로 다른 학파들과 전면전을 벌였는지를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바울에게 세례 요한의 가르침은 필요한 것이지만 절대적인 게 아니었습니다. 요한의 회개 세례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본질적인 게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없는 거 보다는 낫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인간과 세상을 쓸모 있게 고쳐서 구원받게 하겠다는 개량주의가 결코 아닙니다. 이런 요구들이 강하게 작용하면 결국 복음의 본질은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그런 유사 기독교와, 혼합적인 기독교와 싸우지 않을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례 요한의 회개 세례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닌지요. 아니 예수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와 더불어 요한의 세례도 더불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요. 오늘 예수님만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 성령의 임재라는 증거가 나타나고 있을까요? 자신이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려면 이런 질문을 적당하게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이런 질문 앞에서 우리에게 두 가지 신앙적인 태도가 요청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세계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곧 성령의 임재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받아들인 이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을 위해서 2천 년 전 바울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투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투쟁이 오늘 분문에서는 성령과 세례에 대한 질문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200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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