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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성령을 받으라! (요 20:19-23)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19-23, 성령강림 주일, 2011년 6월12일

 

     오늘의 제3독서인 요한복음 20:19-23절은 부활 전승에 속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여러 부활 전승 중의 하나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고 무덤에 묻힌 날은 금요일 늦은 오후입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그 다음날 토요일 저녁까지는 유대인들이 거룩한 날로 지키는 안식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한 곳에 모였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지금의 주일 저녁입니다. 그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마리아가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했지만 제자들은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은 그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고, 예상하지도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사면초가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들의 스승인 예수님은 신성모독과 사회소요죄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당시에 가장 저주스런 사형법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죽은 사람을 존경하지 않았고, 불쌍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일종의 마녀사냥을 당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어려움을 당할는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실제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주변 세계로부터 많은 억압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순교를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이 난관을 어떻게 뚫고 나갈지 막막했습니다. 이들의 이런 심정을 요한복음 기자는 정확하게 묘사했습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았다고 말입니다.

     그 순간에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을 비는 인사는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인사말인 ‘샬롬’입니다. 이 인사의 영적인 의미를 알려면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한 가지는 제자들이 지금 큰 두려움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평강은 구원이고 빛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이런 샬롬의 축복을 베푸는 이가 바로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무덤에 묻혔던 예수님이 지금 죽기 이전의 인사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야말로 제자들이 큰 충격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습니다. 죽음 이전의 예수님을 죽음 이후의 현실로 경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은 이어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손과 옆구리는 십자가에 달리실 때 생긴 상처가 있는 부분입니다. 손에는 못 자국이,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있습니다. 그들 앞에 나타난 분이 바로 그들과 함께 3년 동안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제자들은 그 상처 난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이 이제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분은 옛날 그대로의 예수님은 아닙니다. 손에 못 자국과 옆구리에 창 자국이 있는 분입니다. 그것은 죽었다는 증거입니다. 죽었던 예수님을 현실에서 만났기 때문에 그들은 기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활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평강을 축원한 뒤에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 이런 말을 듣고 있는 제자들은 바로 전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닫고 숨었던 이들입니다. 두려움에 의한 현실도피가 그들의 실존이고, 더 나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제 세상으로 나갈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억지로 되지는 않습니다. 두려움에 갇혀 있는 한 불가능합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통해서 평화가 무엇인지 알았고,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고 경험했습니다. 그들의 삶이 전혀 새로운 영적 실존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실제로 평화와 기쁨에 휩싸인다는 말일까요? 실제로 두려움이 완전히 극복될 수 있다는 말일까요? 원칙적으로는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부활 경험의 초기에는 열광적으로 모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렇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의 평화와 기쁨이 늘 유지되는 게 아닙니다. 부활 경험이 사진을 찍어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경험이 늘 생생하게 유지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한 순간에 완전히 극복되는 게 아닙니다. 다시 두려움에 빠지곤 합니다.

 

     생명의 영, 성령

     오늘 본문은 그것을 배경에 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22절) 이런 말씀은 부활 전승과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부활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성령을 받으라는 언급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부활 전승은 주로 부활 현상 자체에 관한 것입니다. 새벽에 무덤에 갔더니 무덤이 비었다거나, 부활의 주님이 갈릴리로 갈 것이라는 천사들의 말이 그런 것들입니다. 요한복음만 성령을 받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부활 사건을 공관복음서처럼 단순히 서술하는 게 아니라 고유한 신학적 관점에서 해석했다는 뜻입니다. 바로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 경험만으로 자신들의 어려운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없었습니다. 부활은 승천으로 이어집니다. 부활의 주님은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부활의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었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 사실을 이미 앞에서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고별사의 한 대목인 요 16장은 오늘 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비슷한 상황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16:2)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야만 보혜사 성령이 그들에게 옵니다. 보혜사 성령은 죄, 의, 심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부활의 주님은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에 두려움 가운데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고난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제자들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성령은 무엇일까요? 성령은 누구일까요? 골방에 갇혀서 사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성령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귀신 비슷한 존재로 생각합니다. 심령술사들이 악한 영을 불러내거나 쫓아내는 것처럼 신자들도 성령을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성령 받아라!” 하고 큰 소리를 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성령집회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들은 집단적 히스테리나 집단 최면에 걸린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과 비슷합니다. 집회를 인도하는 이들의 손에 의해서 청중들이 쓰러지고 곤두박질치고, 고함을 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령이 왜곡되거나 좁은 의미로만 받아들여집니다. 대표적인 것은 오순절적 은사주의입니다. 방언, 신유, 축귀 등의 은사만을 성령 현상으로 간주합니다. 또 하나는 개인의 경건주의입니다. 개인적으로 성령을 받아서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을 신앙의 핵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요소들은 성경에 나옵니다. 따라서 그것을 완전히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극단적으로 치우친다는 것입니다. 마치 짝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가 자기의 경험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성령을 은사와 경건으로 제한시키는 이유는 성령을 받는다는 말 자체가 모호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명확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돈을 주고 물건을 사듯이 성령을 소유할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인가요? 성령이 충만한 교회의 모습은 어떤가요? 그걸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나요? 설교 시간에 아멘 소리를 많이 하는 교회인가요? 찬송을 뜨겁게 부르는 교회인가요? 성경도 성령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실증적인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그렇게 경험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여러분도 스스로 성령을 받았는지 아닌지 잘 모를 겁니다. 물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 바로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것만으로 우리가 늘 성령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제삼자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을 받았는지의 여부보다는 성령이 누구냐에 대한 성경의 대답을 아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만 자신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성령을 ‘루아흐’라 하고, 신약성경은 ‘프뉴마’라고 합니다. 루아흐나 프뉴마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람이고, 다른 하나는 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숨과 성령은 똑같은 의미입니다. 숨, 또는 바람이 바로 영이라는 뜻입니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면 식물이 살아나고 찬바람이 불어오면 죽습니다. 태아가 엄마 자궁으로부터 밖으로 나온 뒤에 숨을 쉬어야만 삽니다. 사람이 죽을 때 숨은 멎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성경이 가리키는 루아흐와 프뉴마는 ‘생명의 영’, 즉 살림의 영입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말은 곧 생명의 영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생명의 영에 사로잡히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능력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곧 생명의 영, 생명의 능력이란 무엇인가와 똑같습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말이 모호하다고, 그래서 그 말씀을 오해하기 쉽다고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생명의 영, 생명의 능력도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게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생산과 소비 중심의 현대사회를 보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사람과 자연을 살릴 것으로 기대하지만 오히려 파괴할 때가 많습니다. 산과 들을 뚫어 길을 내는 이유는 편리한 이동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파괴되는 부분도 적지 않을 겁니다. 자녀 교육도 그렇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는 생각으로 많은 걸 제공하기도 하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게 자녀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자녀를 파괴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심합니다. 생명이 무언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답은 죄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에서 죄를 언급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세상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의 용서를 위해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예배는 우리만이 아니라 세상을 대표하는 행위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무턱대고 용서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용서를 하려면, 또는 용서를 받으려면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할 일은 세상으로 하여금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세례를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능력인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은 곧 생명의 능력에 대한 원초적 경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영적인 세례를 베풀어야 합니다. 거짓 생명과 싸우십시오. 생명을 파괴하는 힘에 주눅 들지 말고 대항하십시오. 그것이 성령을 받은 증거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근본에서 살리는 영인 성령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십시오.

요한복음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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