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이해할 것도 같고, 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도 들 겁니다. 표면적인 뜻은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실체는 우리에게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서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겉으로는 아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모를 때가 많으며, 성서에 대한 이해가 짧은 사람들은 아예 귀를 닫아두는 일이 많습니다. 둘 다 바른 자세는 아니겠지요. 다른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성서를 읽을 때도 우선 아는 것부터 따라가는 게 최선입니다.
우리가 예배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공동번역은 오늘 본문의 소제목을 ‘성령의 약속’이라고 달아주었습니다. 친절하군요.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핵심은 성령의 약속에 대한 설명이라는 뜻이 됩니다. 일단 그렇게만 이해해도 오늘 말씀의 얼개를 대충 따라잡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 몇 가지 질문을 던지기만 하면 됩니다. 말씀을 읽고, 공부한다는 건 바로 텍스트에 대해서 정확하게 질문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과 같으니까요. 여러분은 무슨 질문을 먼저 하고 싶으신가요? 지금은 제가 설교하고 있으니까 제가 먼저 질문하는 게 좋겠지요.
첫 번째 질문은 ‘성령의 약속’을 누가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건 너무나 쉬운 질문이군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며, 약속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나기 바로 직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고별설교의 한 대목입니다. 고별설교는 요한복음 14-17장에 해당되니까 오늘 본문은 비교적 앞부분에 속합니다. 예수님이 고별설교를 하게 된 이유는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아주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이건 십자가 처형을 통한 죽음이기도 하고, 부활 후의 승천이기도합니다.
이 상황은 제자들에게 큰 위기입니다. 예수님이 살아있는 동안에도 제자 공동체는 크고 작은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유대교로부터의 억압, 공동체 내부의 분열이 그런 것들입니다. 이런 마당에 예수님마저 그들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정신적인 공황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 없이 제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이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어떤 분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금방 정신을 차렸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야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인지 알고, 또한 그것을 믿고 있지만 초기의 제자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본 빈 무덤, 장사지냈던 예수의 현현이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모두 해결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런 경험들은 훗날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 된 것이지, 처음부터 명확했던 것은 아닙니다. 초기에 그들의 모든 신앙은 뒤죽박죽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의 실체가 무엇인지, 부활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별로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신 뒤에 제자들이 처한 상황을 거의 절망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을 내다보고 계신 예수님이 이제 제자들에게 말씀을 미리 전하고 있습니다. 요 14:1절에서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는 말씀도 예수님이 제자들의 곁을 떠났다는 상황을 전제합니다. 제자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마치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어머니를 잃은 아이에게 새어머니가 있어야 하듯이 제자들에게도 그런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성령은 제자들에게 좋은 새어머니와 비슷합니다. 이 말을 새겨서 들으십시오. 성령을 실제로 새어머니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비유적으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요 14:16,17a)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게 된 사건이 바로 기독교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만약 성령이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싹을 틔우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성탄절, 부활절과 더불어 기독교의 삼대절기라 할 수 있는 성령강림절입니다. 기독교가 성령강림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위에서 설명한대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 처음 맞는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사실을 보도합니다.(행 2:1-4) 그 뒤로 사도행전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와 일치합니다.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는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지금도 교회와 기독교인은 모두 성령에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분들에게는 위의 내용이 별로 새로울 게 없을 겁니다. 여기서 머물지 말고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질문해야겠습니다. 처음 질문은 누가 성령의 약속을 주었는가, 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두 번째 질문은 우리의 존재 근거인 그 성령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성령이 누구인지에 대한 성서의 설명을 듣는 게 중요합니다. 17절은 ‘프뉴마 테스 알레테이아스’(진리의 영)이라고 표현했으며, 26절은 ‘프뉴마 토 하기온’(거룩한 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두 표현의 공통점은 프뉴마에 있습니다. 프튜마는 영, 또는 바람이라는 뜻의 헬라어입니다. 고대인들은 바람, 또는 숨을 생명의 영과 동일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영은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뛰어넘습니다. 그런데 그 영은 막연한 게 아니라 진리의 힘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 영은 거룩한 영, 즉 구별된 영이기도 합니다. 무슨 뜻인가요? 기독교가 말하는 성령은 이 세상에서 참된 것을 드러나게 하는 거룩한 영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성령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 용어는 협조자입니다. 옛날 개역성서는 보혜사라고 번역했습니다. 헬라어 성서는 이를 ‘파라클레토스’라고 했습니다. 그 단어는 위로자, 대언자라는 뜻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진리의 영, 거룩한 영은 곧 협조자입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까지 설명했는데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런 분들은 아주 정직한 분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기서도 질문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이 고별설교도 기본적으로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한 것입니다. 요 13:36절에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하고 질문했구요, 14:5절에서는 토마가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22절에 가리옷 사람이 아닌 다른 유다가 “주님, 주님께서는 왜 세상에는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저희에게만 나타내 보이시려고 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유다의 이 질문이 중요합니다. 이 질문에 바로 기독교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다의 이 질문은 예수님의 정체를 세상은 알아보지 못하고 제자들만 알아본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게 이상한 일이지요. 유대의 내로라하는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반면에 별 볼일 없는 제자들은 알아보았으니 말입니다. 특히 부활사건에서 이런 모순은 극에 달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사장들과 로마 빌라도 총독 앞에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제자들에게만 나타냈습니다.
유다의 이 질문은 바로 성령의 약속과도 연관됩니다. 성령을 주신다는 말은 바로 예수님이 그들에게 영적으로 함께 하신다는, 또는 다시 오신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성령을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제자들만 알 수 있습니다. 오순절의 사건은 분명히 적은 수의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몇몇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유다가 질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사랑’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과의 긴밀한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23,24절에 따르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며, 따라서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그를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이런 성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령을 받았는가 하는 질문보다는 보다는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이 훨씬 근본적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지킵니다. 흡사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녀들이 누가 말하기도 전에 부모님의 말씀을 듣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말은 성령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과 직접적으로 연관됩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26절에 진술되어 있는 성령의 역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주실 것이다.” 파라클레토스이며 거룩한 영인 그 성령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에 말씀하신 모든 것을 가르치고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걸 배우고 기억하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의 그 말씀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곧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많은 경우에 성령이 오해됩니다. 성령 운동하는 사람도 있고, 기도로 불치병을 치료하는 걸 성령의 활동과 일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성령 받아라!” 하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령이 흡사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들을 기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어떤 능력쯤으로 간주됩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 금식기도, 철야기도도 하더군요. 그런 방식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거나 어려운 병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도 그런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성령이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고대인들의 표현 방식들입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성령은 그런 것과는 다른 생명의 영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라고 했습니다.(갈 5:22,23절)
특히 오늘 본문에 따르면 성령의 역할은 핵심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과 회상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배운 적이 있습니까? 그 말씀이 기억난 적이 있습니까? 설교를 들을 때, 또는 성경공부를 할 때, 또는 혼자서 성경을 읽을 때 그걸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여기 모인 분들은 모두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런 방식으로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 그런 경험이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첫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상대방을 알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어느 정도 함께 살다보면 시들해지는 것처럼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애정을 잃어버립니다. 천편일률적인 신앙의 틀에 묶여버립니다. 설교를 들어도 매일 그 모양이고, 말씀을 읽어도 새롭게 깨달아지는 게 없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말씀과의 깊은 사귐이 약해진다면 우리는 다시 성령으로부터 멀어지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에 대한 열정은 있지만 깊이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매일 성경을 품에 안고 다니기만 하지 실제로는 마음을 열고 읽지 않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말씀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게 됩니다. 학생들이 모르던 수학문제를 풀어가면서 수학의 깊이로 들어가듯이 우리도 모르던 말씀의 깊이를 알면서 성령과 더욱 깊은 관계로 들어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고별설교를 듣고 있는 제자들처럼 우리도 지금 예수님이 없는 현실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불확실하고, 미래가 불투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도우시는 파라클레토스입니다. 그를 참되게 신뢰하십시오.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사랑하시는 여러분은 이미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며, 앞으로 성령이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는 말씀의 깊은 차원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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