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받음이란?
행 8:14~17, 주현 후 첫째 주일, 2022년 1월9일
오늘 설교 본문인 행 8:14~17절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처했던 매우 특별한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을 본거지로 하는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대표로 뽑아서 사마리아로 파송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식에 얽힌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오늘 본문이 포함된 행 8장 전체의 배경을 먼저 검토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전도
행 8장은 예수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을 처음으로 벗어나서 사마리아 지역으로 전파되는 이야기입니다. 행 8:5절에 따르면 거기서 중심 역할을 감당한 인물은 빌립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제자인 빌립이 아니라 소위 ‘일곱 집사’로 불리는 빌립입니다. 행 6:5에 일곱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입니다. 이들은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합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아람어를 사용하는 본토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유대교 전통에 관한 생각이 달랐습니다. 유대교의 전통을 거부했습니다.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데반은 순교 당했고, 빌립은 사마리아로 피신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세 파로 구성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를 중심으로 하는 유대 그리스도인, 스데반과 빌립을 중심으로 하는 헬라파 그리스도인, 바울을 중심으로 하는 이방 그리스도인입니다. 8장에는 이 세 파가 겹쳐서 나옵니다. 8:1~3절에는 아직 회심하기 전의 유대교도인 사울이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이어서 8:4절 이하에는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14절 이하에는 베드로와 요한의 활동이 나옵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는 바울의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주류가 되었고, 그들이 바로 오늘의 그리스도교입니다. 서로 다른 세 파였으나 공통되는 점은 그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비유적으로, 오늘날도 로마 가톨릭교회와 정교회와 개신교회가 예배 및 신학에서 입장은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점에서 똑같은 거와 비슷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세 파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성령에 대한 견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빌립이 복음을 전한 사마리아 그리스도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성령 받기를 기도했다고 합니다. 사마리아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을 뿐이지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뒤로 두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나는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돈을 내고 성령을 받으려고 했다가 베드로에게 큰 질책을 받은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빌립이 에디오피아 고급관리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사건입니다. 이 에디오피아 고급관리를 만나는 장면에서 누가는 성령의 지시라고 설명했습니다.(행 8:29) 이렇게 성령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은 누구이고,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요?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위르겐 몰트만(Ü. Moltmann)은 그리스도교 성령론을 다루는 책 『Der Geist des Lebens』 머리말에서 ‘성령’을 ‘생명의 영’으로 바꿔 불러야 성경이 말하는 성령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령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세속적인 일상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종교적으로 특별한 사람만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듯이 받아들여집니다. 이런 현상은 한국교회에서도 여전합니다. 주로 열광적인 은사 운동이라는 차원에서 성령을 이해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방언, 신유, 입신 등등입니다. 약간 다른 방식으로는 경배와 찬양 유의 집회입니다. 그런 집회에서 경험하는 종교적 열정을 성령이 임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그들의 경험을 존중하지만, 저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성령에 관해서 말할 때 저에게는 몰트만이 세속 언어로 바꾼 ‘생명의 영’이 더 어울립니다. 그 생명의 영을 우리는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그런 영을 지금 경험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 말고 진지하게 질문해보십시오. 우리가 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실제로 중요한 내용은 모르거나 오해한 채 겉모양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프뉴마
오늘 본문에는 우리말 번역으로 성령이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오지만 원래 헬라어 성경에는 15절과 17절에만 성령을 가리키는 ‘프뉴마 하기온’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사도행전의 다른 구절에 나오는 성령, 또는 주의 영이라는 단어는 모두 그 핵심이 ‘프뉴마’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프뉴마에 ‘거룩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으면 성령으로, 붙지 않으면 영으로, 주(퀴리오스)라는 명사가 붙으면 주의 영으로 번역됩니다. 프뉴마라는 헬라어는 아는 분들은 다 알겠지만 영, 바람, 숨, 기운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우리와 세계를 끌어가는 능력이 바로 프뉴마입니다. 그걸 느끼는 사람이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상관없는 일상에서도 그런 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절망과 좌절에서 빠져나올 때 사람들은 특별한 영적인 경험을 합니다. 사업이 망하거나 실연당해서 죽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삶의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독단적이고 자폐적인 이기심에 떨어져서 살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게 됩니다. 적개심으로 가득하던 마음이 이해와 관용과 사랑으로 가득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면서 교만하게 살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죄와 죽음에서 의와 생명으로 변화하는 겁니다.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곧 프뉴마, 즉 영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따르면 당시 사마리아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받지 못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습니다. 생명의 능력은 없고 명색만 세례 교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했으나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걸 가리켜서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표현한 것입니다. 앞에서 본대로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생명의 능력이, 즉 생명의 영이 그들에게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영이라는 표현이 실감 나시나요? 전혀 느낌이 없나요?
다음과 같이 대답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나는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고, 가능한 대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나름으로 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애쓴다고, 좋은 책을 읽으면서 교양을 쌓았고 마음공부를 통해서 절제력을 배웠다고, 바울이 갈 5:22~23절에서 열거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어느 정도는 따라간다고 말입니다. 바울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성령의 열매라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가족에게 화를 안 내고, 가능한 한 화목하게 지내려고 합니다. 인격과 교양에서 본받을만한 수준에 도달한 인생이라면 성경이 말하는 생명의 영을 받은 게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정도의 삶도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게만 살아도 괜찮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저의 사는 모습을 보면 그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기에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성령 받음이 그런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종종 언급하는 바인데, 그리스도교 신앙이 인격 도야나 교양 쌓기나 상담이나 정신과 치료 정도에 머문다면 굳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필요가 무엇입니까?
성령 받음의 조건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오늘 본문의 보도는 앞에 나오는 성령에 관한 다른 보도들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중의 하나는 예루살렘 주민들을 향한 가르침(행 2:38)입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성령을 받기 전에 있어야 할 일들을 거론합니다. ‘성령 받음’이 돈을 넣으면 음료수 캔이 나오는 자동판매기처럼 기계적으로 받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세 가지, 즉 회개와 세례와 죄 사함을 다음과 같이 거론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
1) 회개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여전히 돈으로 행복한 인생을 구가할 수 있다고 믿는 한 우리는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2)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의미의 종교의식입니다. 회개한 사람이 아니면 참된 의미에서 세례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세례받았다고 해도 실제로는 세례와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려면 실제로 그와 밀착해서 살아야겠지요.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면서 동시에 아들의 영(필리오 케)이니까요. 3) 죄 사함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완성해야겠다는 유혹과 강요에서 벗어나는 사건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 염려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영혼 안에 자기에 대한 염려와 자기 성취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차면 생명의 영인 성령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창문을 열어야 바람이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개인의 차이는 있으나 대개 세례는 받았으나 회개와 죄 사함에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성령 받음, 또는 성령 충만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일까요?
요즘 제가 읽는 책 중에서 울림이 가장 큰 책은 G.K.체스터턴의 『정통』(ORTHOXY)입니다. 체스터턴은 합리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인 세계관에 빠져서 단조롭게 사는 현대인들을 향해서 오히려 요정이 등장하는 동화의 세계야말로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풍부한 내용을 제공한다고 설명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본래 그런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이 온통 마법입니다. 나무와 풀과 구름과 바람과 돌이 살아있습니다. 그런 관점을 유치하다고 여기는 계몽주의 지성인들이 오히려 유치한 겁니다. 동화의 세계관은 성경의 세계관과 통합니다.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대하고 느끼고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를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계 21:11~12).
동화에나 나올만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표현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그런 이야기의 실체는 이미 여기 우리의 세계와 일상에 들어와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눈을 뜨면서 그런 세상을 보고 환희에 찬 교우들이 있을 겁니다. 거꾸로 어떤 이들은 늘 그렇고 그런 세상만 보았을 겁니다. 세상을 열린 눈으로 볼 줄 모르면 우리는 회개할 수 없고, 죄 사함에 이를 수 없고, 당연히 진정한 의미에서 세례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냥 세상이 지정해준 그런 정답만 암기하고 복기하고 무조건 추종할 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생명의 영인 성령이 임하겠습니까? 안타깝지만 삶의 진짜는 놓치고 껍데기만 좇다가 끝나는 인생이 되고 말 겁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불쌍히 여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권능과 증인
마지막으로 성령을 받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가 궁금하시지요? 이 대답도 앞에 나오는 행 1:8절과 연결해서 봐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임하면 두 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는 권능을 받는 겁니다. 권능은 헬라어 뒤나미스의 번역입니다. 뒤나미스는 영어로 보통 ‘다이나믹하다.’라고 표현할 때 나오는 단어입니다. 폭발적인 힘입니다. 당연히 생명의 뒤나미스입니다. 존재의 능력이고, 사랑의 능력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세상을 창조하고 지금도 권능으로 통치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결속되어 있어서 세상의 힘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자학에 떨어지지 않고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이런 사람을 여러분은 자주 보십니까? 이런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성령이 임하면 벌어지는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증인이 되는 겁니다. ‘내 증인’이 된다는 표현에서 증인은 헬라어 ‘마르튀리아’의 번역인데, 순교자를 가리키는 ‘마르튀스’와 어근이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의 증인이라는 말은 예수를 위한 순교자라는 뜻입니다. 무시무시한 단어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그럴듯해도 순교자는 되고 싶지 않으실 겁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은 일본 선교 초창기에 벌어졌던 순교 역사를 그렸습니다. 그런 전형적인 의미에서의 순교 역사가 흔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대는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순교 마인드는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길을 갈 능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의 인생은 불행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이 따라갈 수 없는 절정의 인생이 바로 순교자의 인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삶을 선택하고 살아낼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니까요.
오늘의 일상에서 약간 가벼운 비유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기 두 청년이 있습니다. 한 청년은 수능점수와 스펙을 높이 쌓아서 일류 기업에 입사하여 1억 원이 넘는 연봉을 받고 삽니다. 그는 더 많은 연봉을 받으려고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여기 다른 한 청년은 유치원 교사가 되었습니다. 아니면 장애인 돌보미가 되었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는 2천만 원의 연봉을 받습니다. 그걸로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짜증 내지도 않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즐거워합니다. 누가 능력을 받은 청년일까요? 누구의 인생이 더 고급스러울까요? 이게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느낀다면 아직 성령을 받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취미 삼아 교회를 다니는 게 아니라면 성령을 받는다는 말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성령을 받지 못하면 여러분은 생명의 능력도, 사랑의 능력도 받을 수 없고, 예수의 증인이 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다시 저 자신과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 관심이라도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무슨 일에 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인생을 사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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