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 예배 공동체
행 2:42-47, 부활절 넷째 주일, 2020년 5월3일
기독교가 언제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대구샘터교회는 2003년 6월 첫째 주일(6월1일)에 창립 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했지만, 2천 년 전 기독교에는 이런 시점이 없습니다. 아무도 교회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뒤에 남은 제자들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교회를 세울 필요도 없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가 살아계실 때나 돌아가신 다음에나 똑같이 유대인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 나가서 경건 의식에 참여합니다. 예루살렘에 살거나 성지 순례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순례객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찾습니다. 거기서 여러 가지 종교의식에 참여합니다. 기도를 드리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헌금을 바칩니다. 행 3장에 따르면 베드로는 오늘 시간으로 오후 3시 기도 시간에 맞춰서 성전에 올라가다가 선천적으로 걷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서 고칩니다. 기도 시간을 지켰다는 말은 베드로가 유대인들의 종교 관습을 그대로 지켰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자신들의 종교를 유대교로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언제 시작한 것일까요? 유대교로부터 교회가 분리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교회가 역사에 천천히 등장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상황에는 외부적인 요인이 있고, 내부적인 요인이 있습니다. 외부적인 요인은 기원후 70년에 발생한 예루살렘 파멸입니다. 성전이 무너진 뒤에 내부 결속이 필요한 유대교 당국자들은 예수를 믿던 이들을 축출했습니다. 아무리 외부적인 요인이 특별했다고 해도 내부적인 요인이 없었다면 교회는 역사에 등장할 수 없었습니다. 이 내부적인 요인은 기독교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그 정체성은 예수를 따르던 이들이 여전히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던 초기 단계부터 두드러졌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그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인 행 2:42-47절에 나옵니다.
성찬 공동체
행 2:42을 보면 처음 기독교인의 생활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예수가 없는 상황에서 예수에게서 부르심을 받았던 사도들의 가르침은 가장 큰 권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서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교인들 사이의 친교는 교회의 본질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그들은 떡을 뗐다고 합니다. 성찬식을 거행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기도는 유대교의 전통입니다. 43절부터 특징이 몇 가지 더 나옵니다. 이런 것들도 대개는 유대교 전통을 따르는 것들입니다. 본문 전체에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 한가지는, 그러니까 기독교를 유대교와 구분해서 볼 수 있는 정체성은 떡을 뗀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이 42절과 46절에 두 번 나옵니다. 46절이 더 자세한 설명입니다. 46절 전체를 읽어보겠습니다. 당시 초기 기독교인들의 생활이 어땠을지를 상상해보십시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
46절에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이 두 장소에서 펼쳐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장소는 성전이고, 다른 한 장소는 집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정기적으로 출입한 이유는 앞에서 짚은 대로 그들이 원래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표현은 “집에서 떡을 뗐다.”라는 문장입니다. 당시에는 교회당이라는 건물이 따로 없었기에 교우들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도 교회를 개척할 때 개인 집에서 모임을 시작하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예수 부활 승천 직후 이야기를 보도하는 행 1:3에 따르면 당시 예수를 따르던 이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어떤 교우의 집 ‘다락방’에서 모임을 했습니다. 다락방에 모일 때마다 그들은 떡을 떼는 성찬식을 행했습니다.
46절에 나오는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라는 말은 당시 행해지던 성찬식의 다른 한 형태를 가리킵니다. 당시에는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행하는 성찬식만이 아니라 그곳에 모였던 교인들이 함께 밥을 먹는 행위까지 성찬식으로 보았습니다. 애찬식으로 불리는 두 번째 성찬 식사는 일반적인 식사이기에 배불리 먹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이중의 성찬 예식을 행하는 중입니다. 한 달에 한 번 행하는 일반적인 성찬식과 매 주일 예배 후에 행하는 식사 친교가 그것입니다. 요즘 코로나19 사태로 식사 친교가 어렵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찬식에서 가끔 보기 좋지 않은 문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고전 11:17-34절에 자세한 내용이 나옵니다. 성찬 식사를 위해서 신자들은 집에서 먹을거리를 가져왔습니다. 부자들은 질 좋은 음식을 가져왔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거친 음식을 가져오거나 빈손으로 왔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음식을 한데 모았다가 나눠 먹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부자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먹었나 봅니다. 고전 11:21절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취하는 일도 벌어졌나 봅니다. 이로 인해서 교인들 사이에 옥신각신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따끔하게 질책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행 2장이나 고전 11장 등을 놓고 볼 때 초기 기독교에서 성찬식은 기독교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요소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성찬 예배라는 정체성을 본질로 하는 종교다.”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교회다움을 유지하려면 성찬 예배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올곧게 세워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성찬 예배 공동체가, 즉 떡을 뗀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빵”
우리말 성경은 “떡”으로 번역했지만, 원래는 빵을 가리킵니다. 빵을 뗀다는 말은 예수님의 운명에서 결정적이었던 어떤 사건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절기를 맞아 성지 순례로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신성모독으로 체포당할 위기에 떨어졌습니다. 이제라도 고향 나사렛이나 자신에게 호의적인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피했다가 후일을 도모해도 됩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유월절 전통에 따라서 예수는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눠주면서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막 14: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날 행한 유월절 식사를 가슴 깊이 간직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제자들의 삶에서 완전히 멀어진 뒤에 그들은 모일 때마다 이 의식을 그대로 반복했습니다. 이 의식이 바로 기독교 예배를 기독교답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겉으로 사소하게 보이는 빵이 기독교 예배에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매개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아침을 빵으로 대신합니다. 빵을 대할 때마다 신비롭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선 빵의 소재인 밀가루가 어디서 왔는지를 돌아보십시오. 우리나라는 농토가 좁아서 밀 농사짓기가 힘듭니다. 호주나 북미에서 생산된 밀을 수입할 겁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싹이 트고 자라는 광경을 눈에 그려볼 수 있습니다. 황홀한 장면이 펼쳐집니다. 흙, 비, 탄소, 태양 빛이 협동하여 밀을 자라게 하고 이삭을 피게 합니다. 그걸 추수하여 가루로 만듭니다. 밀가루를 반죽하는 과정과 발효되는 과정도 역시 기기묘묘한 현상입니다. 세계 최고의 마술사가 보이는 마술쇼보다 훨씬 더 재미있습니다. 빵만 보이지 빵이 만들어지는 그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사람들은 생각 없이 빵을 먹습니다. 생명의 진짜 모습을 놓치는 겁니다.
생명의 진짜 모습을 보려면 우선 만물을 세밀하게, 오래,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경험을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사람들이 예술가이고, 합리적 체계로 만들어내는 사람이 과학자이고,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사람이 신학자입니다. 각각의 분야에 전문가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대상의 보이는 부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을 세밀하게 보고 느낄 줄 압니다. 그런 느낌이 있을 때 ‘모나리자’의 미소를 그림으로 형상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과 저는 영적인 예술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예술가가 되려면 신학을 전공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이보다 더 확실하고 바른길이 있습니다. 성찬의 빵을 세밀하게 관찰해서 알고 느끼는 것입니다. 반드시 빵에만 제한되는 건 아닙니다. 밥이라고 해도 됩니다. 밥에 대해서 여러분은 얼마나 잘 아십니까? 저의 집사람보다 제가 밥에 대해서 아는 게 더 많고 실제로 밥도 더 잘 짓습니다. 며칠 전에도 집사람이 그 사실을 인정해주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인정해줘야 제가 밥을 더 자주 한다는 계산에서 나온 발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밥 짓기에서 물 맞추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쌀의 상태에 따라서 물 조절이 달라집니다. 쌀의 색깔을 보거나 쌀을 손으로 만져보고 건조 상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쌀만 보고도 이 쌀의 생산지와 당시의 날씨까지 안다면 정말 도사가 되는 겁니다. 빵과 밥의 신비로움에 관해서 눈을 뜨고 그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는 하나님에 관한 전문가이자 예술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내용이 설교라기보다는 인문학적인 교양강좌 같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여기 계실까요? 아닙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설교하는 중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자이십니다. 그냥 창조자가 아니라 유일한 창조자이십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모든 것을 깊이 알고 사랑하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관점이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이기에 세상에는 위대한 게 따로 있고 소소한 게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저는 저의 집 앞마당과 뒤꼍에서 지구 전체의 멋진 풍경을 경험합니다. 거기에 에베레스트산이 있고,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이 있고, 중국의 매리설산이 있습니다. 과장된 표현이긴 합니다만, 세상 어디서나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신비를 경험한다면 제 말이 틀린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빵 한 조각을, 그리고 밥 한 그릇을 예배의 차원에서 찬양하고 사랑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이런 태도야말로 성찬식 영성의 핵심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몸”
성찬식에서 정점은 예배 인도자가 빵을 손에 들고 말하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라는 문장입니다. 포도주에도 똑같은 문장이 따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몸과 피는 똑같이 예수의 실제 몸을 가리킵니다. 종교 개혁 당시에는 성찬 문제로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빵이 예수의 실제 몸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여전히 주장합니다. 우리 귀에 이상하게 들리는 주장이지만, 간단하게 틀렸다고 매도하기는 어렵습니다. 로마가톨릭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개념을 따릅니다. 빵이 예수의 몸으로 실제로 변한다는 말은 질료의 차원이 아니라 형상의 차원입니다. 어쨌든지 성찬식에서 모두에게 공통되는 대목은 “예수의 몸”입니다.
예수의 몸은 어디서 왔을까요? 사람은 모두 사람의 몸을 통해서 옵니다.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식물도 역시 그렇습니다. 예수의 몸은 마리아의 자궁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열 달 가까이 그곳에 머물면서 사람의 형태를 갖추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모든 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동정녀는 핵심이 아닙니다. 핵심은 인간 마리아입니다. 예수는 공중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여자의 몸을 통해서 오셨습니다. 만약 마리아의 몸이 없었다면 예수도 없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여자의 몸은 하나님의 생명이 활동하는 자리입니다. 이런 표현이 여러분에게 너무 파격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명백한 사실이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리아의 몸만 중요한 게 아니라 남자의 몸도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의 몸은 구원이 임해야 할 자리입니다. 사람의 몸을 폭력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요? 이런 전체적인 상황을 요한복음 기자는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현대인들은 몸을 구원의 차원에서 제대로 살필 줄 알까요? 두 가지 극단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몸 숭배입니다. 성형 수술과 화장품 산업은 불황을 모릅니다. 건강 보조식품도 많이 개발되었고, 체력 단련 등의 건강 프로그램도 부지기수입니다. 개인의 필요에 따라서 취할 건 취하면 됩니다. 저도 취미활동으로 테니스를 꾸준히 했습니다.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요즘 코로나19 사태로 구장에 나가지 못하기에 집에서 실내 자전거를 타고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다 필요한 것들입니다. 문제는 이런 추세가 극단적으로 나아가서 몸 숭배에 이른다는 사실입니다. 건강해야만 행복하고 아름다워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장애인은 무조건 불행해야만 할까요?
다른 하나는 몸의 소외입니다. 몸 숭배의 반작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은 육체노동을 낮춰보는 관점입니다. 현대인의 꿈은 앞으로 모든 육체노동을 로봇으로 대체하고 인간은 편안히 놀고먹을 수 있는 세상이 빨리 오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런 세상에서 인간이 실제로 행복할까요? 그게 인류의 구원일까요? 저는 그런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인간을 천사나 혼령으로 만들지 않고 몸을 지닌 존재로 만드셨기에 몸을 통한 노동은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5월1일은 130주년 노동절이었습니다. 노동절 이틀 전 이천 물류창고에 화재가 일어나 대다수 일용직 노동자 38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재난이 아니라 육체노동을 낮춰보는 시대정신의 필연적인 귀결은 아닐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찬 예배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찬대에 놓인 빵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빵과 밥을 독차지하는 게 아니라 나눠 먹어야 한다는 사실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어떻게 사는 게 거룩한 성찬 예배 공동체에 속한 사람의 삶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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