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8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G-1C0d96rdQ?si=F7TfZLUr-YKtobzx
▣ 들어가는 말
- 삶은 흐른다!
철학자 화이트 헤드는 삶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삶은 어느 한순간을 포착해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들이 서로 겹치며 만들어 내는 흐름입니다. 그래서 삶을 한 장면으로 잘라 설명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현실(진실)을 놓치게 됩니다. 삶은 언제나 도중에 있고,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지나간 것과 오지 않은 것이 함께 숨 쉬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신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결과를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통과하며 형성되는 태도입니다.
화이트 헤드가 특별히 높이 평가했던 예술은 음악이었고, 그중에서도 베토벤이었습니다. 모든 예술이 결국 삶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 일터인데, 음악은 멈추면 사라지고, 흘러가면서만 존재하지요. 이것이야말로 삶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베토벤의 음악은 긴장과 파열, 고통과 침묵을 지우지 않고,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냅니다. 베토벤은 삶이 어떻게 고통을 통과해 의미를 얻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음악을 통해 경험하게 했습니다. 이렇듯 삶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고, 우리의 신앙 역시 어느 한순간의 시점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의 믿음에 관해 생각해 볼 때, ‘나의 신앙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나?’가 아니라, ‘어떤 시간을 주님과 함께 통과해 왔는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 날을 계수하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 내년 총회를 앞두고 올해의 목회 (계획) 보고서를 작성하며 샘터의 한 해를 생각해 봅니다. “올해 나는 무엇을 이루었는가?” “계획한 것 중 얼마나 성취했는가?” “남들에게 보여 줄 만한 결과가 있는가?” 이런 질문은 연말이면, 많은 이들이 스스로 묻게 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이 질문들은 우리를 위로하기보다 오히려 지치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면,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세월이 참 빠릅니다.” 분명 하루하루는 나름 성실하게 살아온 것 같은데, 뒤돌아보면 한 해는 모래알처럼 손에서 빠져나가 버린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이 말에는 놀람도 있고, 아쉬움도 있고, 설명하기 어려운 허전함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시편 90편은 이 감각을 아주 오래전에 이미 정확히 표현합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순간과 같다.”(시90:4) 한 해, 한 해를 넘길 때마다 세월의 빠름을 절감하게 되지요. 그러니 천년의 시간이라도 지나고 나면 하룻밤의 꿈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에게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날을 계산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 정확하게 날들을 계산하고 있는데 말이지요. 날뿐 아니라 시간과 분, 초를 나누어 살아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날 계산법을 알면, “지혜”를 얻게 된다니… 이상하지 않은가요?
분명, 우리가 모르는 성경이 말하는 날을 계산하는 방법이 따로 있나 봅니다. 날, 시간, 삶을 계산하는 법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지혜의 마음을 얻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화이트 헤드와 베토벤의 예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삶은 한순간의 장면이 아니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흘러가는 것이고,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함께 섞여 춤추고 있는 것이니, 우리의 시간, 삶에 대한 계산법은 무작정 시간을 나누는 것이나, 특정한 한 시점, 한순간을 포착해서 계산해서는 삶의 진실을 드러낼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이 연말이라고 하는 시점에서 날을 계산할 때, 우리의 삶과 믿음을 계산해 볼 때,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 무엇을 남겼는가?”보다, “나는 어떤 시간을 살았는가?” “어떤 흔적을 남기며 살아왔는가?”를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업적의 목록이 아니라 삶이 지나온 자리에 남은 흔적들 말이지요. 그것이 ‘날을 계수하는’ ‘삶을 계수하는’ 방법 아닐까요?
▣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다.
- 고린도 교회의 상황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쓸 당시, 고린도 교회는 심각한 내부 분열과 외부 압박을 겪고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로마 제국의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로, 성공, 웅변, 카리스마, 외적 성취를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이런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의 연약함은 사도직의 결격 사유처럼 여겨졌습니다. 교회 안에서, 소위 ‘능력 있는 지도자’는 말 잘하는 지도자, 화려한 영적 체험을 가진 사람이지요. 그에 비해 바울의 약점은 말이 세련되지 않고, 외모도 변변치 못하고, 육체적 약함(질병인지, 혹은 겉모습에 있어서 결함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그리고 박해와 실패의 연속 등입니다. 그러니 일부 성도들은 바울을 “실패한 지도자”로 간주합니다. 함량 미달 지도자이지요. 오늘 한국과 한국교회의 상황과도 너무나 닮아있습니다.
고린도후서는 바로 이러한 평가에 대한 신학적 반론입니다. 이 맥락에서 바울의 고백은 방어가 아니라 전복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이다.” 이 말은 자기 비하가 아닙니다. 성취 중심 사회에 대한 신학적 저항입니다. 오히려 육체의 가시가 있어 그는 사도의 직을 행할 수 있음을 밝힙니다.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오히려 사도직의 정의 자체를 전복합니다.
- 고대 사회에서의 질그릇
고린도후서 4:7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질그릇”은 의도적으로 가장 값싸고, 쉽게 깨지는 용기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헬라어 원어로 ‘구워 만든 흙의, 토기 같은’이라는 의미로, 고대 사회에서 일회용에 가까운 생활용품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질그릇은 고대 도시의 쓰레기장과 같은 곳에 넘쳐났습니다. 값이 싸고 쉽게 깨지고 금이 가면 바로 버려지는 물건이지요. 그리고 고대 문헌에서 질그릇은 귀한 것을 담기에는 부적절한 그릇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바울은 이 상식을 정면으로 거스릅니다. 그는 질그릇을 극복의 대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질그릇을 ‘언젠가 금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깨질 수 있음 자체가 복음의 전달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부적절함’ 그 자체가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선언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질그릇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복음이 담기는 방식이라고. 질그릇이야말로 진정한 사도의 모습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너희가 나를 하찮은 존재로 여긴다면, 맞다, 나는 질그릇같이 하찮은 존재가 틀림없다. 이런 고백이지요.
- 질그릇에 남겨진 흔적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성공한 사역’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을 쉽게 깨지는 질그릇에 비유합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보석같이 귀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 그릇은 늘 금이 가 있고, 깨질 위험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 이 말은 바울의 성과 보고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한 사도의 몸에 남은 흔적의 기록입니다. 승리의 기록이 아닙니다. 통과의 기록입니다. 우겨쌈을 통과했고, 답답함을 통과했고, 박해와 버림의 위기를 통과했고, 넘어짐과 실패의 순간을 통과했습니다. 신앙은 문제를 겪지 않는 능력이 아닙니다. 문제를 통과하면서도 존재가 무너지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능력을 성취했다”가 아니라,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산다.” 이것은 신앙을 결과 중심의 성취 모델에서 과정 중심의 흔적 모델로 전환합니다. 신앙은 얼마나 성공했나가 아니라 얼마나 부서졌는가, 얼마나 자기를 비웠는가, 얼마나 타인의 고통을 자기 몸으로 통과시켰는가의 문제입니다. 십자가는 결과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흔적입니다. 사랑이 지나간 자국입니다. 부활은 고난을 제거함으로 나타나지 않고, 고난 위에서 피는 꽃입니다.
▣ 예수의 흔적
— 예수의 흔적을 지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심각한 신학 논쟁 속에 있었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율법과 할례라는 외적 표지가 필요하지 않은가?”였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여기서 ‘흔적’은 헬라어 스티그마(stigma)입니다. 신약에서 이 구절에만 등장하는 매우 강한 단어입니다. 일반적인 ‘표시’나 ‘표징’이 아니라, 고통과 소유를 전제한 표식입니다. 스티그마는 주인의 소유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 노예의 이마, 팔, 어깨 등에 불로 지지거나 칼로 새긴 상처를 가리켰습니다. 이 표식은 지워지지 않았고 평생 따라다녔으며 사회적으로 치욕과 종속의 증거였습니다. 명예가 아니라 낙인이지요.
갈라디아서의 논쟁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할례라는 외적 종교 표식이 필요한가? 율법이라는 제도적 정체성이 필요한가? 이에 대해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다른 표식을 말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살을 베는 할례가 아니라, 내 몸에 이미 새겨진 예수의 스티그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바울은 실제로 매 맞았고 돌에 맞았고 감옥에 갇혔고 육체적 손상을 반복해서 입었습니다. 그 상처들이 바로 예수께 속해 있다는 몸의 증거라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흔적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이 말은 위협이 아니라 정체성 선언입니다. 나는 나를 증명하지 않겠다. 나는 더 이상 비교하지 않겠다. 나의 사도직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온 수많은 흔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흔적들은 지울 수 없고 부인할 수 없는 예수에게 속해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의 정체성은 제도적 표식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한 몸 자체에 새겨져 있다. 이 말은 당시 종교 질서에 대한 급진적 전복입니다. 교회에 다니느냐, 예배와 헌금을 하느냐? 성경을 읽고 기도하느냐?… 이런 것이, 그리스도인 여부를 가르는 척도가 아니라, 예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흔적이 있느냐가 진정한 정체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연말에 물어야 하는 질문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사랑한 흔적, 버텨낸 흔적, 말하지 못한 기도의 흔적, 끝까지 놓지 않았던 신뢰의 흔적, 눈물의 흔적을 떠올려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 흔적들은 그 어디에도 남지 않고, 이력서에 기록되지 않으며, 사람들의 박수를 받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흔적을 알고 있다. 너의 삶에 각인된 스티그마를 보고 있다고 말입니다.
- 무덤 속의 그리스도
종교 개혁 시기에 활동했던 화가, 한스 홀바인은 인문학자 에라스무스와도 친분이 두터웠던 인물입니다. 홀바인의 종교화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기적을 강조하지 않고 천상의 빛을 과장하지 않고, 구원의 결과를 서둘러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늘 주보의 그림 『무덤 속의 죽은 그리스도』(1521)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표현할 때 그려지는 광배가 없습니다. 천사도, 슬픔의 제스처도 없고 보는 이들을 위로하는 시선 따위가 전혀 없습니다.
대신 관 속에는 시체, 완전한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호흡이 완전히 끝났음을 의미하는 벌어진 입, 시선을 잃어버린 탁해진 눈, 생명의 반응이 전혀 없는 경직된 손과 발, 그리고 이미 시작된 부패의 징후를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가히 충격적입니다. 현재의 우리가 보기에도 꺼려질 정도이지요. 그리고 그는 의도적으로 부활을 그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활 신앙의 무거운 짐을 보는 이에게 넘깁니다. “나는 부활을 그리지 않겠다. 당신이 그것을 믿을지 선택하라.” 이 태도는 바울의 고백,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고후 4:10)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바젤에서 이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그림을 오래 바라보면 신앙을 잃을 수도 있다.” 얼핏 오해할 수도 있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그림을 불신앙의 그림으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 그림은 너무나 정직하게 죽음을 그렸기 때문에, 값싼 위로나 성급한 부활 신앙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보는 이를 결단의 자리로 몰아넣습니다. 예수의 죽음의 실체는 이런 것이다. 이렇게 끔찍하고 냉정한 것이다. 이 죽음을 보면서도 당신은 부활을 믿을 수 있는가? 라는 엄중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신앙은 자동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며, 언제나 다시 새롭게 선택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홀바인의 그림은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하지 않습니다. 외면할 수 없게 만듭니다. 해석을 미루지 못하게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신앙이 유지되는 것이라는 착각을 여지없이 깨뜨립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 앞에 선 사람은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신앙은 죽음을 통과한 것인가?”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있는가?”
▣ 나가는 말
- 흔적 위에 세워지는 믿음
올해 우리가 이루지 못한 일들 때문에 자신을 정죄하지 마십시오. 신께서 우리의 날, 우리의 시간, 우리의 삶을 계산하는 방식은 성취나 성과가 아닙니다. 빈손을 탓하지 않습니다. 대신, 상처 난 손, 찢긴 마음, 깊은 한숨, 메마른 눈물을 볼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산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삶을 멈추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출애굽의 여정, 광야에서의 방황,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과정, 포로로 끌려가는 고통, 메시아를 기다리는, 긴 기다림… 삶은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한순간의 고백이나 성취가 아닙니다. 과거의 지나간 삶의 발자취,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한 대망, 끊임없는 현재의 흔들림이 어우러져 있는 드라마요, 음악입니다. 베토벤의 음악에는 긴장과 파열, 붕괴와 새로운 질서, 또다시 긴장이 함께 있습니다. 베토벤은 긴장을 제거하지 않고, 그 안에서 질서를 생성합니다. 베토벤의 음악은 “삶이 어떻게 수많은 고통과 난관을 통과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지”를 소리로 보여 줍니다. 우리의 믿음도 삶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어려움과 아픔 속에서 울고, 웃고, 아파하고, 고뇌하면서 춤추는 별이 되어가기를 소망합니다.
- 날을 계수하다!
성경에서 지혜는 정보를 많이 아는 능력이 아니라 유한함 속에서 바르게 선택하는 능력입니다. 날을 계수하지 못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나중으로 미루고 관계도, 회개도, 사랑도 연기합니다. 그러나 날을 계수하는 사람은 지금 해야 할 말과, 지금 붙들어야 할 사람과, 지금 내려놓아야 할 욕망을 분별하게 됩니다. 그래서 날을 계수하는 것은 시간 관리가 아니라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삶의 흔적을 만들어 가는 일입니다. 신앙은 성취가 아니라 흔적입니다. 예수와 함께 지나온 시간의 자국입니다. 우리의 몸에는 어떤 자국, 어떤 흔적들이 새겨지고 있을까요.
“주여,
우리의 날들을 무한한 것처럼 착각하지 않게 하시고,
각 날이 당신께서 나누어 주신
되돌릴 수 없는 몫임을 알게 하소서.
우리의 연약한 질그릇에 당신의 빛을 품게 하시고
성취보다 당신과 함께 걷는 흔적을 남기는 삶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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