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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세계, 계시, 하나님

세계, 계시, 하나님

<겔39:25-29>

구약성서 중에서는 우리가 읽기에 편한 것이 있기도 하고 약간 까다로운 게
있기도 합니다. 모세오경와 역사서는 어떤 줄거리가 있기 때문에 글의 흐름을 따
라가기가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시편같은 성문서도 한국 신자들이 많이 읽는 말씀
입니다. 아마 후기 예언서 읽기가 가장 어렵지 않나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성
서 기자들도 나름대로 자신의 고유한 세계 인식을 바탕에 깔고 기록했습니다만 후
기 예언서 기자들에게는 개인적인 특성이 훨씬 강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소위
묵시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에스겔 같은 성서는 일단 따라읽기 자체가 힘들기도
하고,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니
엘서나 신약의 요한계시록을 단순히 알레고리로서 해석하는 것처럼 에스겔도 그
렇게 해석될 위험이 많습니다. 이런 특별한 장르의 성서를 해석할 때는 이현령비
현령식의 방법론에 떨어지지 말고, 성서 기자의 의도를, 또는 그 말씀이 드러내려
는 근본을 진지하게 접근해야만 합니다.
에스겔은 대충 2천5백년 전 사람입니다. 그 당시의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이미 멸망당했으며, 남유다도 역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심각한 압박을
받고 있었고, 남유다의 외교 정책이 실패함으로써 결국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예루
살렘은 초토화 됩니다. 남유다의 지도급 인사들 중에서 상당한 숫자가 포로가 되
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니엘도 이 포로 중의 하나이
며,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의 주인공인 에스겔도 역시 이 포로 중의 한 사람입
니다. 에스겔 1:1,2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지 오년 그 달 오일이라." 에스겔은 포로로 끌려간 타국의 그발강가
에서 환상을 보고 그것을 기록했는데, 그 기록이 바로 에스겔서입니다. 다니엘서
나 요한계시록과 마찬가지로 에스겔서에는 요즘 SF 영화에서나 나올만한 온갖 형
태의 동물과 사물들이 등장합니다. 사람, 사자, 소, 독수리 얼굴을 한 네 생물, 날
개가 있고, 사람의 손, 송아비 발바닥... 이런 모습들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참으로
해괴하게 보일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이 환상은 과연 어떤 타당성이 있습니까?
성서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 합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그야말로 초월적인 환상입니다만 에스겔의 예언은 역사적인 환상입니다.
여기서 초월적이라는 말은 현실성 없이 주어지는 환상이라는 뜻이며, 역사적이라
는 말은 현실적인 토대가 아주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성서의 모든 내용은 그것이
아무리 초현실적인 감각으로 진술되었다고 하더라도 역사적인 이야기입니다. 즉
뜬구름잡는 식이 아니라 늘 그럴만한 상당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에스겔의 환상을 이해하려고 할 때는 그가 살았던 <삶의 자리>를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위에서 말한대로 에스겔이 살았던 기원전 6세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힘든 때였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화려한 시대는 까마득한
과거로 흘러가버렸으며, 이미 북이스라엘마저 앗시리아의 밥이 된지도 한참의 세
월이 흘렀습니다. 제국의 틈바구에서 겨우겨우 생존에 급급해하던 남유다의 운명
마저 풍전등화 같았습니다. 에스겔은 남유다 왕들의 외교 정책의 실패로 인해서
자기 민족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지 않고 고국에 남아 있었더
라면 아버지를 따라서 제사장 활동을 하고 있었을 에스겔은 남의 나라에서 동정을
받고 살아가는 자신과 동족의 운명 앞에서 온갖 상념에 빠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
니다.
어느 날 에스겔은 그발강가를 거닐다가 환상을 본 것입니다. 에스겔은 아마
자기 민족이 왜 이런 운명에 빠질 수 밖에 없었는지 곰곰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
대 왕과 고위 위정자들은 왜 국제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악수를 두었을까? 왜 이
방 나라인 바벨론이 이처럼 강한 나라가 되었을까? 하나님은 왜 우리를 보호해주
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언제나 포로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에
스겔과 비슷한 입장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
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잠시 투정 부리듯이, 한탄 하듯이 대충 이런 생각을 하다가
자기 살 길을 찾기만 합니다만, 에스겔은 훨씬 더 영적인 차원에서 살아가던 사람
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세계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세계가 눈에 보였겠지요. 그는 그 깨달음, 그 환상을 48장
에 이르는 긴 글로 남겼습니다. 이 격동의 시대에 에스겔에게 주어진 깨달음은 무
엇이겠습니까? 본문말씀을 다시 읽어봅시다.
25. 그래서 주 야훼가 말한다. 이제 나는 이스라엘 온 족속을 가련히 여길 것
이다. 사로잡혀 간 야곱 족속을 도로 데려 오리라. 열심으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드날리리라. 26. 이렇게 이스라엘이 고향에 돌아 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마음
놓고 살게 되어야 그동안 받아오던 수치를 벗고 나를 배신하며 저지른 모든 죄를
벗게 될 것이다. 27. 내가 이스라엘을 뭇 민족 가운데서 되돌아 오게 하고 적국에
서 모아 오면 나의 거룩함이 그들에게서 나타나 많은 민족이 이를 보게 될 것이다.
28. 내가 이스라엘을 뭇 민족에게 사로잡혀 가게 했다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아
들이면 그제야 뭇 민족은 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 29. 이스
라엘 족속은 내가 불어 넣어 준 기운을 받았다. 다시는 내가 그들을 외면하지 아니
하리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여기서 핵심은 바로 28절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다가 모두
풀려난 사건을 통해서 모든 민족들이 야훼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깨닫게 된다
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 전체의 주제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사실은 구약
성서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구약성서 기자들은 야훼가 바로 이 세상에서 유
일한 참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쨌든지 에스겔의 이런 진술
은 매우 복잡한 개인 삶과 사회 삶, 그리고 국제적 삶에서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
들이 견지해야할 삶의 태도를 정확하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에스겔에 의하면 자기 민족이 망하고 포로로 끌려간 사건도 바로 하나님이 하
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시켜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는
말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에스겔의 이런 말을 들은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기분이 몹시 상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살기 힘든 판에 하나님이 이렇게 했
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으로 왕따 당할 수도 있었을 것
입니다.
오늘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모든 일들을 아주 간단히 "그게 다 하나님의 뜻이
야!"하고 넘어갑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는데도 그 사람 앞에 가서 아주
쉽게 하나님의 뜻이야, 하고 말한다면 그런 건 신앙이 아니라 현실의 무게를 신앙
이라는 명분으로 회피하려는 신앙 편이주의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우리는 "기
도 하기만 하면 다 잘 될 거야"라고 말합니다. 모든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 해서
하나님과 연결시켜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비현실주
의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스겔의 경우에는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는 보다 큰 세계를 바라
보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자기 민족의 고난을 가볍게 여기고 현실도피적으로 하
나님의 뜻 운운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난다는 고백입니다. 바벨론과 이집트의 틈바구니에서 비참하게, 비굴
하게, 무모하게 생존의 길을 찾고 있는 유대 민족의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는 말은 그런 역사가 바로 하나님의 계시라는 말입니다. 겉으로는 권력을 가진 사
람의 뜻에 따라서 이 사회가 굴러가는 것 같지만, 또한 겉으로는 강대국에 의해서
이 세계의 역사가 흘러가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계와 역사를 이
끌어간다는 고백입니다. 한 인간 실존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힘든 사건이 터지는
그 순간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이고 있습니
다.
요즘 우리 한반도 정세가 점점 위태로운 상황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
입니다. 북한과 미국의 힘겨루기가 자칫 우리의 운명을 송두리체 흔들어버릴 지도
모릅니다. 현재 전세계에서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은 9.11 테러 사건 이후로 아
프카니스탄 정부를 붕괴시켰고, 지금 후세인의 이라크를 무력으로 공격하려고 합
니다. 이라크와의 전쟁은 이미 결정되었고, 단지 시기만 조정 중이라는 의견이 지
배적입니다. 이 전쟁이 터지면 후세인과 그의 측근들만 죽는 게 아니라 이런 국제
정세와 전혀 상관없는 어린이와 부녀자와 노인들도 많이 죽겠지요. 2천5백년전의
바벨론이 벌였던 전쟁과도 비슷합니다. 여기서 후세인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 가운
데 이 정황 자체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를 두둔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라크와의 전쟁이 끝나면 혹시 부시 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압박을 가속화 시키
고, 그 와중에 북한의 김정일 집단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으로 무모한 전
쟁을 벌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한반도에서 전쟁은 안 됩
니다. 미국이야 전쟁이 나도 자기 나라에 별로 큰 피해가 가지 않겠지만, 어떤 면
에서는 군수산업은 호황을 맞겠지만, 우리는 남북한 모두 엄청난 피해를 봅니다.
미국이 아무리 선제공격으로 북한의 군사력을 무력화 시킨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모든 미사실을 파괴시킬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전쟁이 빨리 끝난다고 하더라도
그 피해는 최소한 향후 30년으로도 복구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부시와 그의
참모들은 군사적 방법을 통해서라도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식으로 말합
니다. 어쩌면 우리가 전혀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전
쟁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많습니다만, 그 피해
를 생각하면 단 0.1%의 가능성이라고 해도 우리가 미연에 방지해야만 합니다.
위에서 제가 아주 상식적인 국제정세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저는 그런 관점으
로만 세상을 보지는 않습니다. 성서의 눈으로 봅니다. 비록 미국의 힘이 아무리 막
강하더라도, 북한의 정권의 지도층이 아무리 호전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이들이라
고 하더라도 이 세상은 그들의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
나님이 이 세상에 자기를 드러내신다는 사실이 우선합니다. 잠시는 그들의 정치력
이나 군사력이 무언가 일을 저지르고 끌어가는 것 같지만 그런 일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오늘 에스겔의 입을 통해서 선포되듯이 인간이 아무리 비상한 방법으로
자기의 의지대로 만들고 싶어도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이 세계를 이끌어가십니
다. 우리가 별로 아는 게 없어서서 그렇지 실제로는 하나님이 이 역사에 늘 드러나
십니다. 그것을 볼 줄 아는 게 바로 신앙입니다.

28절 후반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나를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개역). 공동번역으로는 이렇습니다. "그제야 뭇 민족은 나 야훼가 이스라
엘의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 에스겔은 하나님이 이니셔티브를 쥐고 일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피상적으로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인데, 실제로는 하나님
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일련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 하
나님을 인식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모든 성서는 이런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언자들은 영적 세계에 들어온 사실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역
사에서 자기를 계시하는 하나님을 인식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조직신학 1권에서
이사야 48:1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바빌로니아 포로생활로부터
추방된 이들을 다시 복귀시키는, 또한 예루살렘을 갱신시키는 다가오는 구원행위
로부터 이제 세계민족들에게서 능욕 당했던 야웨의 이름이 제자리를 찾게 된다고
기대되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은 이 세상의 일을 잘 들여다 보아야합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로또
복권을 사는 이 세상의 사행심을 따라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방식
으로 자기를 드러내는지 알기 위해서 이 세상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은 그렇게 쉽게 오지 않습니다. 에스겔의 이런 환상이 누
구에게나 주어진 게 아니듯이 아무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는 게 아
닙니다. 그냥 보면 이 세상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에 불과합니
다.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프며, 때로는 배부르고, 때로는 배고프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서 좀더 높은 곳에서 자기를 성취해보려는 세상으로 말입니다. 그래
서 이런 피상적인 것만 보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비열하게 살거나, 아니면 자기
의 도덕주의적 고결함이나 성취감에 만족하면서 교만하게 살거나, 또는 허무하게
살아갑니다. 아마 에스겔 시대의 대다수의 사람들도 그렇게 살았을 겁니다. 바벨
론 포로 생활에 지쳤고, 희망은 없고, 주변 사람들이 점점 바벨론의 이방신을 섬기
게 되고, 그곳에서 출세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갔을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전
쟁, 죽음, 가난, 병, 소외, 정치적 타협 같은 일들만 현실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이
런 상태에서는 결코 하나님이 세상에서 자기를 계시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습
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과 이 역사의 흐름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자
기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갑니까? 대개의 기독교
인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삽니다. 세상 일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거고 우리는 교회
안에서만 순전히 영적인 것만 사모하면서 사는 거야.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상과
교회를, 세상과 하나님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해버렸습니다. 기독교를 개인의 종교
적 체험에만 한정시켜버렸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외로움을 달래고, 죄를 용서받으
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주의화 된 이 세상 속에서 그래도 교회에 나오면 따뜻
한 인간적인 사귐이 있으니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교회는 그
런 인간적인 재미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느 교회가 좋은 프로그램을 진행시키
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많습니다. 이왕이면 재미있는 교회에 다니겠다는 말
이겠지요. 요즘 개척 교회가 잘 되지 않는 이유도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굳이 부
담스럽게 개척교회에 다닐 필요가 어디 있나. 이미 모든 게 완전히 갖추어진 교회
에 편안히 나가지. 대충 이런 생각들입니다.
사실 교회와 세상은 두 개의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하나
님이 교회에서만 자기를 계시하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도 그렇게 하십
니다. 교회는 이 사실을 알고, 그것을 예배를 통해서 확인하고 선포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자기를 드러내신다
는 사실을 세상이 모르고 있으니까 교회는 그것을 명백하게 알려나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상황에만 갇혀 있었지만,
에스겔은 다른 영적인 현실에 눈높이를 두었습니다. 하나님이 미래에 우리를 해방
시키시고, 가서 평안히 살게하시고, 죄에서 벗어나게 하신다고 말입니다. 그는 이
세상의 역사에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고 이 역사를 이끌어가신다는 사실을 너무
나 명증한 현실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바벨론이라는 큰 세력 앞에서, 그런 거대한
정치 군사력 앞에서 무기력해지거나 그것에 영합하지 않고 그것과는 전혀 다른 절
대적이고 참된 힘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그 힘은 곧 하나님입니다. 거룩한 영,
생명의 영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영적인 현실을, 그런 하나님의 계시를 봅니
까?
                                      
                                       <2003.2.9. 새누리 교회>
에스겔 39: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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