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를 베풀라
마태복음 28:16-20, 삼위일체 주일, 2011년 6월19일
오늘은 성령강림절후 첫째 주일이면서 동시에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 절기를 모르는 신자들은 없지만 삼위일체 주일은 대다수 신자들이 낯설어 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성령강림절을 비롯해서 모든 그리스도교 절기는 어떤 역사적 사건과 연결됩니다. 성탄절과 부활절은 예수의 출생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절기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절기는 그런 역사적 사건과 직접 연관되지 않습니다. 또한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와 비슷한 유를 세상에서 찾기도 힘듭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예를 듭니다. 한 남자가 집에서는 남편으로, 직장에서는 직원으로, 교회에서는 집사로 사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삼위일체가 아니라 삼위일체와 비슷한, 그러나 실제로는 유일신론의 변종이라 할 양태론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교리는 이해하기도 힘들고, 실제 우리 신앙에 적용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신자들이 여기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를 모른다고 해서 신앙생활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우리나라 신자들의 신앙 특성에서 볼 때 삼위일체는 오히려 부담스러운 교리입니다. 우리나라 신자들의 신앙적 특징은 미국의 부흥운동과 영국의 청교도에 치우쳐 있습니다. 뜨거운 심령과 경건한 영성으로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잘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이런 신앙에서는 삼위일체 교리는 크게 부각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어린아이 신앙으로 만족한다면 삼위일체를 모르고 신앙생활을 해도 되겠지만 그리스도교 세계의 깊이로 들어가고 싶다면 이 문제를 모른척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회가 체계를 잡아가던 시기에 가장 중요한 논점의 하나가 바로 삼위일체 교리였습니다. 교회는 이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 치열한 신학논쟁을 전개했습니다.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교회는 이런 신학논쟁을 통해서 역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군중은 쉽게 모였다가 쉽게 흩어지고 맙니다. 그 중심에는 사상이, 즉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사상이 없으면 그 어떤 운동도 지속될 수 없습니다. 그 사상이 교회에서는 신학입니다. 그 신학의 중심에 삼위일체가 놓여 있습니다.
삼위일체 논쟁은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신이냐 아니냐 하는 질문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신으로, 즉 하나님으로 믿지만 주변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유대교에서는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즉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언어도단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의 비판에 일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는 크게 달라보였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초월적인 존재이지만 예수님은 역사 내재적인 존재였습니다.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불위한 존재였지만 예수님은 못하는 일도 많은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존재지만 예수님은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문제제기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명제를 해명하는 작업과 연관됩니다. 첫째,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이 부분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일치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이 부분은 그리스도교에만 해당됩니다. 이 두 명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떤 경우에도 유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명제는 서로 충돌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유일한 분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결정했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도 부정되지 않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부정되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 그 대답입니다. 니케아 문서는 동질이라는 뜻의 ‘호모우시오스’라는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도 이것에 관한 신학 논쟁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질론인 ‘헤테로우시오스’도 나왔고, 유질론인 ‘호모이우시오스’ 개념도 나왔습니다. 결국 호모우시오스가 그리스도교 기독론과 신론의 중심 개념이 되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 문서는 성령도 믿음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세월이 좀더 흐른 뒤에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을 믿는다는 말과 아들로부터(필리오케) 온 성령을 믿는다는 말이 첨부되어서 결국 삼위일체 개념의 토대가 확립되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교리보다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흔적까지 완전히 없는 건 아닙니다. 오늘 설교 본문 19절에 따르면 부활의 주심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삼위일체를 구성하는 위격입니다. 이 구절의 핵심 주제는 삼위일체 자체가 아니라 세례입니다. 원래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인물인 바울도 세례를 특별한 경우에만 베풀었습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합류하면서 세례가 중요한 종교의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베풀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 본문에서 마태복음 기자는 세례를 베풀라고 말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모두 거론합니다. 비슷한 상황에서 마가복음 기자는 단순히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이라고 언급합니다.(막 16:16) 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만 아버지, 아들, 성령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다른 태도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사정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사정을 이미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갈릴리에 있는 산에서 뵈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경배했다는 말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즉 하나님으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려고 먼 곳에서 베들레헴으로 온 것과 비슷합니다.(마 2장) 그런데 마태복음 기자는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로, 즉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경배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의심하던 이들은 누굴까요? 의심이 많은 도마인가요? 아니면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훗날 배교한 어떤 제자인가요? 교부 시대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인성만 인정한, 그래서 이단으로 낙인찍힌 에비온주의자들인가요? 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그렇게 주장했던 유대교 신자들일까요? 본문만으로 누구라고 지적하긴 어렵지만, 마태공동체에 예수님의 신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의심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18절)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을 통치할 권한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을 다스릴 수 있는 이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이 문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처럼 하늘과 땅을, 즉 온 우주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초라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한 분이 어떻게 온 우주를 다스린다는 뜻인가요? 여기서 권세라는 말에만 너무 집중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둘째 문제입니다. 그 권세의 주체가 누군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권세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그는 창조주이시고, 지금도 세상을 끌어가시고, 결국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유일한 주인이십니다. 지금 복음서 기자는 그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게 되었다는 말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과 똑같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삼위일체를 비롯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증명의 문제는 아닙니다. 증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반복해서 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천 년 전 단 한번 역사에 실존했던 예수님의 신성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그 신성에 대한 제자들의 경험과 인식을 여기서 다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사도들의 증언이 왜 옳은지를 해명하고 변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운명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믿었습니다. 그걸 경험했습니다. 최종적으로 부활이 그 모든 경험의 중심에 자리합니다. 승천과 하나님의 오른 편에 대한 사도신경의 고백은 모두 부활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런 신앙에 근거해서 초기 그리스도교회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호모우시오스’, 즉 동질이라는 사실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고, 더 나가사 삼위일체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교 비판자들은 삼위일체 신앙을 그리스도교의 헬레니즘화(化)라고 말합니다. 역사적 예수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삼위일체 신앙이 헬라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에서만 그렇습니다. 그 내용은 전적으로 성서에서 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경험에서, 또한 성령에 대한 깊은 경험에서 왔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그 본질을 헬라 철학의 한 형식으로 체계화한 것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체입니다.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신앙생활의 문제요, 삶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19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전하는 그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제자를 삼는다는 말과 세례를 베풀라는 말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즉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세 차원의 이름에 자신의 운명을 건다는 뜻입니다. 1)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 하늘, 우주의 미래가 나의 운명입니다. 우리가 이 자연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답이 나옵니다. 2) 2천 년 전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인 한계 안에서 살다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의 미래가 나의 운명입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3)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신비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 침투하는 생명의 능력을 의존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총체적인 생명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위의 설명이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분이 계신가요? 이게 무슨 뜻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으신가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 차원을 다시 한 번 더 정리하겠습니다. 우선 세례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들으십시오. 세례는 파괴된 관계가 회복되는 사건입니다. 첫째,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말은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가 지으신 지구와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무죄한 이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무엇인지는 여러분이 잘 알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무시할 뿐입니다. 셋째, 성령의 이름은 생명의 기운에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세상에 그 세례를 베풀며 살아야 할 사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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