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의 증언
요 1:29-34
예수와 요한의 관계
복음서는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관계에 대해서 몇 가지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서로 친족 관계였던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동시에 임신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약간의 알력이 있었다는 보도도 있으며,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몇 됩니다. 예수님이 출가하여 공적인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세례 요한은 유대 사회에서 영적인 지도자로 우뚝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의 위치를 알만 합니다. 유대의 마지막 예언자였으며, 대중들과 귀족들까지 두려워할만한 강력한 카리스마를 확보하고 있던 세례 요한은 헤롯 왕궁의 지저분한 가족사에 연루되어서 서른 살 안팎의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합니다. 일반적으로 세례 요한은 금욕적 전통을 강조하는 엣세네 파에 속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메뚜기와 석청만 먹고, 낙타 가죽으로 된 옷을 걸치고, 요단 광야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외형적인 모습만 보아도 그런 엄격한 종파의 대표자처럼 보입니다. 그가 유대 백성을 향해서 불을 토하듯 도덕적인 설교를 선포했다는 사실도 역시 이런 엣세네 전통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에 비해서 예수님은 좀 달랐습니다.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기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걸 보면 세례 요한의 금욕주의와는 분명히 선을 그은 것 같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더 핵심적으로 중요한 점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회심을 강조한 게 아니라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회심을 선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자기와 다른 방식, 다른 방향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까요?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대개 혁명적인 사람은 자기보다 덜 혁명적인 사람을 좀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 당시에 가장 과격했던 세례요한의 눈에 예수님이 너무 ‘나이브’하게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에게는 매우 과격한 사람으로 비쳤습니다. 사람의 시각이라는 것은 어떤 절대적인 것을 못보고 늘 자기를 기준으로 대상을 상대적으로만 보기 때문에 하나의 인격인데도 한쪽에서는 개량주의자로, 다른 쪽에서는 과격분자로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혁명적인가, 보수적인가 하는 범주에 담기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판단은 정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을 뿐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때로는 혁명적으로, 때로는 보수적인 시각으로 설명되어야 하니까 전혀 다른 시각이 따라다니게 됩니다.
어쨌든지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바로 우리 민족이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분, 즉 메시아입니까?” 실제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는 더 이상 꾸물댈 시간이 아니라 화끈하게 밀어붙일 시간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에게 암시하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예수님과 메시아 문제를 깊숙하게 연결시켰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시대의 징조를 분별할 줄 아는 세례 요한은 이 예수가 자기 민족과 인류 역사에서 결정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계기가 언제였는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잡아낼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친족이니까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낼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가끔 만날 수는 있었겠죠. 의기투합하는 젊은이들이 만나서 밤새워 이야기를 하다보면 서로를 더욱 깊이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또는 세례 요한의 세례 운동과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적지 않게 들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 일어났습니다. 세례가 실행되는 바로 그 순간에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배경을 두고 초기 기독교가 훗날 새롭게 정리한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입니다.
‘몰랐던’ 세례 요한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은 요한복음에서 매우 특징적으로 드러납니다. 공관복음에도 이런 증언이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아주 일찌감치, 또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는 것입니다. 1:15절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선재성을 증언합니다. 29절에서 세례 요한은 지나가는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한 분 계신데 그분은 사실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이었다.”(30절). 34b절은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느님의 아들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요한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이런 증언은 단지 요한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 전체의 증언이자 고백이며, 오늘 우리의 증언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사실, 혹은 어떤 사건, 즉 예수 사건이 바로 궁극적인 진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고백하고 증언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재미있는 표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31, 33절에 재차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어린 양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지만 원래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상으로는 당연히 잘 알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모른다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수학 공부가 없는 사람이라면 수학을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반찬 만드는 것도 배우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는 데 있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몰라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는 것처럼 위선에 빠지는 일이 우리에게 허다하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일상에 대한 모름과 궁극적인 것에 대한 모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일상에서는 모른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나타나지만 궁극적 진리에서는 그것이 숨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상의 일을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갑갑하게 생각하지만 궁극적인 것을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의 운명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돈버는 일상은 당장 해결되어야 생존할 수 있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몰라도 당장 생존 자체가 위협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우리의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일상의 모름에만 목말라 하고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불행입니다.
‘어린 왕자’에서 말하고 있듯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어른들과 이 세상을 전혀 다른 각도와 깊이에서 바라보는 어린왕자 사이에 어떤 삶의 차이가 있는가를 보면 하나님을 모르며 살아간다는 게 어떤 불행인지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요? 오늘 교회에 들어오다가 현관에 걸려있는 이철수 판화 달력을 보신 분 있지요? 1월 판화는 가운데 “이 세상을 가만가만 사랑해야지. 이 작은 것들”이라는 글자가 새겨있고 그 둘레에 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물품들이 있습니다. 머리핀, 신, 빗, 연필, 탁상시계, 초 등등, 아주 작은 것들이지만 작가는 그 안에서 생명의 본질을 발견합니다. 그런 걸 모르는 사람은 그만큼 생명의 세계와 떨어져 있다는 뜻이겠지요.
‘알게 된’ 세례 요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세례 요한이 이제 그를 증언하는 자리에 서게 된 이유는 모름에서 앎의 세계로 들어섰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앎의 세계로 들어섰을까요? 그는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때 일어났던 현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는 표시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세례 받는 성령이 비둘기의 모습으로 예수님 위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34a절에서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도대체 세례 요한이 본 성령은 무엇일까요? 예수님 위에 머물렀다는 그 현상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런 대목에 이르면 우리는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기 힘듭니다. 실제로 비둘기 같은 모습의 어떤 구체적인 형체가 예수님 위에 내려앉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냥 신기한 기운 같은 게 임했다는 말인가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해서 율법을 받고 내려올 때 얼굴빛이 너무 빛나서 사람들이 쳐다보지 못했으며, 그래서 얼굴을 가리개로 가렸던 것처럼, 대단한 정신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후광(아우라) 같은 것을 말하는 걸까요?
이런 순간에 우리는 자칫 광신으로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요즘도 어떤 사람들은 귀신의 현상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말합니다. 자칭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몸이나 집에 특정한 귀신이 따라다니는 게 눈에 보인다면서 혹세무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훨씬 심층적인 영적 경험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에 내가 못 보는 것을 그들이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들은 거의 정신병적인 것들이며, 더 중요한 문제는 그런 현상들이 우리에게 아무런 현실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덕스럽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이런 성령 현상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성령은 그야말로 거룩한 영입니다. 거룩한 영은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무엇을 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바람이 풍차를 돌리듯이 말입니다. 거룩한 영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생명의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생명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생명의 영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여기 씨앗이 있습니다. 이 씨앗을 실험실에 갖고 가서 기계적인 충격을 가한다고해도 그것으로 꽃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 씨앗을 땅에 심고 적당한 빛과 물을 주면 싹이 나고 꽃이 핍니다. 씨앗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영이 작용하기 때문에 이런 생명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수님 위에 머문 성령이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는 없습니다. 세례 요한의 영적인 시각에 포착될 수 있는 어떤 거룩한 힘이 예수님 위에 머물렀다는 사실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주 평범한 우리도 어떤 특별한 사람을 만났을 때 그가 총명하다든지 그 사람에게 거룩한 기운이 감돈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시인의 눈에는 우리가 잘 모르고 지나가는 죽음의 모습과 생명의 현상이 포착되듯이 세례 요한에게는 그런 일이 가능했겠지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추적할 수 있는 세계는 바로 여기까지입니다. 더 이상은 비밀입니다. 언젠가는 밝혀지게 되겠지만 아직까지는 비밀입니다. 더 이상 알려고 하다가는 엉뚱한 곳으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아직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식하지 못하는 그런 사건들을 모두 무시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인식 범주 안에 들어온 것만을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제가 밥상에서 우리 딸들에게 먹을거리의 우주론적 지평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도 곧이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약간 알아들어도 실감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거나 확인할 수 있는 것보다는 그렇지 못한 세계가 훨씬,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이 만들어내고 있는 신화의 세계를 넌지시 알아봅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손잡이가 어느 색깔에 맞추어졌는가에 따라서 문밖의 세계가 전혀 달라진다는 그 상상력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 위에 머물고 있는 거룩한 영을 인식하고 이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르던 수학문제를 푸는 것도 재미가 있는데, 하물며 세계 전체 문제와 연관이 있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문제를 경험했다는 게 얼마나 충격적이고 큰 기쁨이겠습니까? 그런 놀라운 경험, 놀라운 깨달음, 그런 기쁨을 아는 사람은 그 사실을 증언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의 삶 자체가 증언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일어나고 있습니까? 이런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요? 이런 일에 관심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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