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29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tvsLT4niVvQ?si=sdbdv0AikXJyigni
▣ 들어가는 말
- 세상의 끝
카프카, 밀란 쿤데라와 함께 체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은 특별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제목처럼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니, 정말입니까? 그 친구가 이미 세상을 떴다고요? 어쩌다 그렇게 됐습니까?”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지요. 주인공은 젊은 방황의 시절에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상태에서 시골의 조그마한 역에서 근무하게 됩니다. “그곳은 세상의 끝 그 자체였다. 그곳에서 기찻길은 끝나고… 기차는 더 이상 달릴 곳이 없었고, 좁은 계곡이 휘어지는 곳에는 초록빛 개여울이 소리를 내며 흘렀다. 주머니의 바닥처럼 그곳이 끝이었고, 더 이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그렇다. 이것이 인생이다. 하루에 기차 두 대가 오가고, 끊긴 선로에는 풀이 덮이고, 그 바로 뒤에는 병풍 같은 우주가 나타나는 것이…” 그 작은 역에서 그는 세상의 끝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방황을 끝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람들은 많은 길을 가야 한다.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어리석은 일을 겪어야 하며, 나무와 송진 냄새가 나는 목재 옆에 있는 자신으로 돌아가려면 삶의 한 조각을 각혈해 뱉어내야 한다.” 어린 시절의 자신, 진정한 자신으로 돌아왔다고 느낍니다.
‘세상의 끝’을 경험해 보셨는지요?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고 산산이 조각난 자신을 보게 되는 경험이지요. 그러나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침목 위에 걸터앉아서 “병풍 같이 펼쳐진 우주”를 경험합니다. ‘이것이 인생이다.’ 깨닫게 되는 순간입니다. 진정한 자신으로 돌아오는 순간입니다. 그것은 오롯이 자신이 되는 순간, 그의 ‘신-경험’인 것이지요.
- 나는 누구인가?
언제 ‘진짜 나’ ‘진정한 나’라고 느끼시는지요. 직장에서는 성실하고 친절한 직원, 상사의 모습을 보입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한 장로님, 권사님이지요. 그런데 집에 들어가면, 갑자기 ‘마귀할멈’이나 ‘싸이코 영감’이 되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지요. 아닌가요?(^^) 혹은 평소엔 점잖고 얌전한데, 운전대만 잡으면 숫자, 영어, 동물 이름을 자꾸 크게 외치시는 분들이 있지요?(ㅋㅋ)
그 여러 가지 모양, 모습 중에서 어떤 것이 진짜 자아, 진짜 나일까요. 어떤 이는 나를 아버지로, 복지사로, 목사로 부르고, 어떤 이는 저의 성격이나 하는 일과 관련해서 저를 규정하기도 합니다. 그 여러 가지 이름과 역할을 모두 벗겨내면 나에게 무엇이 남을까요. “나는 나 자신 속에서 늘 낯선 손님을 만난다.” 폴 발레리의 말입니다. 우리 안에는 늘 낯설고도 다양한 얼굴들이 공존합니다. 두려워하는 나, 부끄러워하는 나, 잘난체하는 나, 이타적인 나, 이기적인 나, 사랑받고자 애쓰는 나… 어느 하나만을 ‘나’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불완전한 조각들입니다. 영화 『23 아이덴티티』에서, 주인공 케빈은 어린 시절 학대의 트라우마 때문에 다중인격 장애가 있습니다. 무려 23개의 인격을 가졌습니다. 이 영화는 극단적으로 분열된 자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너무 과장되고 기이하다 여겼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 사람은 누구나 그 안에 수많은 인격을 가지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엔 하나의 경고가 숨어있지요. 내 안의 다양한 자아들이 조화, 통제되지 않으면, 나를 무너뜨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내 안에 있는 나가 또 다른 나를 파괴하는 것이지요.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인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철학자, 작가, 예술가들이 밤을 새워 고민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평생의 역할과 의무 뒤에 숨겨진 진짜 나를 끝내 붙잡지 못한 채 인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즉, 인간은 스스로 알지 못해 불안해하는 존재입니다. 어쩌면 구원은 진정한 나를 찾는 것 아닐까요. 어떻게 진정한 나를 찾고 안식을 얻게 될까요. 성경은 대답합니다. “너는 너 자신을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를 알고, 너를 새롭게 부르신다.” 오늘은 성경 속 인물들이 어떻게 다양한 자아를 안고 씨름하다, 하나님께 새 이름을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 진정한 정체성
- 이타카를 향하여
트로이의 10년 전쟁이 끝난 뒤, 오디세우스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하지만, 그의 여정은 10년간 계속됩니다. 그는 전쟁 영웅에서 방황하는 자, 거짓말쟁이, 유혹받는 자, 죄를 짓는 자 등으로 정체성이 계속 바뀝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아는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경험과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디세우스는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물으며, 해체당한 자아의 조각을 모아가는 여정에 있는 것입니다.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은 자아를 찾는 인간의 여정인 것이지요.
먼저, 거대한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는 이성을 잃고 사람을 잡아먹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재치로 그를 속여 한 눈마저 멀게 만들고 탈출하지요. 괴물의 눈이 하나뿐이라는 것은 세상을 오로지 자기 기준으로만, 하나의 눈으로만 바라본다는 뜻이겠지요. 자신의 탐욕과 자기 중심성으로 타인을 세상을 보지 못합니다. 따라서 오디세우스가 이 괴물을 극복했다는 것은 자기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장, 변화, 성숙했다는 것이지요.
두 번째, 오디세우스는 아이아이에 섬에서 아름다운 마녀 키르케를 만납니다. 그녀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녀는 오디세우스를 유혹하지요.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키르케를 설득해 부하들을 데리고 그 섬을 떠납니다. 키르케가 사람들을 돼지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은 유혹 앞에서 사람들의 정체성(돼지, 탐욕)을 드러낸다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쾌락과 유혹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세 번째, 세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항해자들을 유혹해 파멸하게 만듭니다. 세이렌의 노래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잃어버릴 만큼 매력적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식에 대한 욕망을 상징합니다. 지식은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빼앗길 만큼 굉장한 유혹이지요. 모든 걸 알려고 하는 지적인 탐욕이 오히려 자신을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디세우스는 지혜로운 자의 대명사였으니 어쩌면 그에게 가장 큰 시련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기둥에 묶어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자 합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언제나 우리의 한계성을 인정할 때, 스스로 기둥에 묶을 때 우리는 욕망과 진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는 것, 무지를 인정하는 것,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길이지요.
마지막으로,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Between Scylla and Charybdis)는 영어에서 쓰이는 관용구이며 진퇴양난의 의미로 쓰입니다. 즉,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 상황에서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는 괴물들인데, 전쟁을 끝낸 오디세우스가 귀향길에 좁은 해협에 이르는데, 양쪽에서 스킬라와 카리브디스가 버티고 서 있습니다. 그는 결국 스킬라를 선택하는데, 그나마 부하 6명만을 내어 주고 해협을 통과하게 됩니다. 이 두 괴물은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갈등, 상반된 가치 사이에서의 딜레마를 의미합니다. 완전한 선택은 없고, 모든 선택에는 대가, 상실이 따르게 되지요. 자아의 완성은 완벽한 선택이 아니라, 고통과 손실을 감내하는 법을 배우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 어떤 선택도 완전하지 않음을, 자신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지요.
이외에도 여러 가지 사건과 난관들을 만나지만, 오디세우스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라는 내면의 소명과 책임을 선택하고 새롭게 태어난 자아를 가진 존재로 변화, 성숙합니다. 오디세우스가 겪은 괴물들과 시련들은 단순한 모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각자 내면에 존재하는 무의식적 욕망, 두려움, 죄책감, 유혹, 선택의 갈등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과함으로써 오디세우스는 단지 집에 돌아온 사람이 아니라, 진짜 자아를 찾고 진정한 자신으로 새롭게 태어난 존재를 말하려 하는 것이지요. 고대인들도 삶에서 자신을 찾는 일,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힘든 일인지 알았던 것입니다.
- 야곱 : 속이는 자에서 하나님과 겨룬 자로
야곱이라는 이름은 곧 그의 인생입니다. “발뒤꿈치를 잡는 자” “속이는 자”라는 의미지요. 그러니 야곱은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삶을 치열하게 속고 속이며 사는 인간을 상징하는 이름이라 할 수 있겠지요.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어릴 적부터 형(에서)을 이기기 위해 형을 속이고,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얻기 위해 형의 흉내를 내고, 외삼촌 라반에게 속지 않으려 자신이 더욱 교활해져야만 했던 야곱. 그는 그렇게 수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왔습니다. 그에게 삶은 너무나 고단하고 힘겨운 전투와 같은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얍복 나루터에서 그의 세상의 끝을 경험합니다. 두려움과 죄책감, 절망, 외로움이 극에 달한 깊은 밤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사투를 벌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과의 씨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걸어온 삶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각혈해 뱉어내듯 치열한 싸움을 벌입니다. 그 싸움의 실체를 알 수 없지만, “허벅지 관절을 치매…”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이런 표현을 보면, 단지 정신적인 어떤 것 이상의 몸과 마음을 다한 격렬한 어떤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난생처음 전 존재를 건 존재 물음을 묻습니다. 존재 앞에, 거룩한 신 앞에 섭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고백합니다. 자기 존재의 본질을 깨닫습니다. “나는 야곱입니다.” “저는 속이는 자입니다.” 저의 존재는 허무이며, 절망이며, 어둠입니다. 고백합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깨닫습니다. 존재와는 거리가 먼 비존재로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심리학자 칼 융은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부인하는 그림자를 직면할 때에야 비로소 완전해진다.” 야곱은 자기 그림자와 씨름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이름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입었습니다. “이제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절망과 허무에 불과한 사기꾼 야곱, 그 속이는 자, 인간을 향해 신(하나님)은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무의미와 허무, 절망과 고독 속에서 허우적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겨룬 자,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자, 비존재에서 존재로 나아가는 자, 존재를 품고 사는 자…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과 씨름함으로써만 존재를 확인하고 유지할 수 있는 고귀한 자로 이름 지어집니다. 신은 우리를 그 길로 부릅니다. 성경은 인간이 “이마고 데이”(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 말합니다. 이는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참된 자기를 찾을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신과 씨름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 베드로: 갈대에서 반석으로
또 한 인물, 베드로를 살펴보겠습니다. 그의 본명은 ‘시몬’입니다. 이름의 뜻은 “듣는 자”로서, 흔들리는 자의 상징입니다. 야곱을 한 개인이 아니라 상징으로 보았듯이, 베드로는 한 개인이라기보다는 흔들리는 ‘인간의 약함’을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대표적인 예수의 제자입니다. 따라서 그의 모습을 통해 예수를 따르는 이들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의 인격과 성격은 자주 감정적이고 충동적이며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믿음을 고백하지만, 상황에 따라 부인하기도 합니다. 바다 위를 걷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다가도 두려워하며 물속에 빠져버리고 말지요.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눅 22:33) 했던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를 저주하고 부인하며 도망칩니다. 열정과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베드로는 삶의 바람과 파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신앙인, 인간 존재의 대표입니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약 1:6) 우리 신앙은, 우리 존재는 이처럼 환경과 감정과 상황 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와 같습니다. 어떤 때는 마음속에 사랑과 정의가 가득할 때도 있고, 또 어떤 때에는 증오와 미움과 분노가 가득합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사 24:18-20) 마치 땅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듯이 우리의 터전, 근거, 뿌리가 무너져내리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세 번의 부인을 통해 베드로가 경험한 것은 바로 토대가 무너져 내림입니다. 세상의 끝입니다. 한국교회, 무엇보다 저 자신을 볼 때, 우리의 기초,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지 깨닫습니다. 너무나 비겁하고, 비열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탐욕에 눈이 멀었습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길을 잃습니다. 용기를 잃고 무너져내립니다. 구토와 절망만이 남습니다. 우리는 시몬과 같은 존재,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끝에, 절망의 아침에, 죽음과 같은 어둠 속에 부활하신 예수가 찾아옵니다. “너는 시몬이 아니라 베드로다. 너는 내 교회의 반석이 될 것이다.”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존재가 하나님 손에 반석(‘게바’- 반석, 바위)으로 세워집니다.
“우리는 자주 종말을 잊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몸과 영혼 안에 종말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주 국가와 문화 전체가 종말을 잊는 데 성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들 역시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과 성장 안에는 늘 종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그 안에 종말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틸리히, 『흔들리는 터전』) 우리가 흔들리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본질적으로 우리 안에 종말(비존재)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든 터전의 터전,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서는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을 ‘필멸의 존재(the mortals)’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그들이 불멸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선지자들이 터전의 흔들림을 직면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 흔들림 앞에서 꽁무니를 빼지 않고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반, 터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끝에 서야 합니다. 그 무너져 내리는 터전을 직면함으로써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 진정한 터전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터전이 그 위에 놓인 터전입니다. 이 터전은 흔들릴 수 없으며 영원합니다. 우리의 참된 자아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드러납니다. “필멸의 인간”도 “영원한 가능성”도 오직 하나님 앞에서 규정되고 열립니다.
▣ 나가는 말
앞서 살펴보았듯이 진정한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자아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변화 성숙해가는 것이지요. 그러니 ‘나를 찾는 일’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물음’은 평생을 두고서 물어야 하는 질문입니다.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성 이타카에 몰래 숨어들어옵니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지요. 그런데 놀라운 장면이 펼쳐집니다. 반려견 아르고스가 주인을 알아보고 꼬리를 흔들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둡니다. 그 모습에 오디세우스가 눈물을 흘리지요. 이 장면은 누군가가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보아줄 때, 불러줄 때,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순간에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이타카의 영주임을 알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이타카에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옛 주인지만, 이미 새로운 이해와 성찰을 거친 진짜 주인이 된 것이지요. 누군가가 나의 진짜 모습을 보아주기를 원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타인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불러주면 어떨까요.
- 흔들리지 않는 토대
성경은 인간의 불안정함을 폭로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위에 흔들리지 않는 반석을 제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태복음 16:16) 베드로의 고백은 그의 힘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어진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에도 같은 논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브리서 13:8)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으니 감사하자.”(히브리서 12:28) 즉, 인간은 흔들리되, 그리스도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며, 그 반석 위에 서야만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자율적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만 발견되는 “관계적 실체”라는 말입니다.
- 새 이름, 새로운 나
밤새 싸운 끝에, 하나님은 그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이라 하리니…”(창 32:28) 야곱(속이는 자)은 죽고,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이 태어납니다. 영국 시인 T.S. 엘리엇은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탐색을 멈춘 그 자리에서, 우리는 처음 출발했던 그곳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야곱은 더 이상 도망자도, 속이는 자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자리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의 길을 새로이 시작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내 안의 여러 자아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때로는 두려움이 나를 다스리고, 때로는 분노가 나를 지배하며, 때로는 욕망이 나를 삼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자아를 알고 계시며, 그 모든 자아 위에 새 이름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속이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입니다. 더 이상 실패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반석입니다. 더 이상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이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의 바울입니다. 문학과 철학은 인간의 고뇌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고뇌의 끝에서 하나님이 새 이름을 주시는 희망을 전합니다. 오늘도 우리 안의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에게 새 이름을 준다.” 그 이름으로 사시길 축언드립니다.
▣ 기도
주님,
내 안의 갈등하는 자아들,
나를 무너뜨리는 자아들을 주께 드립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시몬을 베드로로 부르신 주님.
오늘도 내 이름을 새롭게 불러주시고,
당신이 주시는 새 이름을 따라 살게 하소서.
얍복강의 밤을 지나
하나님이 부르시는 ‘참된 나’로 걸어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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