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의 하나님, 우리의 소망
(롬 15:4-13), 12월5일, 대림절 둘째 주일
바울은 로마 교회를 방문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기회가 없었습니다. 2천 년 전의 여행은 지금과 크게 달랐습니다. 지금이야 예루살렘에서 비행기를 타면 서너 시간이면 로마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바울 당시는 몇 달이 걸릴지도 모를 정도로 교통 상황이 열악했습니다. 바울은 건강도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이미 복음의 씨앗을 뿌려놓은 소아시아 지역과 그리스 지역의 교회도 틈틈이 돌봐야했습니다. 그런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바울은 당시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구호에 있듯이 당시 지중해 문명권의 중심지인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평생의 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울은 직접 방문하기 전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로마서입니다. 전체가 16장에 이르는 장문의 신학적인 편지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15장입니다. 14장까지 언급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대목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룬 주제는 칭의론, 즉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교리였습니다. 이런 주제의 배경에는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의 관계가 자리합니다. 이 두 집단은 모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속했지만 율법에 대한 입장에서는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어릴 때부터 율법을 지켰습니다만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율법과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대립은 예상 외로 심각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형편과 비교한다면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토라와 할례를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과 동생들도 모두 이런 입장을 대변했습니다. 여기서 대표자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입니다. 바울을 중심으로 하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유대 그리스도인이나 이방 그리스도인이나 모두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단호한 태도로 전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죄에 대한 이해가 자리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죄에 빠졌고, 이방인들은 율법 없이 죄에 빠졌기 때문에 여기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이라는 주장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인류 전체가 총체적으로 죄에 물들었다는 바울의 지적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이 가르침은 죄 숙명주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존재론적 힘이 개인과 사회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성서적 표현입니다. 도덕교육을 받는다거나 심리적인 상담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우리를 파괴하는 악의 힘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켜도 여전히 악에게 굴복 당했고, 이방인들이 아무리 헬라철학에 심취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율법을 문명으로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문명이 최고조로 발달한 서구나 그들을 따라가는 우리가 문명과는 담을 쌓고 사는 인도네시아 원시림의 원주민들보다 선할까요? 죄는 우리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존재론적 악한 힘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바울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또는 문명인이냐 야만인이냐 하는 다툼을 끝내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차이를 뛰어넘는 엄청난 사태를 직면해야만 그 차이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광을 돌리라
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이 서로를 용납해야만 할 근본 이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셨다면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5,6절도 이 사실을 말합니다.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5절)라는 표현이나, ‘한 마음과 한 입으로’라는 표현이 다 이를 가리킵니다. 서로 대립하던 이들이 서로 용납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영광에 참여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영광’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왜 하나님의 영광이 되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영광은 하나님의 현현을, 또는 임재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주이시고 생명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을 삶의 능력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예를 들 수 있습니다. 평소에 서로 나쁜 감정을 보이던 여러 사람들이 배를 탔습니다. 서로가 다른 사람보다 잘났다는 사실을 자랑합니다. 그러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다행히 구조선을 만나서 안전한 항구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죽다 살아났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사람들의 차이를 크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다른 차원의 삶으로 들어갑니다. 바울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에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하고 외쳤습니다. 시편과 신명기를 인용하면서 즐거워하고 찬송할 것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과 구원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별로 분명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이 분명하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람의 차이를 넘어서 하나님을 찬송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구원을 말하지만 실제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겉모양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교회 지도자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영광이라고 표현한 생명과 구원을 이해하지 못할 경우에 벌어지는 현상은 두 가지입니다.
1) 하나는 세속적인 세계관에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거룩한 경험이 없으면 세속적인 경험이라도 해야만 사람은 견딜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세속적이라는 말은 무조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경제논리에 묶여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도 그것이 왜 잘못인지도 모릅니다. 출세하고 부자가 되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 것이고,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고 가난한 자가 되면 축복을 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회의 낙오자와 마이너리티를 자신들과 구별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해서 이렇게 잘 살게 되고, 자식들이 잘 됐다고 잘난 척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도 그런 자랑을 할 때가 있습니다.
2) 다른 하나는 열광적 신앙행태입니다. 얼마 전에 ‘땅밟기’라는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습니다. 어느 선교단체에 속한 청년들이 봉은사에 들어가서 종교행위를 한 동영상이 퍼졌습니다. 그 청년들은 악한 영과 악한 권세를 무너뜨려야겠다는 열정으로 그런 일을 행했습니다. 마치 불교 청년들이 온누리교회나 사랑의 교회당에 들어가서 목탁을 치면서 염불을 외우는 것과 비슷한 행위입니다. 어느 교회는 예루살렘에 직접 가서 예수 퍼레이드라는 행사를 시도하기도 했고, 중동 이슬람 지역에 가서도 그런 퍼포먼스를 행했습니다. 하기야 절에 불을 놓거나 부처상의 머리를 자르는 행위보다야 점잖기는 합니다. 이런 행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과 구원의 신비를 놓친 채 ‘예수천당, 불신지옥’만을 외치는 광신자들의 행동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은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가끔 일어났습니다. 십자군전쟁, 마녀재판, 인디안 박멸 등이 그렇습니다. 성경이 땅밟기를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아브라함의 가나안 정착과 여리고성의 함락에 얽힌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이런 보도들은 고대인들의 독특한 세계 이해를 전제로 해야만 합니다. 고대인들은 세상을 주술적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 주술적인 생각을 성서의 본질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구약이 가르치는 번제와 돼지고기 금지 등은 지키지 않고 땅밟기만 그대로 지킨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전형적인 승리주의, 패권주의에 불과합니다. 이런 행위는 선교 전략적 차원에서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이번 일로 인해서 한국사회가 기독교를 매우 무례한 종교로 판단했습니다. 이런 행태가 믿음이 순수한 사람들에게서 흔하게 벌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무리 인격이 괜찮고 신앙에 대한 열정이 있어도 성서와 신앙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어리석은, 더 나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소망의 하나님
이와 달리 하나님의 영광을 바르게 인식하고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삶이 나타나게 될까요? 바울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소망입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13절은 기도문입니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소망입니다. 바울은 4절에서도 이미 구약의 핵심이 바로 소망이라고 말했습니다. 12절에서는 사 11:10절을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소망의 근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설명이 여러분에게 복잡하게 들리겠지만 바울은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생명과 구원의 현실인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다면 당연히 그것이 완전히 나타날 때를 기다리며 소망하게 됩니다. 그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그 소망이 삶의 원동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8:24절에서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이라거나 ‘소망이 넘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이 왜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될까요?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이거나 ‘요셉처럼 꿈을 꾸자.’는 말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물론 사람은 이런 야망과 꿈으로 자기 인생을 개척하는 건 분명합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나폴레옹 식의 자기 확신도 필요하긴 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를 적극적인 사람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동시에 허황된 꿈, 욕망, 갈망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서 오히려 삶이 파괴되기도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근본적인 소망은 이런 것과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자신의 꿈이 실현될 날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을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계시, 그의 궁극적인 생명, 영생,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희망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가리켜서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종말’이라는 말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들리나요? 지금 현실의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비현실적인 것으로 들리나요? 그런 것들은 신학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되나요? 아닙니다. 종말론적 신앙은 우리 모두의 중심입니다. 그런 시각이 아니면 우리의 신앙은 기독교적인 특징을 놓치고, 일반적인 종교로 떨어지고 맙니다.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대구샘터교회에서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을 합니다. 10년 전에 여러분은 어떻게 지내고 있었나요? 10년 전의 결과가 오늘이 아니라 역으로 오늘이 10년 전을 규정한다는 것이 종말론적 시각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종말이 모든 걸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바울도 그때가 되어야 모든 실체가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종말론적 승리를 내다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때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넘친다는 말은 종말론적 영성이 예민해진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소망으로 삽니까? 삶의 형편이 좀 나아질 것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인가요? 실제로 일용할 양식을 간구해야 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분들은 그런 소망을 품어도 됩니다. 주기도가 가르치고 있듯이 그것은 믿는 자들의 권리이고 책임입니다. 그러나 형편이 나아져도 삶의 근본 문제들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만은 잊지 마십시오. 웬만큼 살만한데도 더 많은 소유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영혼이 병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런 소망도 없이 그럭저럭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총을 모두 놓치고 말 것입니다. 종말론적 소망에 영적인 눈을 뜨십시오. 이런 소망을 품은 사람들은 교우들 사이의 차이를, 가족과의 차이를, 이웃과의 차이를 넘어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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