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히 오리라.”
계 22:12-14, 16-17, 20-21, 부활절 일곱째 주일, 2016년 5월8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마라나타
기독교인들 중에서 요한계시록을 1장부터 22장까지 다 읽어본 분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전체 66권 중에서 가장 읽기 어려운 성경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읽기 어려운 이유는 요한계시록의 내용 자체가 오늘 우리의 현실과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글의 형태가 매우 특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을 가리켜 묵시문학이라고 합니다. 극단적인 상징 언어들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아무리 집중해서 읽어도 무엇을 가리키는지 이해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당시에 기독교가 처한 상황이 자기를 드러내놓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요한계시록은 마치 복면을 쓴 사람처럼 숨어서 뭔가를 말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 모든 내용의 결론이 마지막 구절인 22:20-21절입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이런 구절을 읽으면 대개 ‘이게 뭐지?’ 하는 느낌을 받을 겁니다. 대충 말하는 걸 따라가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고,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어서 오시라.’고 반기는 말을 합니다. 재림 신앙을 가리킵니다. 이건 기독교의 아주 오래된 신앙입니다. 행 1:6-11절에는 예수님의 승천 장면이 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분간 지상에 머물러 있다가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 순간에 하늘에서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오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전 16:22절에서 바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찬송가 후렴처럼 불리던 아람어 한 구절을 말했습니다. ‘마라나타’, 번역하면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입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은 사도신경입니다. 거기에도 예수의 재림은 정확하게 나옵니다.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재림 신앙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곤혹스러운 주제입니다. 자연과학에 위배되는 듯이 보이는 재림 신앙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고,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으로서 재림 신앙을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그런 주제는 멀리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런 태도가 이해가 되긴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세상기준에 따라서 세상살이하기에 바쁩니다. 돈 벌고, 자식 키우는 일만 해도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재림 문제를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지나치기 마련입니다. 재림 문제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대부분이 다 이런 식으로 취급됩니다. 기독교 신앙 자체를 알고 경험하는 것보다는 자기의 삶의 수단을 확대하는 일에 치우칩니다.
재림 신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신자들도 실제로 재림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재림의 내용입니다.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초림 때처럼 여자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는 방식으로 재림하는 것일까요? 많은 사이비 교주들이 그런 방식으로 말합니다. 자기가 바로 재림의 예수라고 하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재림의 시기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재림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언제 재림이 일어날지도 알 수 없습니다. 내용에서도 그렇고 시기에서도 마찬가지도 아무리 재림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자라 하더라도 실제로 그런 세계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저는 그 쉽지 않는 주제를 여러분에게 설교해야 합니다. 저의 설명을 들어보실 마음이 있으신가요?
재림 신앙의 토대
우선 본문의 문장을 정리해서 읽어야 합니다. 20절은 두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신 문장과 회중들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한 문장입니다. 두 번째 문장이 실제 이야기입니다. 초기 기독교인이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했다는 것이 원래 이야기이고, ‘속히 오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이야기의 변형입니다. 따라서 재림 신앙의 핵심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무슨 이유로 예수님이 재림할 것을 기대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어떤 근거가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지 무턱대고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거나,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믿는다고 말한 게 아닙니다.
재림 신앙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충돌하는 데서 나왔습니다. 하나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절대 생명을 경험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죄와 죽음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는 충돌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힘에 의해서도 손상당하지 않는 절대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경험했습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은 참된 만족과 기쁨과 해방과 평화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경험을 하고, 똑같은 고백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없으면 기독교 신앙은 성립되지 않으며, 더구나 재림 신앙의 세계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절대 생명을 경험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문제는 세상은 여전히 투쟁적이고 불안하고 죄 없는 이들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되던 시대에는 로마의 황제숭배가 노골적으로 강요되고 있었습니다.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라는 구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로마 중심의 이데올로기가 세상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상황이 절망적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부활의 예수가 다시 오셔서 세상의 생명을 완성하신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때만 부활의 예수가 메시야, 즉 구원자라는 사실과 이 세상이 여전히 교활하고 비굴하다는 사실의 모순이 해소되기 때문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재림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예수를 절대 생명으로 경험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생활을 어느 정도 하면 예수를 대충 안다고 여깁니다.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기독교의 가르침보다는 자신들이 세상살이에서 경험한 것들이 영혼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재림 신앙이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교회에서도 존경받는 어른 행세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신앙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손에 꼽아보십시오. 예수 믿고 의로워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입는 일에만 마음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부활 경험이 실제로 무엇인지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는 기회가 많지 않을 겁니다. 대개는 그렇고 그런 사람 이야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물론 사람 이야기도 해야지요. 교회에 다니면서도 기독교 신앙 자체에 관심이 없다는 게 근본 문제입니다. 그럭저럭 교회에 다니다가 기독교 신앙의 요체를 경험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할 겁니다. 이와 달리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노래하고 기도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전체 실존으로 예수의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재림 신앙 없이도 세상을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또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재림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고 사니까 여러분도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으신가요? 제가 어떻게 대답을 드려야 할지요. 예수님의 말씀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마 13:4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면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재림 신앙 없이도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면 됩니다. 재림 신앙을 기독교 신앙에서 배운 저는 그런 방식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날을 시냇물을 찾는 목마른 사슴처럼 기다리면서 살겠습니다. 기독교인은 두 종류로 구분됩니다. 재림 영성이 없이 대충 주변과 어울리면서 편안히 사는 사람과 재림 영성에 의존해서 깨어있는 영혼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저는 후자에 속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그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될 그 미래의 생명에 대한 희망만이 저를 허무하고 거친 세상에서 버텨낼 수 있는 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림 신앙과 오늘의 삶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싶은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미래의 생명에만 희망을 둔다면 현재의 삶은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냐, 하고 말입니다. 확실하지 않은 미래보다는 손이 닿는 지금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자칫 내세주의에 빠져서 현실의 삶을 무시하거나 부정할 수 있습니다. 이단들에게서 이런 극단적인 형태가 종종 나타납니다. 사회생활을 등한히 하게하고 자신들 집단에만 신경 쓰게 합니다. 천국에 가서 황금 면류관을 쓸 테니까 모든 삶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자신들 집단에 헌신하라고 강요합니다. 철저하게 내세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태도입니다. 이단들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정통교회도 부분적으로 이런 경향을 보입니다. 교회는 하늘나라에만 희망을 두니까 정치나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그냥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식입니다. 결국 현재의 삶은 의미가 축소되고 내세만이 지배적으로 나타납니다. 내세주의는 재림신앙의 왜곡입니다. 재림신앙은 오늘 여기서의 삶을 도피하게 하는 게 아니라 훨씬 더 역동적이게 합니다. 삶을 가장 의미 충만하게 만들어줍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경험하셨나요? 어떻게 경험하셨나요? 근거가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오신다는 믿음과 희망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일어날 사건이 지금 우리의 삶에 비밀한 방식으로 현실(reality)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이 사실을 실제로 느끼지 못하면 이런 기독교 가르침은 선한 거짓말에 떨어집니다. 값싼 위로에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재림 때에 일어날 사건은 생명 완성입니다. 생명 완성은 구원입니다. 생명을 파괴하는 죄와 죽음의 극복입니다. 이런 설명도 관념적으로 들으신 분이 있을 겁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좋은 데 가는 거, 최상의 복지가 보장된 천국에서 영원무궁하게 사는 거’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멋진 상상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생명 완성의 방법이나 그 상태를 알 수 없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어도 구원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생명 완성, 즉 구원은 하나님만이 하나님만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을 약속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의 재림으로 완성됩니다. 따라서 예수의 재림을 학수고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써 완성될 그 절대 생명이 오늘 여기에 비밀한 방식으로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재림은 단순히 미래가 아니라 비밀한 방식으로 현재 사건입니다. 그것을 붙들고 우리는 죄와 죽음의 기운이 여전히 기세를 부리는 이 세상을 뚫고 나갑니다.
심판의 주
재림의 주님이 생명을 완성하는 방식은 심판입니다. 사도신경의 그 구절을 다시 보십시오.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사람들은 심판이라는 말을 불편하게 여깁니다. 기독교인들도 심판받는다는 사실을 두려워합니다. 생각이 짧은 목사들은 심리적으로 약한 신자들을 시험에 들리게 하는 발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구더기, 유황불, 지옥 등으로 위협합니다. 신자들이 그런 설교에 반복해서 노출되면 심리적으로 불안증을 보입니다. 그런 신자들에게 하나님은 두려운 분으로, 잔인한 분으로 각인됩니다. 단순하게 말해서, 죽으면 구더기와 불길의 고통을 모르니 그런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심판을 기대합니다. 심판은 저에게 생명 아닌 것들, 사이비 생명인 것들, 오히려 생명을 파괴하는 것들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배타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이 안 되는 교만, 이기심, 공연한 분별심, 표리부동, 불신앙 등이 제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심판하러 ‘속히 오신다.’는 것은 정말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는 이유는 심판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윤리 도덕적인 기준으로 심판을 받는다면 우리는 모두 구원에서 제외될 겁니다. 이 말씀을 부도덕하게 살아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생명을 얻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겠지요. 예수 사건은 윤리 도덕을 뛰어넘는다는 뜻이지 윤리 도덕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엄중한 사실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상세하게 해명했습니다. 유대인은 율법으로 죄에 이르고, 이방인은 율법 없이 죄에 이르기 때문에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기의 행위와 업적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게 구원이고, 절대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자기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는 애매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이게 너무 명료한 진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에게서 절대 생명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예수 외에 다른 길은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속히 오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 재림 신앙은 예수를 어떻게 경험했는가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실질적인 것으로, 또 어떤 사람에게는 공허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겁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를 좀더 깊이 알기를 바랍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너무 많은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 예수를 아는데 마음을 둘 수가 없습니다. 일상의 과잉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생활의 과잉이 예수를 아는데 마음을 두지 못하게 합니다. 한국교회에는 봉사활동도 많고 성경공부도 많고 기도 모임도 많습니다. 조직도 많고, 직위도 너무 많습니다. 집사로부터 안수집사, 권사, 장로 등, 위계질서도 특이합니다. 이런 일에 마음을 쓰다가 결국 예수와의 관계는 영양실조에 걸린 것처럼 병들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예수를 통해서 절대생명을 경험한 사람만이 그가 오는 순간을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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