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말
- 다음 세대에 대한 염려
“아이는 지식은 가득하지만 지각이 없다. 지각이 없으므로 분별도 있을 리 없다. 아이는 노예이거나 폭군처럼 자라난다. 그 상태의 무능과 오만, 악덕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인간의 비참함을 토로한다. 참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장 자크 루소의 『에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전 세대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지식과 정보를 소유한 아이들을 보며 놀랍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 그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서도 너무나 무능력하고 오만과 악덕한 모습을 보여줄 때가 많습니다. 굳이 서이초등학교 사건 등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그런 안타깝고 비극적인 모습을 우리는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요즘 아이들은…” 이라며 혀를 차고 걱정을 합니다.
“어른들이여, 제발 인간다워라. 그것이 당신들의 첫째 의무이다. 신분과 세대를 뛰어넘어 인간답게 행동하라. 아이들을 사랑하라. 자애로운 마음으로 그 아이들의 천성을 독려하라. 당신에겐 그 아이들의 행복을 빼앗을 권리가 없다.” 그러나 루소는 앞선 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제발 인간다워지라고. 아이들의 행복을 빼앗지 말라고. 앞선 세대가 아이들에게 주입하고 있는 수많은 것들이 아이들을 행복이 아니라 불행으로 빠뜨리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입니다.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학문은 단 한 가지, 인간의 의무에 관한 학문밖에 없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가르쳐야 할 것.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통찰입니다. 역시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육서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을 만합니다.
우리가 삶에 대해 고민하고 더 나은 삶, 더 나은 세계를 위한 노력과 분투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음 세대를 향한 사랑과 연민, 책임감 때문이기도 합니다.
▣ 수로보니게 여인
-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성서를 해석할 때 지명이나 이름 등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첫 구절에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가 어디인지 모르겠습니다. 일부러 “거기를 떠나”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분명 장소에 관한 어떤 의미가 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가 어딘지를 거슬러 올라가며 찾아보면, 6장 53절에 가서야 장소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바로 “게네사렛”이라는 곳입니다.
게네사렛은 갈릴리 호수의 북서 쪽에 위치한 비옥한 평야 지대입니다. 그곳은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댄 사람들은 모두 치료를 얻는 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마14장, 막6장) 예수는 그 게네사렛을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러니까 게네사렛과 두로 사이에 ‘정결 논쟁’이 끼워져 있는 것이지요. 이 역시 마가의 의도적인 편집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논쟁의 결론을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내립니다.
이 정결 논쟁은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를 위한 밑바탕을 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정결 논쟁을 통해서 마가는 손을 씻지 않고, 다시 말해서 부정한 손으로도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이후에 전개될 이방 전도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방인은 더럽고 유대인은 깨끗하다는 생각 자체야말로 진짜 더러운 것이 아니냐는 비판입니다.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도구일 텐데, 오히려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도구가 된 것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지요.
무엇이 더러운 것이냐? 깨끗한 것이 무엇이냐? 속이 더러우면서 겉을 깨끗이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겉모습은 온갖 율법을 지키며, 종교적 경건을 갖추었으나, 내면은 온갖 추악한 것으로 가득하고 미움과 증오와 차별로 가득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더럽고 추한 것이 아니냐는 통렬한 지적입니다.
- 이방인의 땅으로
예수는 유대 땅을 떠나 이방인의 땅, 두로 지방으로 가십니다. 마가는 예수가 이방인의 땅으로 가야 하는 정당성을 ‘정결 논쟁’을 통해서 확보한 셈입니다.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로 가시는 것 역시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이지요.
- 헬라인 / 수로보니게 족속
그곳에서 예수를 찾아온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마가는 이 여인을 “헬라인”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상류층에 속했다는 말입니다. 헬라가 패권을 잡고 있던 시대에 혈통적으로 수로보니게 즉 옛 시리아 제국의 페니키아인의 후예인 그녀가 헬라인이었다는 것은 변방의 사람이 아니라 주류에 속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유대의 서쪽 지중해 해변에 위치한 두로와 시돈 지역은 옛날부터 해운과 무역이 발달한 지역으로 경제적으로 엄청난 번영을 누렸던 지역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이 여인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시리아 제국의 후예로서 자긍심을 가진 말 그대로 상류층의 여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얼핏 재미있는 구절입니다. 복음을 전하러 일부러 이방 땅으로 가셨는데, 아무도 모르게 하려 했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진정한 진리를 감추어도 감추어지지 않고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숨기려 했는데, “소문을 듣고 곧 와서”라는 구절을 보면, 그 여인이 얼마나 간절히 예수를 찾았고 나아왔는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리를 찾으려는 그녀의 노력, 감추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그녀의 탁월한(?) 식견 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간절히 찾는 자가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숨길 수 없더라.”
- 발아래 엎드리다.
그런 사람이 다른 족속의 남자 앞에 나와 엎드립니다. 간청합니다. 딸에게 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특이한 점이 있는데, 바로 치유를 받을 당사자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개의 경우는 치유를 받는 사람이 직접 예수를 만나서 치유를 받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야이로의 딸 사건을 보아도, 예수는 야이로를 따라서 딸을 만나러 직접 찾아가지요.(5:24) 그러니 이 사건에서도 예수는 그 여인과 함께 딸에게로 갔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찌 되었든 전형적인 예수의 치유 이야기로 전개되어 갑니다. 예수가 먼저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향해 갑니다. 당사자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예수는 그곳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예수는 유대 땅을 떠나 이방의 땅으로 굳이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치유되어야 할 당사자를 만납니다. 그 당사자는 치유를 받기 위한 대가를 치르고 왔습니다. 고통받았고, 노력하고 애썼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소문을 뚫고서 예수를 찾아왔고, 예수 앞에 겸손히 엎드립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러한 과정을 보고 마침내 예수께서 그를 치유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구원과 자유와 해방을 얻습니다. 이런 순서로 가야 마땅합니다.
- 낯선 예수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예수는 그 여인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습니다. 거절하시려거든 곱게 하셔도 될 것을. 이리도 냉정하게, 심지어 천박하게 자신을 찾아온 여인을 향해 ‘개 취급’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예수의 모습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지요? 그 역시 그 시대의 유대인 남성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꼰대’에 불과했던 것일까요?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한남’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흔히 우리가 들어왔던 구원의 우선권이 유대인들에게 있다는 뜻일까요? (헛소리다)
저는 여기서 마가의 탁월하고 치밀한 짜임새와 구성을 봅니다. 기존의 일반적인 치유 이야기의 틀을 따르지 않고 파격적인 구성을 합니다. 갈등이 최고조에 다다릅니다. 마가의 치밀하고도 대담한, 굉장한 구성입니다. 극도의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독자도, 그 이야기 속의 수로보니게 여인도, 그 현장을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도… 모두를 당혹스러움과 의심과 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마음속에 엄청난 긴장과 갈등, 의심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저 사람이 우리가 따르는 예수란 말인가?’ 별의별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예수의 평소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여인의 사회적 신분과 혈통 등 그녀의 인격을 고려해 보십시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러실 수는 없지요.
그런데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존 우, 『선의 황금시대』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기 선불교의 고승들의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는 책입니다. ‘조주’라고 하는 위대한 고승이 사미승 시절에 ‘남전’이라고 하는 스승 아래에서 수행 중의 일입니다. 하루는 조주가 문을 다 걸어 잠그고 땔감 더미에 불을 붙여 온 부엌이 연기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조주는 “불이요! 살려주세요!”라고 소리칩니다. 사람들이 죄다 부엌문으로 몰려들자, 조주는 “올바른 말을 하지 않으면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겠다.”라고 말합니다. 모여든 누구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합니다. 그러자 스승 남전은 말없이 열쇠를 창문 너머로 던져 줍니다. 이것이야말로 듣고 싶어 하던 올바른 말이었기에 조주는 즉시 문을 열고 나옵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정확한 해설은 없지만, 저는 이렇게 해석해 보았습니다. 진정한 진리, 도를 찾는 제자가 너무나 답답한 마음에 부엌에 불을 지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면 죽는 것이 낫다는 결기였을까요. 절박함이었을까요. 수많은 제자가 있었지만 누구도 막내의 이런 절박함에 답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 뜻을 알아본 스승은 말없이 열쇠 꾸러미를 던져 넣어 주지요. ‘살려 주세요’는 구원의 요청입니다. 진리의 요구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 안에 있음을 깨우쳐 준 것이 아닐까요. 네가 잠근 문은 너 외에 누구도 열 수 없다는 것 아닐까요.
갑자기 제가 이런 고승들의 이야기를 한 것은 오늘 본문이 저에게는 마치 위대한 두 고승의 선문답같이 들였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비범함을 알아보았던 여인, 구원을 찾아 예수를 찾아온 여인, 그리고 예수 앞에 기꺼이 엎드린 여인과 그 엎드림이 진짜인지, 그녀의 간절한 바람은 진짜인지, 여인의 진실성을 테스트해보아야 했던 예수 사이의 대담한 대화. 여인은 예수의 말 너머의 마음과 의도를 읽어냅니다. 그러기에 엄청난 응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에 예수는 완전히 만족합니다. 아무도 그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두 사람은 완전히 이해했고 만족했고 흡족해합니다.
▣ 나가는 말
-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
본문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은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두었다 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더러운 귀신’ ‘더러운 영’은 소복 입고 나타나는 귀신 따위가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을 더럽히는 더럽고 추한 생각들, 사고, 시대의 정신을 말합니다. 즉, 여인은 자기 딸이 가진 더러운 영을 봅니다. 온통 아이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영혼을 파괴하고, 고귀함을 무너뜨리는 추하고 잘못된 사고방식, 자기의 출세와 성공만을 위하는 더러운 영을 봅니다.
지금 우리 역시 다음 세대의 ‘더러운 영’이 보이지 않으신가요. 경제적으로 풍요로울수록 더 문제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이 세계는 온통 이기심으로 돈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합니다. 그 어디에도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찾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다음 세대가 선하고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거룩하고 정의로우며, 평화를 사랑하는 진정으로 세계를 진보시키기를 바랍니다. (시설 아동)
- 이 말을 하였으니
오늘 본문의 또 다른 특이한 점 하나는 초점이 여인에게 맞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특별한 능력을 통해 딸을 치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말을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여인의 말에 중심을 둡니다.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딸에게서 귀신이 떠나갑니다. 5장에 예수의 옷자락에 손대어 병을 고친 여인에게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34)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아니라 오히려 그 여인의 말, 그 여인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 역시 문자와 글자를 넘어 성경의 정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엎드리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국적이 다르고 시골의 가난한 이름 없는 한 남자에게 엎드립니다. 그런데 그녀의 엎드림은 비굴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녀의 엎드림은 그 어떤 태도보다 당당합니다. 그녀의 진실함이며,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함이며, 절박함과 간절함입니다. 그녀의 기도입니다. 딸을 위한 사랑이 그 여인으로 자존심을 넘어서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병에 걸린 새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강아지입니다.’ ‘개라도 좋습니다.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개가 되겠습니다. 새끼를 위해 개가 되는 어미의 사랑이 무엇이 부끄럽겠습니까? 그저 저의 타는 마음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놀랍게도 그녀로 말미암아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더라”(30절) 귀신이 나갑니다. 여인의 온전한 변화와 성숙이 결국 딸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딸의 더러운 영은 결국 부모의 더러운 영이었던 것이 아닐까요. 지금 우리의 세계, 우리의 삶을 바라보면 이 더러운 영이 다음 세대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돈과 출세와 개인적인 성공에 사로잡혀 집착과 오만과 아집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우리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삶이 이러한데, 어찌 다음 세대가 우리의 아이들이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요. 어찌 그들이 더러운 영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출세, 성공을 위해 앞도 뒤도, 이웃도, 세상도, 도덕도 윤리도, 사랑도 정의도 내팽개치며 살아왔으니 미래의 세대에 “더러운 영”이 어찌 가득하지 않을까요.
수로보니게 여인의 온전한 성숙으로, 엎드림으로, 간청으로 귀신이 떠나갑니다. 결국, 자신의 변화(성숙)로 인해 다음 세대까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오직 그것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엎드림은 진짜인가? 우리의 기도는 진짜인가? 예수가 여인을 시험해 보았듯이, 우리도 스스로 시험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더러움’은 오직 ‘깨끗함’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삶의 가치를 따름으로만. 우리가 깨끗해짐을 통해서만.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