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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수치에서 존엄으로… (창 3 : 1 – 8, 요 8 : 2 - 11)

2025년 9월 21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yu0mWcKbYVU?si=y-UwhIUuF58djyXb

▣ 들어가는 말

- 타인은 지옥이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에서 나온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 극은 제목처럼 창문도 없고, 벽시계도 없는 밀폐된 방에서 진행됩니다.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모두 죽어서 ‘지옥’에 온 사람들입니다. 신문기자이면서 자신의 비겁함 때문에 동료를 배신한 ‘가르생’, 냉소적이고 잔인한 성격의 여성 ‘이네스’, 그리고 허영심 많고 자기 미화에 집착하는 여성 ‘에스텔’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불과 고통의 지옥이 아니라, 그저 끝없이 함께 있어야 하는 닫힌 공간에 갇히게 된 것이죠. 그 세 사람은 상대의 과거와 죄를 폭로하면서, 동시에 자신은 인정받으려 애씁니다. 가르생은 자신이 비겁하지 않았다고 인정받고 싶어 하고, 에스텔은 자신이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보이기를 원하며, 이네스는 다른 사람을 조종하고 지배하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판단의 시선 속에 가둡니다. 결국, 가르생은 절규하듯 말합니다. “지옥이란 불과 고문 기계가 아니야. 지옥은 바로… 타인이야.”

이 작품을 통해서 사르트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가장 끔찍한 고통 즉, 인간이 경험하는 지옥은 오롯이 자신으로써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규정한다는 것, 나는 내가 생각하고 바라보는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보는 나로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선은 나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고, 채집 곤충처럼 핀셋으로 나를 박제하고, 그 시선에서 영원히 도망칠 수 없게 합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유를 잃고, 끝없는 심판의 덫에 갇히게 됩니다. 타인의 시선 속에 묶여 자유를 상실한 인간의 본질적 곤경을 표현한 말이지요.

 

- 내가 벗었으므로…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발생한다. 내가 타인의 눈에 포착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된다.” 비 오는 날 길거리에서 넘어질 때, 우리는 아픔보다 부끄러움이 더 크지요. 우리는 누구나 그 경험을 압니다. 사소한 실수에도 누군가의 눈길, 타인의 시선이 느껴지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혹은 ‘주홍글씨’의 여인처럼 사회적으로 어떤 낙인이 씌워졌을 때, 아무리 억울해도 그 시선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느낍니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영성가인 시몬 베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치심은 인간을 짓누르는 가장 무거운 짐이다. 그러나 은총은 그 수치심을 참된 빛으로 전환한다.”

성경에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맙니다. 그것으로 그들은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지요. 그들은 “수치심”을 느낍니다. 인간은 왜 부끄러움을 느낄까요. 혹시 한 주 동안 부끄러움을 느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이 부끄러움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그 정체는 무엇일까요.

▣ 심리학의 관점

- 죄책감 : 수치심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수치심과 죄책감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이 두 가지를 혼동합니다. 그래서 문제를 치유하고 회복하고 성장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심리학자 헬렌 블록 루이스(Helen Block Lewis)는 자신의 저서에서 수치심(shame)과 죄책감(guilt)을 뚜렷이 구분합니다. 수치심은 자기(self)에 대한 전인적이고 포괄적인 부정적 평가입니다. “나는 잘못된 존재다” “나는 부끄러운 존재다” 즉, 나의 어떤 행동 때문이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부족하고 가치 없다고 느끼는 것이지요. 반면, 죄책감(guilt)은 내가 행한 특정한 행동에 대한 부정적 평가입니다. “내가 잘못된 행동을 했다.” 이것은 잘못된 행동만을 문제 삼기 때문에 그것을 고치거나 사과하거나 보상함으로써 해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수치심은 자아 자체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자기혐오, 우울, 대인관계 회피 등의 모습을 나타내게 되고, 심하면 존재 전체를 부정하게 됩니다. 이에 반해, 죄책감은 오히려 비교적 생산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행동을 바로잡자”라는 동기를 주고, 관계 회복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주지요.

 

-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브레네 브라운(Brené Brown)은 수치심 연구로 유명한 학자입니다. 그녀는 수치심을 “나는 잘못되었다(I am bad)”로, 죄책감을 “내가 잘못을 했다(I did something bad)”로 구분하면서, 수치심을 “사람을 침묵과 고립으로 몰아넣는 가장 파괴적인 감정”이라고 말합니다. 브라운은 수치심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취약성의 용기(Courage of Vulnerability)”와 “공감적 관계(Empathic Connection)”를 제시합니다. 수치심은 ‘드러나면 거절당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점점 더 숨어버리게 합니다. 따라서 치유하기 위해서는 숨겨진 자신을 드러낼 용기가 필요합니다. 취약성의 용기란 먼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실패와 상처,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기의 민낯을 드러냈을 때,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거절을 감수하는 용기를 가지고 진실하게 살아가기로 선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브라운은 이것을 “용기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에서 온다”라고 설명합니다. 즉, 수치심의 반대는 완벽함이 아니라 ‘취약함을 드러내는 용기’입니다.

브라운이 수치심 극복에서 두 번째로 강조하는 것은 “공감(empathy)”입니다. 수치심은 “내가 이렇게 드러나면 버려질 거야”라는 두려움 때문에 생깁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듣고, “너만 그런 게 아니야” “사실 나도 그래” “나도 그런 적 있어”라고 말해줄 때, 수치심의 힘은 약해집니다. “수치심은 공감을 만나면 더 이상 자랄 수 없다. 수치심은 어둠 속에서 힘을 얻고, 말해질 때와 누군가에게 공유될 때 빛 속에서 줄어든다.” 그녀가 제시한 해결책은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판단하지 않고 듣기’, 그저 옆에 있어 주는 ‘함께 있음’,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을 주는 ‘보편성의 경험’입니다. 즉, 수치심은 관계에서 생기지만, 동시에 관계에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 성경이 말하는 부끄러움

- 숨는 인간

창세기 3장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직후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수치심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보여줍니다. 이전에는 벌거벗음이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지만(창 2:25,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죄가 들어온 뒤에는 자신들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죠.

이 사건에서 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존재가 되려는 인간의 행동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여기서 수치심(Shame)은 죄의 결과로 나타난 존재의 드러남입니다. 죄책감이 “잘못된 행동에 대한 의식”이라면, 수치심은 “존재 자체가 드러나고 평가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리킵니다. 즉,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는 행위, 수치심은 그 끊어진 관계 안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실존적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3:8)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들이 처음 느낀 것이 “죄책감”이 아니라 “수치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존재가 드러났습니다. 숨고 싶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행동의 잘못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행동을 넘어서, “자신이 벌거벗은 존재”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잘못된 행동 때문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드러났다는 불안과 자기 부정입니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지만, 존재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수치심 속에 숨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와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지요.(창 3:9). 하나님은 죄를 드러내되, 존재 자체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복음은 수치심을 덜어내고 존재를 회복하는 소식인 것입니다.

창세기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온전하고 존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죄 이후, 인간은 자신을 더 이상 하나님의 시선(긍정과 사랑) 안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과 자기 부정 속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이때 발생하는 경험이 곧 수치심입니다. 즉, 수치심은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담은 존재가 아니다”라는 왜곡된 자기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죠.

수치심의 본질은 존재론적 불안입니다. 수치심은 존재 자체가 훼손되었다는 실존적 고통입니다. 이는 단순히 심리적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기반이 흔들리는 불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래성을 잃어버린 모든 인간은 수치심과 불안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수치심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는 인식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회복을 향한 갈망을 내포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잎으로 스스로 가리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존재의 회복은 인간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수치심은 은혜로 덮이는 것이지, 인간의 손으로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죄 없는 자

요한복음 8장에서 한 여인은 군중의 한가운데 세워지고, 모두의 시선 앞에 노출됩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군중의 시선은 정죄와 모욕의 시선입니다.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면, 그녀는 “객체화된 존재”로만 취급됩니다. 여인의 존재 전체가 부정당하고, 사회적으로 제거될 위기에 놓입니다. 깊은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낍니다.

가해자인 남자는 어딜 갔는지 알 수 없고, 피해자인 여인만 잡혀 옵니다. 여성만을 정죄하는 사실 자체가 가부장적 편견이며, 당시 사회의 구조적 폭력을 보여줍니다. 백성들이 그리도 분노했던 이유는 밤과 낮이 다른, 겉과 속이 다른 남성들의 추한 얼굴이 폭로되고 있기 때문 아니었을까요. 그 사회와 문화가 구조적으로 만들어낸 약자를 차별하고 억압하고 숨김으로써 사회 구조적인 추악한 민낯이 드러나는 게 두려워 더 지독하게 그 여인을 죄인으로 몰아간 것 아닐까요. 그 여인의 존재가 마치 자신들의 허위와 거짓을 들춰내는 것 같을 테니 얼마나 밉고 싫을까요.

1991년 8월 14일, 당시 67세였던 김학순(金學順, 1924~1997) 할머니는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라고 공개 증언합니다. 그전까지 피해자들은 사회적 낙인과 수치심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의 용기 있는 발언으로 다른 피해자들도 연이어 자신들의 경험을 밝히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을 넘어 국제사회에 이 문제가 알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1992년부터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세계 최장 기록으로 남아 있는 수요시위가 열리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 1993년 일본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의 소위 ‘고노 담화’을 발표하는 데에 이르게 하지요.

예수는 여인에게 말합니다. “너를 고발하고 정죄하는 자들이 어디 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0-11). 여기서 예수의 시선은 군중의 시선과 다릅니다. 판단하고 정죄하며 차별하는 시선이 아닙니다. 용납하고 받아들이며 함께하는 시선을 보여줍니다. 객체화가 아니라, 존엄을 회복시키는 언어입니다.

예수는 행위와 존재를 구분합니다. 동시에 군중의 위선을 폭로합니다. 돌을 들고 정죄하려던 자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며, 사회적 오만과 편견을 드러냅니다. 이 사건은 부끄러움의 주체가 전도되는 순간입니다. 사회는 여인을 부끄러움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예수는 정죄하는 사회 자체가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것을 밝히신 거죠.

고 김복동 할머니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더럽혀진 여자 같아서, 내가 더 수치스러워서, 말하지 못했어.” 그러나 이 부끄러움은 마땅히 피해자의 몫이 아니라, 가해자의 몫입니다. 이 아픔과 치욕을 외면한, 제대로 기억해 주지 않은, 그들을 감싸안지 못한 우리 사회의 부끄러움입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말합니다.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 이 사실을 밝히는 것은 내 부끄러움이 아니라, 일본의 부끄러움이다.”

음행한 여인은 분명 자신의 행위(간음)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을 그렇게까지 몰고 간 그 사회 공동체, 그 여인의 고통과 아픔은 보려 하지 않으며 정죄하기에 여념 없는 종교인들… 누구의 부끄러움인가요.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라는 행동에 관한 죄책감의 자각은 있어야 하지만, “부끄러운 존재다”라는 존재의 부정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 나가는 말

- 수치심의 정체

아담과 하와를 통해 우리는 수치심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벌거벗음은 본래 인간 존재의 솔직함과 투명성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신을 더 이상 관련 없는 존재로 여기게 될 때, 관계를 끊을 때, 벗은 몸은 더 이상 순수함이 아니라 존재론적 불안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멀어진 존재임을 자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가리고 감추고 숨으려 합니다. 성경에서의 수치심은 자기 존재가 더 이상 온전하지 않다는 깨달음입니다. 말하자면, 수치심은 존엄의 상실, 존재론적 불안인 것입니다.

수치심은 단순히 사회적·문화적 규범에서 비롯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 인간 존재의 파괴, 존엄의 상실을 경험하는 실존적 고통입니다. 이 순간 타인은 지옥이 됩니다. 타인뿐 아니라 세계와 삶이 지옥이지요.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은 움츠러들고 스스로 숨기려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라고 부르십니다. 수치심의 정체가 하나님 앞에서의 상실된 존재 인식이라면, 그 치유는 하나님께서 다시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은혜 속에서 가능합니다.

 

- 부끄러움

이 세계의 시선, 군중의 시선은 여인을 죄의 상징으로 만들었지만, 예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서 존엄을 봅니다. 수치심을 존엄으로 바꾸는 눈길, 그것이 그리스도의 시선입니다. 여전히 수치심 속에 신음하는 이들이 있고, 여전히 존엄의 회복이 필요한 현실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사 54:4) 우리의 부족한 모습에도 우리의 가장 고귀한 모습을 보시는 그분의 시선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동시에 부끄러움은, 인간이 여전히 양심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시인 기형도의 말처럼, “부끄러움은 인간이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할 마지막 얼굴이다.” 부끄러움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게 하고,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지 않게 하며, 타자의 고통 앞에 멈추게 하는 인간다움의 징표가 됩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복음은 분명합니다. 타인의 시선은 수치심을 낳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숨게 만들고, 간음한 여인처럼 정죄당하게 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처럼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은 존엄을 세웁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신 하나님, 간음한 여인에게 “정죄하지 않는다” 말씀하신 예수님, 오늘 우리에게도 “너는 존엄한 하나님의 형상”이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분명합니다. 피해자들에게 수치심을 덧씌우는 사회적 시선을 거부하고, 존엄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시선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할이고, 복음의 사명입니다.

 

주님,

우리의 수치심을 은혜로 덮으시고,

우리의 잘못을 용서로 씻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무너진 이들에게 존엄을 회복시켜 주소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으시고, 그들의 삶을 빛으로 세워 주소서.

우리로 하여금 정죄의 눈길이 아니라, 은혜의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게 하소서.

주님, 우리의 수치심을 존엄으로 바꾸시는 은혜를 믿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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