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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딤후 2:20-26

불교의 승려들 중에서 수행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여름철과 겨울철에 각각 하안거와 동안거에
들어갑니다. 이번 여름의 하안거가 지난주간부터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세 달간 바깥출입을 하
지 않고 열 시간, 또는 열 다섯 시간씩 명상 수련을 통해서 현재보다 훨씬 깊은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
가려고 합니다. 목사들이 매일 새벽기도회를 드린다거나, 또는 기도원에 들어가서 집중적으로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명상하는 것도 일종의 자기 수행입니다. 중세기의 수도원 제도는 이런 수행의 극치를 보
여줍니다. 예컨대 갈멜 수녀원에 한번 들어간 사람은 부모가 죽는 일 이외에는 아예 밖으로 나오지 못
합니다. 그만큼 치열하게 수행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이런 특별한 형식
의 수행 과정이 경우에 따라서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특히 그런 종
교 전문가들이 아니라 일반 신자들의 경우에는 일상의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은 곧
우리의 일상 자체가 바로 수행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굳이 하안거에 들어갈 필요도 없이, 기도원에
들어갈 필요 없이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일상의 삶이 수행의 과정으
로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삶과 수행의 일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
다. 대개의 경우에 일상은 우리의 내면적 세계를 정화하고 끌어올리기보다는 혼란하게 하고 끌어내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런 일상과 결별한 다음에 수행의 단계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일상의 삶이 바로 수행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바울은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쓸모 있는 그릇
20,21절에서 바울은 그릇을 비유로 해서 기독교인의 이런 수행의 삶을 설명합니다. 큰집에는 여러
종류의 그릇이 있습니다. 그릇의 생김새, 쓰임새에 따라서 다르게 사용되듯이 우리는 주인이 귀하게 쓰
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바울은 충고합니다. 특히 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을 버리
고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깨끗
하게 한다는 것은 곧 수행을 의미합니다. 밥그릇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자기가 노력한다고 해서 갑자기
술잔이 된다거나 약사발이 될 수는 없겠지만 "깨끗하게" 준비가 되어 있기만 하면 귀하게 쓰입니다. 우
리가 이렇게 태어난 것 자체는 물릴 수 없습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 그것 자체를 없는 것으로
만들 수는 없고, 약간 못생긴 사람이 갑자기 아름다워질 수도 없습니다. 없는 지능을 좋게 할 수도 없
고 예술적 감각을 만들어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수행에 의해서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선천적인 것은 바꾸지 못해도 후천적인 요소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 변화를 목표로 하는 교육은 인간 삶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교육을 통해서
사람을 궁극적으로 깨끗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합니다만 교육이 모든 인간의
잠재력을 개발시키고, 쓸모 있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은 옳습니다. 참된 교육이 이루어지려면 교육받으려
는 학생의 마음가짐이 일단 중요하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선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평범한 사람
이었지만 좋은 선생을 만나서 그 능력이 한껏 고양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사실은 이런 교육학적인 관점에서도 우리에게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
가 영적인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교육을 이끌어가고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합니다.
기독교적인 교육을 시킨다는 것이 오히려 인간성 말살의 길은 아닌지 말입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 당
시에 그런 종교 교육의 전문가들이었던 바리새인들에게서 그런 오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뒤
를 그대로 밟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대목에서 특별히 선천적인 요소보다는 후천적인 요소가 인간의 삶에서 더 중요하다는 점을 우리
가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지능이 얼마냐, 어떤 재능을 갖고 태어났느냐 하는 것에 모
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따뜻한 마음, 정직, 관용, 연민 같은 것들입
니다. 이런 요소들은 어떤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후천적 요소입니다. 종교의 차원에
서는 거의 결정적으로 이런 요소들을 교육의 본질로 삼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은 신앙의 아들
디모데에게 기독교적인 수행으로서 이런 요소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힘써 구할 것들
22절 말씀에서 바울은 이렇게 충고합니다. "그대는 청춘의 욕정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정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힘써 구하시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일종의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여러 차원에서 자기
를 성취하려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홍수에 휩쓸리듯이 빠져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청
춘의 욕망은 젊은이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그 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
납니다. 어쩌면 노욕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이가 들수록 이런 욕망은 젊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하게 작
용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디모데에게 그런 청춘의 욕정을 피하고 대신 추구해야 할 네 가지 덕목을 제시하고 있
습니다. 정의, 믿음, 사랑, 평화입니다. 이것 이외에도 인내, 관용, 기쁨 등, 여러 덕목이 제시될 수
있었겠지만 바울은 네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여기서 네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만 이룰 수 있다고 하더
라도 대단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람이 한편으로는 '정의'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늘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리고 옳은 편에 속하는 게 좋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게 자신의 이해
타산과 부합하지 않을 때 우리는 쉽게 포기합니다.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뭐!" 대충 이런 방식으로 자
신의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합리화합니다. 누구나 간단하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수행하듯이 이 정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말은 특히 교회 안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지만 그
것의 실제적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자기 삶에서 구현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에게 이익이 될 때만, 그런 대상으로서만 믿을 뿐입
니다. 자기에게 불이익이 발생해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더구나 우리는 사람
들을 믿지 못하고 삽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모든 이웃과의 관계에도 적
용되어야 할 우리의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나요? 아니면 의심하면서 사나요? 바울은 세
번째로 '사랑'을 구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약간 어렵습니다. 사랑은 함께 열거된 정
의, 믿음, 평화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
서 13장에서 사랑은 믿음 같은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루는 대상이 아니라고
진술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사랑을  믿
음, 정의와 같은 차원에서 진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 여기서 표현된 사랑은 하나님이라기보
다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활동하시는 한 방식으로서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우리는 사랑 앞에서도 별로 정직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대가가 주어질 때만 사랑 운운합니다. 야만적
인 폭력이 일상화한 오늘의 이 세상 속에서 바울이 말하는 '평화'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한편으로는 평화 지향적인 것 같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는 오히려 폭력적입니다. 평화라는
것도 결국 자신들과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진 사람들과의 사이에서나 약간 유지될 뿐이지 생각이 다른 사
람들과의 사이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정의, 믿음, 사랑, 평화는 우리에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요소가 절대 아닙니다. 이런 요소는 흡사 수도자들이 수행하듯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심화해나가야 할 우리의 삶의 본질입니다. 기독교의 신앙도 역시 이런 요소들을 강화하는 쪽으로 진행
되어야 합니다. 만약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삶에서 정의가 깊어지는 일에 관심이 없다
면 참으로 무책임한 일입니다. 간혹 보수적인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인들을 시청 앞에 모아놓고 '반공'
대회 비슷한 것을 열기도 합니다. 어떻게 교회의 이름으로 그런 적개심을 조장할 수 있는지 나는 도저
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교육도 역시 정의와 믿음 같은 가치를 근본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학교 교육이나 교회 교육도 이런 가치들을 폐기처분하고, 또는 단조롭게만 해석하고 대신 자본주
의적 물신주의에 물들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곳곳에서 아주 소수이지만 맑은 샘처럼 이런 가치
를 가꾸는 분들이 있기는 합니다.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유치한 논쟁
바울은 정의, 믿음, 사랑, 평화를 구하라고 말한 후에 이어서 "어리석고 유치한 논쟁을 피하시
오"(23절)라고 말합니다. 이 두 구절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연결된 것입니다. 정의, 믿음, 사랑, 평화
같은 고귀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유치한 논쟁'을 벌이지 않습니다. 거꾸로 어리석고
유치한 논쟁을 일삼는 사람들은 결코 정의, 믿음, 사랑, 평화를 구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논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론적인 논쟁은 우리의 생각과 삶을 창조적으로 이
끌어갑니다. 사실 초기 기독교와 교부시대의 기독교는 주변의 다른 사상들과 이런 논쟁을 가열차게 전
개했습니다. 헬라철학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신학 논쟁을 피하지 않았습
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의 교리가 완성되었으며, 또한 교회는 오늘도 그런 과정에 들어가 있
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이런 논쟁 자체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교회 안에서 질
문이 봉쇄되었다는 뜻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질문하거나 다른 생각을 개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질문을 했다가는 "믿음이 없군!" 하고 한 마디로 면박 당하기 쉽습니다. 또한 오늘의 교회는 교회 밖의
세계와 당당하게 논쟁하지 못합니다. 오늘의 인문학과 진리 논쟁을 펼칠만한 준비가 전혀 없습니다. 그
래서 "이성을 의지 말라"고 엉뚱하게 강조합니다.
바울은 결코 이런 논쟁을 피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어리석고 유치한 논쟁'을 피하
라는 것입니다. 말꼬리 잡는 식으로 아무 쓸모도 없는 논쟁을 말입니다. 바울은 그런 논쟁이 싸움을 일
으킬 뿐이라고 합니다. 옳습니다. 이런 논쟁은 참된 것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상대방을 누르고 자기를
내세우려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에 그 결과는 싸움입니다. 어떤 것이 옳은가, 또는 서로 논쟁을 통해서
옳은 것을 찾겠다는 게 아니라 무조건 상대방을 무너뜨리려는 자세이기 때문에 그 결과는 아무 것도 없
고 단지 나쁜 감정만 쓰레기더미처럼 쌓일 뿐입니다. 시사 토론에 나오는 패널들은 대개 각 정당을 대
표하는 분들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말 유치한 논쟁을 일삼는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식의 토론
에서는 상대방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도 거의 일어
나지 않습니다. 자기의 입장이 불리해지면 이제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되고 말싸움의 후유증만 남게 됩
니다.
저는 현대인의 삶이 거의 이런 식으로 굴러가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서로 친한 사람들끼리
만나도 역시 '어리석고 유치한 논쟁'만 나누다가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과 친척이 만나도
그렇고, 직장 동료들의 관계도 역시 그렇습니다. 조금 더 고상하다고 인정받는 대학교는 어떻습니까?
거기에는 '어리석고 유치한 논쟁'이 없을까요? 국회 안에서 유익하고 가치 있는 논쟁이 얼마나 벌어질
까요? 대학, 국회, 법원 안에서 어리석고 유치한 논쟁이 없어지려면 그런 일에 관계된 사람들이 바울의
가르침대로 정의, 믿음, 사랑, 평화를 진정으로 추구해야만 합니다. 그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함께 가는 길
바울은 정의, 믿음의 길을 혼자 가는 게 아니라 더불어서 간다고 말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입
니다. 22b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이런 것들을 추구하라
고 말입니다. 사람은 혼자서도 꿋꿋하게 바른 길을 갈 수 있긴 하지만 그게 쉽지 않습니다. 반면에 함
께 가는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서로 용기가 되기도 하고 함께 추구하는 일들이 상승 작용을 일으킵니
다. 흡사 숯불을 서로 합해 놓아야만 화력이 강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그렇게 같이 길을 가
는 사람을 가리켜서 도반(道伴)이라고 하고, 세속 사회에서는 동지라고도 부릅니다. 주님을 찾는 사람
들과 함께 하라는 바울의 충고는 옳습니다.
오늘은 우리 샘터교회 창립 1주년 되는 주일입니다. 일년 전 4명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지만 오늘
은 두 배로 늘었습니다. 비약적인(?) 발전이네요. 우리 교회는 일반 교회와 약간 다른 점들이 있습니
다. 일단 어느 교파에도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여기서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가장
직접적으로 한 가지 이유만 든다면 교단의 굴레를 받아들일 정도로 저의 자유를 유보할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교회는 한편으로 자유스럽지만 자칫 이 자유가 방종으로 흐를 가능성도 없
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끊임없이 성찰해야합니다. 아무런 제약도 없이 하나님의 영이 자유롭게 활
동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을 뿐만 아니라 건강한 형태를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앞으로 어떤 형태의 교회로 자리가 잡혀갈는지 지금으로서는 말씀드릴 게 별로 없습니다. 하나
의 기준을 제시한다면 '신앙과 지성이 겸비된 영성'을 추구하는 교회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런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하는 것은 앞으로 시나브로 정리되겠지요. 어쨌든지 우리는 이런 길에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와 함께 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만, 지금 우리의 작은
공동체만으로도 우리는 함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오늘 설교를 정리하겠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충고하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어리석고 유치한 논쟁을 피하고 삽시다. 무조건 세상과 담을 쌓으라거나 논쟁 자체를 피하
라는 게 아니라 결국 감정만 상하게 하고 싸움만 일으키는 논쟁을 피하자는 것입니다. 철이 들어야 어
린아이의 일을 버릴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정의, 믿음, 사랑, 평화를 추구하는 삶으로 들어서야만 그
런 소모적인 논쟁을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길은 곧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수행입니다. 일상에서 예
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런 신앙의 내용이 깊어지는 수행의 길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길을 함께 가기
위해 작은 공동체인 샘터교회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2004. 6.6.                  
  
디모데후서 2: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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