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과 영원한 구원
히 5:5-10, 사순절 다섯째 주일, 2021년 3월21일
생명 충만한 인생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재미있으며 의미 있게 인생을 살고 싶어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담임 목사로서 저는 여러분이 가능한 한 행복하고 재미있으며 의미 있게 살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삶인지를 우리가 아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여전히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한 삶의 기준은 압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 일부 젊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마흔 살 되기 전에 평생 먹고살 돈을 마련한 다음, 일찍 은퇴하여 여행이나 취미생활을 하면서 지내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으로 행복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반복해서 여행지를 찾고, 쇼핑하고 맛집을 찾아다니다가 삶 자체가 권태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일반적인 행복한 기준과는 달리 가정을 꾸리지도 않고 쪽방촌 사람들이나 장애인들을 돌보면서 삽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불행한 삶일지 모르나 영혼의 차원에서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생명 충만감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제가 너무 극단적인 예를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어떤 방식의 삶이 가장 행복하고 재미있고 의미 있냐, 하는 질문에 정답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하면 삶을 존재의 차원에서 접근해야만 행복한 인생을 꾸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삶의 방식에 대한 세상의 기준에만 예민하게 반응하다가 삶 자체가 훼손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겠지요.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이라는 주제는 요즘만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중요했습니다. 오해도 많았습니다. 이에 관해서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완전히 파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문제를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입니다. 옳든 그르든 둘째 치고 인생 전체가 일상에 대한 염려와 욕망으로 이어지는 현실에서 너무 동떨어진 말씀으로 들립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도 예수님의 저 말씀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합니다. 귀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종교적인 훈계로 넘겨버립니다. 저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다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런 삶의 방향만은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비유적으로, 소리에서 명창이 될 실력이 없는 사람은 귀명창이라도 되는 게 좋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말하는 경지의 삶을 우리가 직접 살아낼 실력은 없으나 그 경지가 무엇인지는 일단 분별해낼 수 있는 영적인 귀명창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만 우리도 언젠가 기회가 오면 명창이 될 수 있거나, 아니면 그 명창이 들어간 소리의 세계를 간접으로라도 느낄 수 있습니다.
영원한 구원의 근원
히브리서 기자는 이 문제를 오늘 설교 본문인 히 5:5~10절에서 고유한 시각으로 풀어냈습니다.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영원한 구원을 일상적인 말로 바꾸면 행복한 인생, 재미있는 인생, 의미 있는 인생, 생명 충만한 인생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영원한 구원의 근거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복한 삶의 새로운 차원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조금이 아니라 완전히 달라진 차원입니다. 먼저 히 5:9~10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일종의 히브리서의 기독론이라 할 수 있는 이 대목에서 ‘온전하다’라는 단어를 영어 성경은 perfect라고 번역했고, 루터 성경은 vollendet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자, 즉 자기 인생을 완성한 자가 되었다는 말은 당연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인생 성공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완전한 인생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성공한 인생도 없습니다. 가능하면 다른 이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면 좋겠으나 사람들의 존경도 그 사람의 인생을 완전하게 보장하지 않습니다. 존경을 받거나 인기를 얻으려는 사람은 오히려 거기에 노예가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언론이 클릭 수에 매달려서 여론을 왜곡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외모 지상주의가 그 사람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우리는 다 압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사니까 자신도 휩쓸려서 살 뿐입니다.
완전한 자가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완전한 삶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다는 말은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비유적으로 소리꾼인 명창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명창의 반열에 오른 사람은 소리의 세계에 받아들여진 사람입니다. 소리의 세계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합니다. 소리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내기 때문입니다. 음을 단조롭게 듣는 일반 사람과 달리 명창은 계명으로 ‘미’와 ‘솔’ 사이에서 거의 무한에 가까운 소리를 느끼면서 노래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이 그렇게 신비롭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밖에서 겉도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와 ‘솔’ 사이에 있는 소리의 존재론적 깊이에 들어가서 황홀한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을 이상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가 소리의 세계에서 소외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인식하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 차원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분이었습니다. 단순히 경험한 게 아니라 그 차원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가리켜서 본문은 예수님이 완전하게 되셨다고 말한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어서 말하기를, 완전하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존재는 하나님 외에 없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라는 말은 그가 하나님에게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은 모두 잠정적이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인생 목표를 다 성취해도 영혼의 만족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구에서 살아가는 한 이런 잠정적인 실존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가능하면 이런 실존에서라도 즐겁게 살고, 이웃들과 좋은 일에 연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분들은 세상의 정의를 위해서 삽니다. 적폐를 청산하자고 말합니다. 역사가 진보하려면 이런 일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가 원하는 만큼 다 이뤄졌다고 합시다.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까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완전히 새로워지리라 생각했던 세상이 왜 이따위냐 하고 호소하는 분들을 제가 한편으로 이해는 하지만 그 주장에 동의하지는 못합니다. 누가 권력을 잡아도 완전한 세상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사람들 자신들이 부패할 수도 있고, 그 반대 세력의 저항으로 역사가 퇴행할 수도 있고, 우리가 다 계산해낼 수 없는 요인들이, 이를 우리 기독교에서는 죄라고 말하는데, 개인의 삶과 사회를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민주적이고 합리적이며 개혁적인 교회를 세워가려고 노력해도 그 안에는 여전히 죄가 작동합니다.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모여도 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생명의 근원을, 종말에 완성될 미래의 생명을 경험할 수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과연 옳은 말일까요?
순종하는 자
본문은 이 대목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합니다. “순종하는 모든 자”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에게나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게 아니라 그에게 순종하는 특별한 사람에게 구원의 근거가 됩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주지 못하는 생명 충만이, 삶의 생동성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순종은 토를 달지 않고 무조건 따르는 것입니다. 제가 일단 생각해보고 옳다고 생각되면 따르는 게 아니라 일단 따르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독단적이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자기가 주체적으로 삶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건 필요합니다. 무엇이 진리인지도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진리를 마주한 사람은 먼저 순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나를 따르라.”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부모를 장사하고 따르겠다는 자에게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나를 따르라.”(마 8: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이비 교주들도 이와 비슷하게 말합니다. 추종자들은 교주의 행동과 발언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무조건 따릅니다. 그들의 행태가 건강하지 못한 건 분명하지만 그들이 거기서 어떤 절대적인 세계를 경험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악도 절대적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한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어쨌든지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모험입니다. 모험이 아니면 궁극적인 진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순종이라는 영성의 깊이로 들어가야만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구원의 근원에 접속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머니 품 안의 아이가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듯이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순종이라는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합니까? 버릴 것을 버리는 데서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가족과 재물과 직업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눅 14:26) 예수님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극단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핑계로 부모와의 관계를 소홀하게 여기거나 형제 및 친구와의 관계에 무심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가족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서 출가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그런 가족관계마저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자신이 순종해야 할 대상을 만난 것입니다. 그 대상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버릴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해내는 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모두가 세속적인 일상을 포기하는 출가 수도자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자발적인 가난을 택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도 없습니다. 각자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늙어서 죽기 전에 수십억 원이나 수백억 원에 이르는 자기 재산을 공익단체에 기부하기도 하더군요. 미국에는 이런 억만장자 기부자 모임이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이런 전통은 좋아 보입니다. 우리나라도 유산 처리 문제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자식에게 유산을 증여하고 싶은 마음이야 인지상정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 해야겠지요. 어떤 이들은 편법을 써서 증여세를 회피합니다. 예수님에게 순종하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예수의 순종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우리보다 먼저 순종하셨다는 사실을 거론합니다. 그가 온전하게 되신 근거도 그의 순종입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그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
8절은 예수님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진술입니다. 그 본질에서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다른 하나는 고난 겪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고난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같은 능력이 있는 자이기에 영광을 받아야지 고난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은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에 관해서 기록할 때 다른 대목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예수님이 체포당해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대목에서는 일치합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악을 제압하고 승리자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무너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에게 순종한 사건이었다고 말입니다. 고난은 메시아로서의 실패가 아니라 메시아를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8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고난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순종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특권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런 설명이 교리적으로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 무엇인지를 7절이 아주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그가 육체로 살아계실 때 하나님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습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외로웠습니다. 공중의 새는 깃들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으나 당신은 머리 둘만 한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에게 전혀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이 가까운 시점에도 누가 더 크냐 하는 문제로 제자들이 다투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막 15:34)라는 외침이 살아생전 예수님의 마지막 발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나님 나라와 일치해서 살았던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저주받은 자로 죽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운명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이 이런 운명에 떨어진다면 우리는 치를 떨 겁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를 비롯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비참한 운명에 떨어졌던 예수님을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고 믿었습니다. 옳은가요? 헛소리인가? 속임수인가요?
저는 여러분이 세상에서 불행하게, 또는 불편하게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들도 부자는 아니더라도 가난에 쪼들리지 않는 인생을 살았으면 합니다. 일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이 무조건 행복한 게 아니라는 사실만은,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런 인생 조건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는 게 아니라는 사실만은 명백하다는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관건은 절대 생명인 하나님 앞에서의 순종입니다. 순종은 각자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순종했습니다. 그의 순종은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제자로서의 순종이 있습니다. 지극히 힘든 인생살이에서도 우리는 순종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상대적으로 행복하게 보이는 인생에서도 불순종할 수 있습니다.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이 주어진다는 말씀을 믿으십시오. 구체적으로 어떻게 주어지냐고요?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의 죽음까지 순종하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렸듯이 각자 자신의 처지에서 순종하는 우리를 하나님이 특별한 능력과 특별한 방식으로 영원한 생명 안으로 구원하실 겁니다. 저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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