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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미래를 기다림

      

숨겨진 미래를 기다림

눅2:25-35



예수님의 부모들은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서 예수의 정결의식을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갔습니다. 이미 호적 신고를 위해서 (베들레헴까지) 한번 다녀왔던 길이긴 하지만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상당히 긴 여정입니다. 이 여행이 단지 정결의식으로 끝나고 만 것이었다면 누가는 이렇게 글로 남겨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우연한 만남이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과 예수의 본질을 명확하게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전승에 소중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시므온입니다. 성서 본문은 이 시므온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유대인 치고 선민의식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자기 나라를 구원할 메시야가 오시리라고 기대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들은 대개가 다윗 왕국의 재건을 꿈꾸었습니다. 언젠가는 다윗 혈통의 왕이 태어나서 뛰어난 전술과 전략으로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해서 이스라엘이 세계의 으뜸 국가가 되게 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땅의 침묵자"라고 일컬어지는 소수의 사람들은 폭력과 권세와 군대 같은 무력에는 아무런 기대도 갖지 않고 단지 하나님이 오실 때까지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분의 위로와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라고 표현된 시므온이 바로 이런 인물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정치 일정에 따라서, 경제 일정에 따라서, 아니면 가족과 연관된 대소사에 따라서, 그것을 기다림의 목표로 살아갔지만 시므온은 그것과는 다른 것을 기다렸습니다. 성서는 늘 이것을 말합니다. 오직 이것만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역시 이런 의미입니다. 교회를 종말론적인 공동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전적으로 이루어지는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오직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제일세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생전에 예수님이 재림할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재림신앙은 니체가 기독교를 비판하듯이 기독교 신앙의 타계적 성격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 어떤 이념보다 훨씬 강력한 변혁과 혁명의 소질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을 기다리는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해방받고 자유롭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린다는 말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만들어가는 것을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런 방식의 삶에 만족한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릴 수 없으며,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일종의 지상천국을 꿈꾸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세계는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이 세상을 절대화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자연과학을 보십시오. 생명의 비밀에 상당히 접근해 있는 생명공학은 자신들의 기술이 인간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아마 세월이 흐르면 인간의 수명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120년까지는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과학이 더 발달하면 969년을 살았던 무두셀라처럼 천살 가까이 살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죠. 좀더 극단적으로 상상해보면 우리의 장기를 계속 갈아치우는 방식으로 인간이 죽지 않는 날이 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생명공학에 투자를 많이 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게 인간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치행위를 통해서 인간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허풍을 부립니다. 생산성도 높이고 빈부의 격차도 줄이고 지역감정도 없애고 남북문제도 해결하고, 노인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정치의 절대화는 히틀러의 제삼제국 이데올로기처럼 결국은 인간 삶을 왜곡시킵니다. 요즘 근본주의적 "에콜로지스트"들의 꿈도 이와 비슷합니다. 오늘의 생산과 소비 중심의 정치, 경제를 생태 중심으로 바꾸어 지구를 지속가능한 환경이 되게 해야한다는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 근본적으로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태운동이 또 하나의 절대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림으로써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개입될 여지를 말살시킬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난 한 학기 동안 영남신학대학교 사회복지학과 학생들에게 "신학개론"을 가르치면서 잠시 복지 지상주의의 문제점을 제기했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완전 복지가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태(지상낙원)가 상대적으로 행복한 삶을 보장할지는 몰라도 절대적인 삶을 제공하지는 못한다고 말입니다. 지금 스웨덴, 노르웨이 같이 우리에 비해서 월등하게 높은 수준의 복지제도 가운데서 인생을 즐기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기쁨과 자유가 보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더욱이 그들이 볼 때 가난한 파키스탄이나 인도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불행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선진국의 미래가 제삼세계의 미래보다 훨씬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렇게 자기가 만들어가는 과학,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으로 절대적인 세계에 들어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문화활동이 헛수고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늘 상대적인 가치만 갖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궁극적인 생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이 풍요로워지는 길도 명확하게 알고 있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자기의 그런 노력을 절대화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만 우리의 노력은 우리가 이 땅에 살동안 편리하게, 약간 재미있게 살아가는 방편일 뿐입니다. 이런 것들은 이런 한도 안에서 생각해야만 합니다. 반면에 궁극적인 것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기때문에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증언합니다.

이런 신앙에 근거해서 오늘의 우리도 부활의 예수가 다시 재림할 때를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인간이 세워가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가다립니다. 인간이 만든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아마 어떤 분은 "당신 말은 너무 추상적이다. 좀더 구체적인 것을 말해야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좀더 생각해보십시오. 확실한 것은 늘 손에 잡혀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미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은, 즉 우리의 경험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허무한 것들을 손 안에 들고 이것만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참된 것은 아직 여기에 없습니다. 그것은 종말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은폐"의 방식으로 오늘 우리에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므온을 보십시오. 그는 영에 이끌리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정결의식을 치루고 있는 아기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29-32, 공동번역). 어떤 젊은 부부의 품에 안겨 있는 젖먹이 남자 아이를 보고 구원을 보았다는 노래가 도대체 말이 되나요? 아직 이 아이는 십자가를 지지도 않았고, 더구나 부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시므온은 이 아이에게서 만민에게 임하는 구원을 볼 수 있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젖먹이 예수에게 은폐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가리키는 미래가 이미 은폐의 방식으로 젖먹이의 현재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시므온은 보았습니다. 중세기 때의 서양 그림에는 이런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를 그리면서 이미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이 겹쳐서 나타납니다.  

이것을 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일상적인 것에만 치우쳐서 그것의 내면을 관통하고 있는 절대적인 힘을 놓쳐버리면 안 됩니다. 예컨대 모든 물질의 기초로 간주되는 원자가 빈 공간이라는 사실은 전자 현미경을 통해서만 확인되듯이 우리에게 영적인 전자 현미경이 필요합니다. 그런 차원은 우리에게 너무 어려우니까 나는 그냥 쉽게 생각하고 살련다, 하는 사람들을 제가 억지로 뜯어말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참된 생명의 세계인 부활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이런 형식의 삶이 아닙니다. 아직 우리에게 은폐되어 있지만 하나님이 준비한 참된 생명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가 우리에게 오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것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 곧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역시 신앙은 신비입니다. 지금 손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미래의 생명을 기다리고 희망한다는 한다는 점에서 신비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시므온에게 성령이 함께 했다고 설명합니다. 그가 성령의 지시를 받는다는 말은 일상적인 것을 뛰어넘는 힘에 의존해서 살았다는 뜻입니다.

다음 주일부터 우리 기독교에서는 대강절 절기가 시작됩니다. 대강절은 교회력으로 한 해의 시작입니다. 이 말은 곧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설명해주는 대목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믿고 그가 온전히 통치할 시간을 기다립니다. 이 세상의 재미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은 예수의 재림에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삶의 현실을 정직하게 들여야보면 그런 재미라는 것이 너무 하찮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재미는 그저 재미일 뿐이지 궁극적인 의미를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긴장하지 않고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삽니다. 잊지 마십시오. 궁극적인 생명과 즐거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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