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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숨어있는 평화의 왕

http://wms.kehc.org/d/dabia/06.04.09.MP32006. 4.9.        
숨어 있는 평화의 왕 (막 11:1-11)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오늘 본문은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단락은(1-7)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 입성용 나귀를 끌고 온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두 명의 제자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맞은 편 마을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어있으니까 그걸 풀어서 끌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주인이 나타나면 “주님이 쓰신다.” 하고 “곧 돌려보내실 것이오.” 하고 말하면 된다고 일렀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잠시 사용하겠다는 허락을 나귀 주인에게 이미 받아놓은 상태였을 겁니다. 이 주인이 친구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는 또 다른 제자일 수도 있겠지요. 성서에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의 일에 도움을 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을에 들어가 보니 어린 나귀가 매어 있었고, 주인과의 문제도 그대로 해결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새끼 나귀 등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놓았고, 예수님은 그 나귀를 타셨습니다.
둘째 단락은(8-1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 관한 묘사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길에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 깔아놓고, 환성을 질렀습니다. 마가는 그 환호성을 시편 118:25,26절을 인용해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흡사 과열된 대통령 선거 유세와 같은 장면입니다.
셋째 단락은(11) 예루살렘에 들어간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구경하러 오신 게 아닙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성전을 둘러보시는 중에 이미 날이 저물었습니다. 아마 시간이 넉넉했다면 성전 정화를 그날 하셨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숙소가 베다니에 있었겠지요.
우리가 위에서 살려본 세 장면은 여러 가지 색조가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첫 단락은 나귀를 구하는 장면이 조금 신비적으로 그려집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느낌을 줍니다. 둘째 단락은 매우 열광적인 느낌을 줍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승리자의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셋째 단락에서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갑자기 일상적인 것으로 바뀝니다. 앞 단락만 본다면 이제 예루살렘에서 무언가 화끈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이런 예상과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문장도 단순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셨고, 둘러보셨고, 날이 저물었고, 베다니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런 묘사로만 본다면 그 날은 평범한 어떤 사람의 평범한 하루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신비와 열정과 일상의 색깔로 채색된 한편의 삽화 같은 이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갔다는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마가의 마음은 무엇에 사로잡혀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마음에 새기면서, 이제 종려주일을 맞은 우리는 본문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예수님과 새끼 나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나귀를 탔다는 이야기는 네 복음서가 똑같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보기에 따라서 이런 장면은 그렇게 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 나귀는 보통 짐을 나르지, 사람을 태우는 동물이 아닙니다. 특히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탔다고 합니다. 아이도 아니고 서른 살 난 남자가 어린 나귀를 타고 길을 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나귀 이야기는 철저하게 구약성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스가랴 9:9절과 연결됩니다.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나귀를 타고 오시어.” 여기서 임금은 곧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마가복음은 이 스가랴의 예언을 간접적으로 인용한 반면에 마태복음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인용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또 하나의 다른 구약성서는 창세기입니다. 이집트에 정착하게 된 야곱이 죽을 때 열 두 아들에게 유언했습니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게 준 축복이기도 합니다. 야곱은 유다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나오리라고 축복합니다. 이 통치자도 역시 메시아에 가리키는데, 그 축복의 내용 중에서 예수님의 나귀 사건과 연결된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포도나무에 나귀를 예사로 매어놓고 고급 포도나무에 새끼 나귀를 예사로 매어 두리라.”(창 49:11).
오늘 사건과 연결된 두 군데의 구약성서를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메시아가 어린 새끼나귀를 타고 온다는 스가랴의 예언이며, 다른 하나는 유다지파 중에서 왕의 홀을 쥔 통치자가 나올 때 포도나무에 나귀를 매어 놓는다는 창세기 말씀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이 사건에서 구약성서를 인용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구약의 성취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즉흥적으로 나귀를 탄 것이 아니라 구약성서의 예언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습니다.  

왕으로서의 예수
스가랴와 창세기가 예언하고 있는 것, 즉 복음서 기자들이 주시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구약성서가 예언하고 있는 참된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창세기도 역시 유대지파를 통해서 오게 될 왕을 말하고, 스가랴도 역시 나귀를 탄 왕을 말합니다. 복음서 기자들에게 예수야말로 온 세상을 다스릴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흡사 왕을 맞이하는 듯한 환호를 보냈습니다.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펴 놓았고, 나뭇가지도 역시 길에 깔았습니다. 겉옷을 길에 펴 놓는 행위는 제왕의식에 속하고, 종려 나뭇가지를 흔드는 행위는 이스라엘의 중요한 종교절기인 초막절에 취하는 종교의식입니다. 그들은 나귀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의 앞뒤에서 환성을 올리고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구하소서’라는 뜻인데, 원래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외침이지만 경우에 따라서 왕에게 자비를 구하는 외침으로도 등장합니다.(삼하 14:4, 왕하 6:26). 마가는 지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이야말로 ‘호산나’라는 외침을 받으실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곧 왕이라고 말입니다.
고대사회는 철저하게 왕정 체제로 움직였습니다. 왕은 모든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소유한 인물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런 왕권이 로마 황제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믿었고, 그것을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신앙도 그와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완전히 지배당해야 왕, 메시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왕
그런데 예수님의 왕권은 정치적인 게 아닙니다. 그는 전쟁을 통해서 자신의 힘을 자랑하는 그 당시의 황제처럼 자신의 왕권을 행사하는 분이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런 황제들에게서 그 어떤 가능성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과 예수님을 일치시킬 수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정치적인 왕이었다고 한다면, 혹은 그런 걸 시도했다면 그는 나귀가 아니라 말을 타고 당당하게 입성했겠지요.
복음서 기자들이 인용한 스가랴 9:9b과 뒤이은 10절 말씀을 봅시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 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큰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시리라.” 마가복음 기자는 바로 이 구절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합니다. 즉 예수님은 전쟁의 왕이 아니라 평화의 왕이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은 수많은 왕들이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언급하기도 싫은 것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는 전쟁 이야기니까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미국은 3년 전에 이라크와 전쟁을 벌여서, 4개월 만에 승리를 노래했습니다. 9.11 테러를 일으킨 집단을 지원하고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하고 있다는 이유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이런 이유에 근거가 없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졌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이 전쟁을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비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까요? 이 세상의 왕들은 전쟁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이유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태는 비단 정치세계만이 아니라 인간문명이 발달한 곳은 어디나 비슷합니다. 기업가들도 경제적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대학들도 역시 그렇고, 병원도 역시 그렇습니다. 매스컴은 없는 이야기도 선정적으로 부풀려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하려고 합니다.
크고 작은 전쟁의 왕들이 통치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평화의 왕인 예수님을 믿고 그를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만이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은총으로 주실 수 있으며, 또한 그를 믿는 우리는 그 평화의 은총에 의지해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오늘의 교회가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경험하고 있을까요? 교회가 힘의 논리로 강압적인 평화를 조장하는 세력과 투쟁할 자세를 갖고 있을까요? 아니 우리 자신은 지금 평화의 영에 사로잡혀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평화의 왕으로 경험되고 있을까요? 이런 질문 앞에서 우리는 별로 자신이 없습니다. 간혹 마음이 평화로울 때도 있지만 어느 순간에 그런 게 다 허물어지는 때도 많습니다. 또한 평화의 왕이 세상에 오셨는데도 그 평화의 질서가 별로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왜 우리 개인과 이 세상에 평화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을까요? 예수가 주는 평화는 왜 구체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은폐된 왕권
오늘 본문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알고 환호하는 사람들이 누굽니까? 그들은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과 일부 추종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인식한 사람들은 일부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들이 예수님에게 보인 환호성은 예루살렘 전체 주민들에게 별로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예수가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의 장군처럼 개선행진을 벌였다면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알아보았겠지만, 나귀를 탔기 때문에 주목을 끌지 못했습니다. 이게 곧 예수의 평화와 세상의 관계입니다. 생명이 완전하게 그 모습을 드러낼 예수의 재림까지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라는 사실은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진리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본문 11절이 조금 더 리얼하게 알려줍니다. 앞에서 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후에 벌어진 일이 앞의 분위기와 너무 차이가 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귀를 타고 오시는 평화의 왕이 이제는 그냥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타고 들어온 나귀에 대해서 마가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한가한 듯이 성전을 둘러보셨고, 그 사이에 날이 어두워졌으며,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추적한다면, 그는 베다니에서 제자들과 함께 손발을 씻고 밥을 먹었겠지요. 그들은 그날 하루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서로 대화하고 차를 마시거나 포도주를 마시면서, 피곤한 사람들부터 잠에 떨어졌겠지요. 이런 모습에서 예수가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누가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제자들과 함께 유랑하는 아주 평범한 스승쯤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왕권은 이렇게 은폐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나귀를 탄 평화의 왕이 예루살렘에 입성했다는 마가복음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그 평화를 현실적으로 실감하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초라한 것처럼 보이지만 나귀를 탄 평화의 왕인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평화는 시작했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평화가 그를 통해서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나귀를 탄 예수님에게서 그 사실을 눈여겨 볼 줄 알아야 하며, 더 나아가서 사람들에게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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