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음에서 봄으로!
(막 10:46-52)
오늘 설교 본문(막 10:46-52)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사람은 시각 장애인 거지 바디매오입니다. ‘바디매오’라는 이름은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여리고 성 길목에 앉아서 구걸을 하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되고,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 다 들어 있는데, 약간씩 다르게 전승되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바디매오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마태복음에는 등장인물이 두 사람으로 나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로 들어가다가 이 사람을 만난 반면에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여리고를 나오다가 만납니다. 세 복음서가 약간씩 차이를 보이지만 중요한 대목에서는 일치합니다. 시각장애인이 여리고 근처 길가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제 예수님이 체포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될 바로 그 도시입니다. 죽음의 도시로 들어가기 직전에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섰다는 것은 바디매오 이야기가 예수님의 운명에서도 아주 중요했다는 뜻입니다.
듣는 바디매오
여리고 성 길목에 앉아 구걸하던 바디매오의 처지를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생존 능력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처럼 공부할 수도 없고,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양을 칠 수도 없습니다. 남이 도와주지 않으면 밥 한 끼도 끓여먹기 힘들었습니다. 복음서가 그를 ‘맹인 거지’라고 묘사한 걸 보면 그의 집도 그렇게 넉넉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집이 넉넉하면 이 사람에게 구걸행각을 시키지 않았겠지요. 이런 사람을 오늘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봅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육교나 지하도, 또는 지하철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가난한 장애인들이나 오랜 세월 실직자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이런 이들이겠지요. 그들의 처지가 얼마나 절박한지는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바디매오는 오늘도 자기 자리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아마 햇빛은 찬란하게 비치고 있었겠지요? 구름이 잔뜩 끼었을까요? 바람이 솔솔 불었을지도 모릅니다. 심술궂은 동네 꼬마들은 바디매오를 놀려댔겠지요. 동냥 그릇에 작은 돌멩이를 던져 넣으면 바디매오가 돈인 줄 알고 확인했다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깔깔댔겠지요. 그런 일이 어디 한 두 번이었겠습니까? 바디매오에게는 그것이 일상이었습니다. 혹시나 인심 좋은 부자가 지나가다가 큰돈을 주기만을 기대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무료하게 하루를 지내고 있는 그의 귀에 특별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사렛 예수다!”라는 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디매오의 옆을 지나면서 예수님을 부른 것인지, 아니면 지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디매오의 귀에 그 소리가 들린 것은 분명합니다.
바디매오는 귀가 번쩍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까요? 처음 듣고 그런 경험을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여리고 성 길목에 앉아 있던 바디매오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여기에는 나사렛 예수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당시에 파다했습니다.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를 낫게 하셨고,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으며, 그리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게 하셨고, 벳세다에서 맹인을 낫게 하신 소문을 바디매오도 들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누군가 하는 궁금증이 바디매오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나사렛 예수를 한번 만나보리라 하는 꿈을 키워왔겠지요. 진리를 향한 열정이 그의 마음 밭에서 큰 나무로 자라고 있었던 겁니다. 그는 귀를 그쪽으로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나사렛 예수다!” 하는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혼의 안테나가 있습니다. 그 안테나는 모든 방향의 소리를 잡아내는 게 아닙니다. 안테나가 어디를 향하는가에 따라서 들리는 소리도 달라집니다. 돈 버는 것에만 안테나가 맞춰져 있으면 그런 소리만 들리겠지요. 자기가 잘난 것을 나타내는 것에만 안테나가 맞춰져 있으면 그런 쪽의 소리만 들립니다. 우리 영혼의 안테나는 어디를 향해 있을까요? 생명과 구원의 소리를 향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생명과 구원을 향해서 진력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거기서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를 따라오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건 아닙니다. 그들의 영혼이 진리와 구원에 목말라 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도 생명의 소리를 들은 경우도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도 모르는 깊은 차원에서 생명을 향한 목마름이, 마치 땅속의 용암이 끓고 있듯이 끓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다!”는 소리가 바디매오의 영혼을 크게 울렸습니다. 그의 영적인 용암이 분출될 지경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 순간의 경험이 어떤 것이었을지 상상해보십시오. 사막에서 길을 잃고 있다가 오아시스를 발견한 바로 그런 느낌이었을까요? 전쟁 중에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피난민 행렬에서 아이를 찾았을 때의 느낌이었을까요? 그 순간의 바디매오에게는 이제 맹인거지라는 자기의 정체성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소곳이 앉아서 사람들의 연민을 자아내야 한다는 본연의 임무도 모두 망각했습니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자기를 얽어맸던 모든 습관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거기서 그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구약성서가 메시아를 가리킬 때 사용한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하고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예수님을 부른 바디매오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메시아 앞에서 사람이 취해야 할 가장 정확한 태도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맹인 거지는 불쌍한 사람이니 ‘불쌍히 여겨 달라.’는 외침이 당연하겠지, 하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바디매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돈이 없어서, 건강이 나빠서, 혼자 살아서 불쌍하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그 이유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피조물의 한계를 누가 벗어날 수 있습니까? 하루만 굶어도 우리는 식욕의 노예가 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역시 우리 내면이 공허합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이미 경험하고 있을 겁니다. 옛날에 비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환경은 모두 최상의 조건으로 바뀌었습니다. 옛날 왕들도 우리처럼 살지는 못했겠지요.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만족을 모릅니다. 조바심을 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특별히 욕심이 많아서라기보다는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현대인들은 바디매오의 이 외침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너무 잘났기 때문이 아닐까요? 너무 잘나고 싶어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기가 불쌍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통찰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의 소유가 너무 많은 탓은 아닐까요? 이럴 바에야 차라리 바디매오처럼 맹인 거지가 되는 게 낫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라도 자신이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지를 인식하는 것이 너무 잘나서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를 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요?
오해는 마십시오. 기독교인들이 모두 패배주의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습관적으로 “나는 죄인이야!” 하는 방식으로 죄책감에 사로잡혀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공부도 잘 하고, 사업도 잘 하는 게 좋습니다. 무기력하고 무책임하게 살면서 ‘이 세상은 썩었어.’ 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은 병든 신앙입니다. 문제는 사람의 영적인 차원을 못보고 자기가 이룬 업적에 도취되어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보는 바디매오
예루살렘을 목전에 둔 예수님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외친 바디매오는 지금 예수님을 따라오는 제자들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예수님을 이해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있었지만 바디매오의 영적 경험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의 귀에 바디매오의 외침은 우스꽝스럽게 들렸겠지요. 또는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피곤하게 한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들은 바디매오를 꾸짖으면서 “잠잠 하라.”고 했습니다.
이 장면을 다시 상상해보십시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향해서 외칩니다. 그에게는 오직 “예수다.”하는 소리밖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바디매오의 이 외침을 하찮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말을 할 줄 모릅니다. 그냥 “잠잠 하라.”고만 할 뿐입니다. 바디매오가 잠잠해야만 거기서 지체하지 않고 자신들의 갈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이들이 특별히 이상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다만 바디매오의 영적 경험에 이르지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속한 사람들일까요?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똑같은 외침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그를 불렀습니다.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왔습니다. 그가 얼마나 다급했는지를 이런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영적 실존이 불쌍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구원의 현실 앞에서 이렇게 다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의 대답입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조금 의외로 생각했을 겁니다. 동냥을 많이 얻고 싶어 할 줄 알았겠지요.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런 차원에 머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궁극적인 구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지금 필요한 것은 먹을거리와 집과 가족이 아니라 ‘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 바디매오는 곧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길에서 따랐다고 합니다. ‘길 가에’ 앉았다가 이제 ‘길에서’ 예수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마가복음 기자는 바디매오 이야기를 통해서 무얼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잘 믿기만 하면 바디매오처럼 시각장애인이 눈을 뜬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을 잘 믿기만 하면 바디매오처럼 횡재를 할 수 있다는 말일까요? 눈을 떴기 때문에 이제 바디매오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일까요? 그런 방식으로 우리 삶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면 인생은 그야말로 구구단 외우기보다 더 쉽습니다. 눈을 떠도, 좋은 직장을 얻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도 우리 삶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성서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본문이 결론 부분에서 말하는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디매오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었는데, 그 구원은 곧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키워드는 세 가지입니다. 믿음, 구원, 봄입니다. 이 단어들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합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은 예수님을 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그는 정확하게 인식하고 믿었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바디매오가 애를 써서 성취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메시아를 통해서 선물로 주어지는 구원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세상을 본다는 사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세상을 보고 있으신가요? 무엇을 보고 있나요? 보고 있는 것이 확실한가요?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을 대단히 확실한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1)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못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미시의 세계와 거시의 세계는 우리가 전혀 못 보고 삽니다. 2) 우리가 본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옛 어른들이 인생을 큰 꿈이라고 말했는데, 옳습니다. 꿈으로 본 것을 진짜로 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꿈에 친구에게 10만원을 빌려주었습니다. 다음날 만나서 10만원 갚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이런 마당에 우리가 뭔가를 확실하게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거꾸로 예수 믿기 전에는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했다는 말도 됩니다. 그게 이해가 되지요? 예수를 믿기 전의 세상과 믿은 후의 세상이 전혀 달라진 게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여전히 밥을 먹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여전히 부부싸움도 합니다. 이 문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기 전과 오신 이후의 세상이 별로 달라진 게 없는 논리와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이 세상은 여전히 악하고, 싸우고, 무죄한 자의 고난이 계속됩니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세상의 예를 들어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어느 날 갑자기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에게 세상이 달라졌는가 하고 물어보십시오. 당연히 달라졌다고 대답할 겁니다. 남에게 구걸하며 살다가 예수님을 따라나서게 된 바디매오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의 실체를 새롭게 보게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사람들이 입으로 실어 나르는 소문으로 듣는 게 아니라 실질로, 즉 하나님의 은폐된 통치의 시각으로 보게 된 사람들입니다. 문학적인 수사로 이렇게 표현해야겠습니다. 이 세상은 이제 우리에게 꽃으로 활짝 피게 될 그 순간을 기다리는 꽃봉오리와도 같습니다. 부활의 생명이 바로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가요?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을 따르십시오. (200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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