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소금
막 9:38-50, 창조절 넷째 주일, 2015년 9월27일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오늘 설교 본문인 막 9:38-50절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이야기가 연속적으로 나옵니다. 첫 번 이야기는 막 9:38-40절입니다. 제자 요한이 예수님에게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은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 이외에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과 협조 관계에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반목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처한 상황도 비슷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행동을 나무라셨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막 9:41-48절입니다. 앞의 이야기와 연속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이 과격합니다.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고, 손이나 발이 죄를 범하면 지옥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이라는 코멘트도 달렸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심판한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고, 하나님이 마치 염라대왕처럼 폭력적인 존재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막 9:49-50절입니다. 신앙을 소금으로 비유합니다. 소금은 맛을 내고, 부패를 막아주고, 정화하는 기능이 있는데, 고대사회에서 중요한 물품으로 다루어졌습니다. 구약은 곡식예물(레 2:13)과 가루 향(출 30:35)에 소금을 치라고 했습니다. 막 9:50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은 마 5:13절에서도 제자들을 소금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세 가지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보십시오. 첫째는 예수를 따르지 않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고, 둘째는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할 경우에 임하는 심판에 대한 이야기였고, 셋째는 제자들이 소금의 맛처럼 신앙의 맛을 유지하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이야기의 기본 구조는 똑같이 사람 관계입니다. 첫째 이야기는 교회 밖의 사람들과의 관계이고, 둘째 이야기는 작은 자, 즉 사회적인 약자들과의 관계이고, 셋째 이야기는 제자들끼리의 관계입니다.
사람 관계
사람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작동되는 기본 원리가 경쟁이기 때문입니다. 적자생존이라는 진화의 과정을 거쳐 온 인간에게 경쟁은 숙명적입니다. 경쟁자와 어떻게 사이좋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본문에서 요한이 어떤 이들을 비난한 건 이해가 갑니다. 오늘의 교회와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타종교와도 경쟁합니다. 그들을 적그리스도로 비난하기도 합니다. 고유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가 훼손되지 않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인간관계에서 또 하나의 어려운 대상은 오늘 둘째 이야기가 말하는 ‘작은 자’들입니다. 본문은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잘못을 짚은 뒤에 죄를 지은 손과 발을 찍어내고, 눈을 빼버리라고 말합니다.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약자들과의 관계가 그렇게 준엄할 뿐만 아니라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약자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비난받는 이들입니다. 노예, 극빈자, 장애인, 성 소수자 등등입니다. 요즘은 아프리카 출신 난민들과 시리아 출신 난민들이 그렇습니다. 그런 이들과 잘 지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민폐를 끼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입니다. 민폐를 무조건 받아주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그걸 받아주는 게 능사도 아니고, 어느 선까지 받아주어야 할지도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노숙자 단체가 우리교회에 와서 일주일에 하룻밤만 교회 사무실에서 노숙자들이 지낼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합시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룻밤만 약속했다가 다시 이틀 밤으로 늘어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돌을 짊어지고 바다에 들어가는 게 낫다는 주님의 말씀이 현실에서는 공허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야기는 제자들 사이의 관계를 말합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을 미루어 보면 당시에 제자들끼리 사이좋게 지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바로 앞 대목인 막 9:33-37절에는 제자들이 누가 잘났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는 보도가 나옵니다. 제자들의 이런 행태를 보면 참으로 딱해 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교회 안의 신자들끼리도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는 사람들도 역시 앞에서 인용한 막 9:33-37절이 보듯이 누가 주도권을 행사하나, 라는 문제에 예민하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선의마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한계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신앙의 요구와 인간적인 한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하고 갈등하고 있습니다. 진정성 있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신자들은 그 사태 앞에서 힘들어합니다. 차라리 신앙이 없다면 막나가는 식으로 살아도 되겠지만 기독교인이기에 그렇게도 못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런 고민을 좀 해라, 다른 사람들에게 연민을 품고 살라는 뜻으로 오늘 말씀을 주신 걸까요? 이 말씀을 읽는 우리도 계속해서 고민하면서 살아가야 할까요? 뻔뻔스럽게 사는 것보다는 고민하는 게 낫긴 하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을 그런 방식으로 닦달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서로 상대적이기 때문에 혼자서 고민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모든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는 것은 이를 주도한 이들과의 관계가 적대적이었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저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모든 사람들과 무조건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금 맛
오늘 본문에서 중심은 ‘소금 맛’이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소금 맛은 짭니다. 그게 본질입니다. 겉모양만 소금이고 그 맛이 달거나 시다면 그건 소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를 사람이 없을 겁니다. 예수의 제자라면 제자다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자답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는 이상적인 인격을 도야한다거나 유토피아적인 이상 세계를 도모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소금의 맛이 짠 거라면, 제자들의 맛은 믿음입니다. 본문은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느냐 했고, 병행구인 마 5:13절은 한걸음 더 나가서 아무 쓸 데가 없어서 버림받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이 갑니까? 버림받는 것, 예수와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단순히 제자 집단으로부터 축출당하거나 교회로부터 출교당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출교를 당해도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일 수 있고, 교회에서 중직을 맡아도 실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좀더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기독교인이 예수님과의 결속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버림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기쁨과 자유가 그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존재론적인 기쁨과 존재론적인 자유입니다. 버림받는다는 말, 또한 더 이상 짜게 할 방법이 없다는 말은 사람이 생산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자유로부터 멀어진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었을 때, 티브이에서 연예 오락 프로그램을 볼 때, 등산이나 테니스 등의 취미활동을 할 때 느끼는 기쁨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것들도 우리가 살아가가는 데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으로 우리가 온전히 기쁨을 맛볼 수는 없습니다.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자유롭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는 결코 없습니다.
이런 설명이 모호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취할 때 느끼는 기쁨과 교회생활에서 느끼는 기쁨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성취에서 더 큰 기쁨을 경험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생각은 예수님을 통한 기쁨이, 즉 믿음의 기쁨이 뭔지를 경험하지 못해서 나온 겁니다. 진짜 보석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가짜 보석을 진짜 보석으로 착각하는 거와 같습니다. 그런 사람의 삶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현상의 하나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삶의 매너리즘입니다. 삶이 무료해지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를 성취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과 자기가 관심을 기울이던 것에 더 열광적으로 매달립니다. 이 두 가지 현상은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삶의 상투성은 사람을 어딘가에 매달리게 합니다. 상투성과 매달림이라는 현상은 바로 버림받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기쁨과 자유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짠 맛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소금처럼 믿음의 깊이로 들어가서 기쁨과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여러분들은 다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황금 같은 시간을 내서 교회에 나왔을 겁니다. 신앙의 깊이로 들어간 경험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믿음의 깊이로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영혼의 깊이에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음모에 가담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종교적으로 세련되고 전문가다운 이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타가 공인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종교적 전통에만 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늬만 하나님을 믿는 거였지 실제로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믿음의 세계로, 즉 하나님의 존재 신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도 자신들에게 익숙한 삶의 형태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를 좀더 편하게 하고, 또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거나 도덕적인 품격을 유지하려고, 더 노골적으로는 세속적인 복을 받으려고 신앙을 필요로 할 뿐이지 신앙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뭔지를 모르면서 교회생활을 합니다.
요즘 우리는 수요일마다 <욥기>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14장을 공부했습니다. 그 시간에 저는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욥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욥이 처한 운명은 두 가지 점에서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기독교인들이 욥기 읽기를 어려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는 욥의 운명이 실제로 저주스러운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던 모든 것을 그는 잃어버렸습니다. 재산, 자식, 건강, 명예를 다 잃었습니다. 그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불행과 재난은 죄로 인한 결과이거나 더 큰 믿음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이라는 유대인들의 전통적 지혜 신앙을 그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는 스올에 떨어져서 혼자 지내기를 바랄 정도였습니다. 하이데거의 표현으로 그것은 ‘섬뜩한 기분으로서의 불안’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세계-내-존재가 겪어야 할 이런 불안을 외면합니다. 그리고 일상의 익숙한 것에 길들여져 감으로써 안정감을 누리려고 합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런 태도는 비본래적인 존재로 퇴각하는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부활, 종말, 생명완성은 우리의 일상에서 볼 때 낯선 것이어서 기독교인은 그걸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런 상태로는 신앙의 깊이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신앙의 맛
오늘 여러분들이 소금의 맛처럼 신앙의 맛을 실제로 느끼고 그 맛과 일치해서 살아가기 원하는지 돌아보십시오.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하나님과 그의 통치와 그 구원에 실제로 관심이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거기에 관심이 없으면 사람은 결국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누가 크냐?’ 라고 서로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누가 더 잘하는가에 마음이 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을 향해서도 마음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모든 판단의 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일도 자주 벌어집니다. 그들보다 자신들이 더 잘났다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비교 우위로 만족하는 방식으로는 기쁨과 자유를, 즉 구원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세상의 기준으로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삶을 소진할 뿐입니다. 그렇게 살아도 멋진 인생이었다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삶이 우리를 일시적으로나마 흥분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에 기만당하면서 아무 대책 없이 따라갑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다른 이들이 볼 때 세련되고 교양이 있고 헌신적인 마음이 있다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똑같습니다. 거기서 남는 것은 자기 열정뿐이지 하나님만이 허락하실 수 있는 생명 충만감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소금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잃어버리면 기독교인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어집니다. 존재 가치가 없어지면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살이가 겉으로 아무리 화려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21세기 오늘의 문명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여도 그 바닥에 허무와 자기 파괴와 냉소가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자리와 그 순간이 바로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지옥이 아닐는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짠맛을 유지하고 있는 영적 소금으로서의 정체성을 놓치지 말고, 매 순간 신앙의 깊이로 한걸음씩 들어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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