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9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FR2WX-GrCR4?si=tRysz2pSJVw7UD8D
▣ 들어가는 말
- 성경은 반윤리적인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신에게 바치는 장면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논란이 많았던 사건입니다. 성경에는 합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많은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그런 사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해석하는 일이 쉽지 않지요.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가 오늘의 본문입니다. 굉장한 기적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비윤리적이기 때문이지요. 그 무엇보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어야 할 성경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너무나 혐오스러운 명령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는 그 어떤 사상보다 더 자유롭고, 차별이 없으며, 모두를 향한 사랑을 담고 있는 것 아닌가요. 고대의 혐오스러운 많은 종교가 인간의 희생을 요구하고, 성적으로 비윤리적이며, 자식을 바치는 제사의식 등을 요구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잘못되고 왜곡된 사이비 종교의 허상을 폭로하고 깨뜨리고 진정으로 인간을 향한 종교,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종교, 인간을 넘어서 온 세계를 구원하는 종교가 그리스도교, 성서의 하나님 아닌가요. 그런데 본문은 그런 하나님의 이미지를 산산이 깨뜨려놓고 맙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아브라함의 시험은 우리의 이야기다
본문이 가진 이러한 반윤리적인 요소 때문에, 이 본문과 관련해서 비난과 오해, 그리고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오늘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함께 고민해 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탐색해 보려 합니다. 본문에 대한 본격적인 탐색에 앞서 먼저 중요한 탐색 도구(?), 관점, 전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신정통주의 4대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루돌프 불트만의 관점입니다. 그는 ‘비신화화’ 혹은 ‘탈신화화’로 유명한데, 그 이름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거칠게 설명해 보자면, 성서의 메시지가 신화라는 껍데기로 포장되어 있어, 현대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신화라는 포장지를 벗겨내고 그 안에 있는 알맹이(진짜 메시지)를 찾아 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의 통찰이 매우 유용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을 신에게 바치는 오늘 본문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 어려운 신화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불트만의 비신화화에서 핵심은 역사적, 신화적 층위 넘어 실존적 진리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실존적 삶 속에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와 결단에 대한 의미를 드러내는 상징으로 읽어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시험은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 해석들
본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키르케고르: 신앙의 도약 (Leap of Faith)
1800년대 전반기, 덴마크의 철학자로 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키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아브라함을 “신앙의 기사”(Knight of Faith)로 표현합니다. 그가 말하는 신앙은 ‘윤리적 단계를 뛰어넘는 신앙적 단계’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윤리적인 보편성에 머물러 있다면, 인간 도덕의 고양을 가져올 수는 있으나 전적으로 다른, 질적으로 다른 구원, 하나님 나라의 상태는 아니라는 말이지요. 따라서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행동이 윤리적으로는 비도덕적이고 모순처럼 보이지만, 윤리를 넘어선 신앙의 차원, 초월적 차원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되찾는 역설적 상황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이성과 윤리를 초월하는 전인격적 결단이며,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진리는 주체성이다.”라는 그의 말에 잘 나타납니다.
- 칼 바르트: 하나님의 말씀과 신뢰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불리는 칼 바르트의 해석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관점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행동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표현으로 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인간의 반응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반응은 바로 “예(Yes)”라는 것이지요. 신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예’만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굉장하지요. 거대하고 거룩한 신의 말씀이 인간을 향해 올 때,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저 온전한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마리아의 고백처럼 말이지요. 아울러 이 사건은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요 3:16)을 상징적으로 미리 보여주는 것이며, 구원 역사의 중요한 단초로 해석됩니다.
- 루터: 믿음과 순종
종교 개혁자 루터는 이 본문을 “믿음의 시험”으로 해석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믿음)으로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 했다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이삭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11:19)을 강조하며, 아브라함의 믿음은 부활의 희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봅니다.
- 해방 신학: 희생과 해방의 재해석
해방 신학자들은 이 본문을 전통적인 순종의 이야기로 읽기보다, 인간 희생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를 중심으로 재해석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순종하기를 원하셨지만, 이삭의 희생을 허락하지 않으신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서, 하나님은 인간의 희생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셨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이 숫양을 준비하신 것은 억압과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 하나님이 새로운 해방과 희망을 준비하신다는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 존재의 기반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저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인간(우리)과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우리의 이야기로 읽어보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셨던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에게 그 명령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분명 그 사건은 단지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한 인물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찾는, 길을 찾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 운명과 선택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에 등장하는 스코틀랜드의 장군 맥베스는 노르웨이와 결탁하여 나라를 삼키려는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돌아오는 길에 세 마녀를 만납니다. 그 세 마녀는 맥베스에게 예언과 같은 묘한 말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맥베스를 환영하라! 글래미스의 영주시다! 맥베스를 환영하라! 코도의 영주시다! 맥베스를 환영하라! 왕이 되실 분이시다.” 글래미스의 영주였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영주의 자리를 물려받습니다. 그리고 노르웨이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코도의 영주를 전쟁에서 승리하여 진압했는데, 반란 진압의 공을 인정하여 스코틀랜드의 왕 덩컨이 맥베스에게 코도의 영주 자리도 주지요. 마녀들의 한 말이 실현되어가자, 맥베스는 왕이 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 확신하게 됩니다.
장군 맥베스는 왕이 된다는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마녀의 예언은 분명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자신의 길을 완전히 바꾼 것은 마녀의 예언이었을까요. 아니면 욕망에 이끌린 스스로 한 선택이었을까요. “천둥, 번개, 아니면 비 속에서 언제 다시 우리 셋이 만날까?” “난리 소리 멈췄을 때, 싸움이 판가름 났을 때.” “그때는 해지기 전 일거야.” “장소는 어딘데?” “황야야.” “그곳에서 맥베스를 만날 거야.” 『맥베스』의 첫 장면입니다. 어스름한 해 질 무렵, 전쟁이 끝난 전쟁터, 황야에서, 마녀 셋이 맥베스를 만납니다. 그림이 그려지지요. 그 예언이 뭔가 온전치 않음을 알 수 있지요. 온전한 판단이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고, 또, 예언하는 인물이 마녀라는 것은, 그 예언이 끔찍한 불행을 가져올 것, 교묘한 유혹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반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하나님이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는 장면입니다. 흔히 아브라함의 소명이라 불립니다. 이 사건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브라함도 그것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엄청난 일임을 직감합니다. 신의 거룩한 명령이 그에게 임했으니 말이지요.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12:4) 나이가 언급되었고 그것도 75세라고 한 것을 보면, 그의 떠남이 굉장히 힘든 결정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꿀 어떤 굉장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지요. 신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은 마땅히 그런 의미일 터이지요.
신의 부르심은 어떻게 오는 걸까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운명일까요. 선택일까요. 맥베스를 향한 마녀의 예언과 아브라함을 향한 신의 약속. 이 두 장면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 궁극적 관심
틸리히는 우상 숭배를 “왜곡된 궁극적 관심”이라고 봅니다. “궁극적 관심”이란 인간이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고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인데, 단순한 관심이나 흥미가 아니라 삶의 방향과 목적을 결정하는 중심 요소입니다. 인간이 어디에 혹은 무엇에 이러한 궁극적 관심을 두고 있느냐에 따라 그 존재가 결정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가 본 우상 숭배는 단지 어떤 형상에 절을 하는 것 따위가 아니라, 온전치 못한 것에 궁극적 관심을 두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궁극적 관심(권력, 재물, 성공)을 추구하게 되면, 삶이 왜곡되거나 파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맥베스는 세 마녀의 예언을 자신의 궁극적 관심으로 삼습니다. 그의 관심은 권력과 욕망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궁극적 관심을 하나님 대신 세속적 성공과 자기 이익에 두었기 때문에, 그의 삶은 결국 파멸로 이어집니다. 틸리히는 하나님을 “존재 자체(Being-itself)”로 이해했고, 진정한 궁극적 관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맥베스의 이야기는 인간이 궁극적 관심을 왜곡된 대상으로 돌릴 때, 존재의 기반이 무너지고 비극이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 아들 이삭을 희생하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이것은 그의 궁극적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물음, 시험입니다. 너의 궁극적 관심이 “복의 근원”이 되는 것에 있는지,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께 있는지를 묻는 물음입니다. 이 시험을 통해 성경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는 존재” 올바른 궁극적 관심을 가진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단순한 복종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의탁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궁극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윤리적 딜레마를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 나가는 말
- 존재의 기반을 어디에 둘 것인가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바로 오늘 우리가 만나는 매 순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삶의 매 순간 우리 존재의 기반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시험받습니다. 우리 존재의 기반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 각자가 삶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내려놓아야 할 실존적 순간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삭)을 붙들고자 하며, 그것을 잃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집착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참된 궁극적 의미로 삼는 실존적 전환의 순간입니다.
“내일과 또 내일과 그리고 또 내일은 이렇게 옹졸한 걸음으로 하루, 하루, 기록된 시간의 최후까지 기어가고, 우리 모든 지난날은 바보들의 죽음 향한 길을 밝혀주었다.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그림자가 걷는 것. 배우처럼 무대에서 한동안 활개치고 안달하다 사라져버리는 것.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은 건데 소음, 광기 가득하나 의미는 전혀 없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왕비의 자결 소식을 듣고 맥베스가 한 말입니다. 삶은 소음과 광기로 가득하나 의미는 없다는 말에서 그의 삶의 모든 모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존재의 기반을 성공과 욕망에 두었기에, 그의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 것이지요.
“이중의 뜻으로 우리를 속이는 사기꾼 악마들은 아무도 믿지 마라, 우리가 들을 때는 약속을 지키다가 희망하면 깨버린다.” 맥더프와 싸움 중 죽기 전 남긴 말입니다. 결국, 욕망의 속삭임에 속지 말라는 것이지요.
반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 기반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를 향해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22:17-18) 이 말은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개체를 향한 말이 아니라, 존재의 기반을 오직 하나님께 두는 이들의 삶이 어떠하리라는 것에 대한 성서의 선언인 것이지요. 그의 삶은 의미로 가득할 것이고, 그 삶의 방식은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맥베스라는 이름에서 ‘맥’은 ‘아들’을, ‘베스’는 ‘여인’을 의미합니다. 맥베스라는 이름은 여인의 아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맥베스는 여인에게서 난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은 욕망의 유혹 앞에 설 수밖에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지요. 존재의 기반을 신에게 두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조상, 믿음의 조상입니다.
믿음은 단순한 동의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신다’는 지적 동의를 넘어서, 삶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려놓는 실존적 결단입니다. 불트만에 따르면, 믿음은 과거의 신화적 사건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실존적 삶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의 마음과 존재를 당신께 내어 맡깁니다.
세상의 유혹과 욕망이 우리의 길을 어지럽힐 때,
아브라함의 신앙을 기억하게 하시고, 당신을 우리의 궁극적 관심으로 삼게 하소서.
우리의 선택이 당신의 뜻 안에서 축복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존재가 당신의 사랑 안에서 온전히 설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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